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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282호 | |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榮州 黑石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 및 腹藏遺物 | |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국립대구박물관 |
분류 | 유물 / 불교조각 / 목조 / 불상 |
수량/면적 | 일괄 |
지정연도 | 1993년 11월 5일 |
제작시기 | 조선 시대[1] |
1. 개요
榮州 黑石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 및 腹藏遺物. 조선 세조 4년(1458)에 왕실인사들이 시주하여 조성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그 안에 복장된 유물들. 불상은 영주 흑석사, 복장유물은 국립대구박물관이 소장 중이고, 유물 일체는 1993년 국보 제282호로 일괄 지정되었다.2. 상세
보권문(普勸文)[2]과 복장기(腹藏記)[3]따르면 세조 4년(1458)에 정암산(井巖山) 법천사(法泉寺)[4]에서 아미타여래를 주불로 하여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의 삼존상을 조성했다.이 불상은 조성 과정을 정확히 알 수 있는데 보권문에 천순 원년 2월(天順 元年, 1457), 복장기에는 천순 2년 10월(1458)이라고 기록했다. 즉 1457년 2월부터 시주를 받기 시작해 1458년 10월에 불상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권문의 천순 원년을 자세히 보면 종이를 덧대어 붙여 수정했는데 전후 사정과 사건의 시간대를 고려하면[5] 원래는 천순 2년이었던 것을 나중에 천순 원년으로 수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경우라면 1458년 2월에 시작해 10월에 완성한 것이 된다.
불상을 조성하려고 한 사람과 그 이유, 시주에 참여한 사람, 불상 조성에 관여한 사람, 시주를 받기 시작한 시기, 불상이 완성된 시기가 의미심장한데 이는 모두 금성대군과 단종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복장기에는 태종의 후궁인 의빈 권씨, 명빈 김씨, 효령대군, 세종의 부마인 광덕대부 연창위(光德大夫 筵昌尉)[6], 유인 신씨[7] 등 왕실 인물들의 이름이 기록됐는데, 시주자들 중에서도 의빈 권씨가 불상 조성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 처음에는 권씨 혼자 하려다 다른 왕실 사람들에게 시주를 요청한 모양이다.
의빈 권씨는 세종 4년(1422)에 태종이 죽자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지만, 이후로도 절이 아니라 여전히 궁에 머물면서 불상을 모시고 조석으로 예불을 올렸다. 보권문에 따르면 의빈 권씨는 세조 3년 11월(1457)에 죽은 금성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삼존상을 조성하려 했고 원래 아미타불삼존상에는 협시보살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심이 통례지만 여기서는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을 모셨다. 세 불보살 모두 불교에선 영혼 천도에 힘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금성대군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아들이지만 의빈 권씨 슬하에서 자랐기 때문에 권씨 또한 내심 아들처럼 여긴 듯하다. 그러나 금성대군은 단종 복위운동에 참여했다가 실패, 세조 3년(1457)에 사사됐으며 이어 단종도 죽고 말았다. 따라서 출가했다곤 하지만 자신이 키웠던 금성대군이 비참하게 죽었음을 슬퍼하여 삼존상을 조성하여 명복을 빌려고 한 것이다. 세조의 눈치를 보아 표현은 못 했지만, 어쩌면 단종과 다른 죽은 자들까지 다 천도되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의도를 드러내놓고 불상을 만들 수는 없는 일이므로 보권문과 복장기에는 왕과 왕비와 세자의 안녕, 전쟁의 종식, 나라의 태평, 백성의 평안, 불교의 광명, 부처님의 가르침이 성하기를 바란다는 바람을 적었다.
이 불상은 기록상으로는 두 협시보살과 함께 조성한 삼존상이었지만 보살상들은 도난당했고 원래의 불상은 아미타여래좌상만 남아 경북 영주 흑석사 극락전에 봉안됐다.[8]
영주 흑석사는 통일신라 때 창건되어 그 후 폐사된 채 방치됐던 절이었던 것을 1948년에 중창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9] 원래 이 불상은 인근의 초암사(草庵寺)[10]에 있었으나 6.25 전쟁 중 일대에 소개령(疏開令)이 떨어지는 바람에 당시 초암사의 주지였던 상호(祥鎬, 1895~1986)가 불상을 가지고 절에서 내려와 폐사지로 있던 흑석사에 불상을 안치하고 중창했다고 한다.
1992년 흑석사에 도둑이 침입해 이 불상을 훔쳐 달아난 사건이 있었지만 다행히 인근에서 불상을 회수할 수 있었다. 이때 도둑이 불상을 열어 복장유물들을 꺼내 놓고 갔는데[11], 사건 전에는 작은 절에 있던 아무도 가치를 알지 못한 불상이었으나 복장유물들을 연구한 결과 대단한 내력을 지닌 유물이라는 것이 밝혀져 1993년 불상과 복장유물들이 일괄적으로 국보에 지정됐다.
하지만 이 이후에도 흑석사에는 웃픈 일들이 있었는데 이때의 흑석사는 중창된 지 얼마 안된 작은 절이다 보니 이 대단한 유물들을 보관할 시설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1996년에는 이 유물들을 인근 파출소의 무기고에 1년 간 보관하기도 했다. 또 1999년에도 도둑이 들어 다시 불상을 훔쳐갔는데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승려들이 쫓아가 격투 끝에 회수한 일도 있었다. 도난 사고가 계속 생기자 흑석사 주지가 신도 회장에게 복장유물 중 묘법연화경 4권과 변상도를 맡겼는데 이걸 또 문화재 밀매업자에게 팔아먹으려다 발각돼 모두 구속되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다사다난한 일을 많이 겪어서인지 지금은 극락전 내부에 특수유리로 만든 케이스를 설치해 그 안에 보관하고 있다. 복장유물들은 국립대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복장유물은 다음과 같다.
- 전적(典籍)
- 아미타삼존불조성보권문: 6면으로 접힌 절첩본으로 능화판으로 찍어내었으며 앞면은 사격자모란당초문, 뒷면은 모란국당초문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의빈 권씨, 명빈 김씨, 효령대군, 세종의 부마인 연창위 안맹담[12], 유인 신씨, 대시주 이우와 지용천, 대화주 성철 등의 이름을 묵서했다.
- 아미타삼존불복장기: 아미타삼존불을 조성하며 넣은 복장기. 파란색의 비단과 한지로 구성됐는데 비단에는 왕실 사람과 주요 시주자, 스님, 불상을 제작한 장인의 이름, 한지에는 일반인들의 이름이 적혀 있으며 총 275명의 이름을 기록했다.
- 불설대보부모은중경 합각 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 조선 초 1432년 태종의 후궁 명빈 김씨가 발원한 왕실본이다. 부모의 은혜를 강조한 불설대보부모은중경과 부처의 힘으로 죄를 없애고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장수경인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을 합철했다. 동일한 2부가 함께 있었는데, 표지는 연녹색 명주로 만들어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전의 불경들이 주로 중국 당나라에서 만들어진 구양순체로 판각된 것과 달리, 고려의 사경체로 판각하여 우리나라 고유의 활자를 연구할 수 있고 태종~세조시기에 발달하던 한국 고유의 활자체계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다.
- 불조삼경: 불설사십이장경과 불유교경, 위산경책 3책을 묶은 것. 복장에서 나온 불조삼경은 표지를 감지에 금으로 화려한 연꽃문양을 장식하였다. 또한 고려시대의 목판본과는 달리 몽산의 서문을 수록하지 않고 대신 변상도와 같은 다수의 그림을 권수에 채워넣었다.
- 묘법연화경 변상도: 석가모니불이 사부대중에게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매우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 묘법연화경 권2, 3, 4, 5: 총 7권 중 4권만이 복장 안에 있었는데, 금니로 가장자리를 두르고 그 안에 연화문 네 송이를 배치한 후 바탕은 은니로 보상화문을 장식하는 등 매우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 부: 조선 초에 종이 6장에 찍어낸 부적.
- 직물
- 구름무늬 연녹색 겹보자기, 옥색 겹보자기, 남색 겹보자기, 대록색 겹보자기, 연청색 겹보자기, 흰색 명주, 구름과 보배무늬 황색 단직물, 황색 명주, 시주자명 청색 명주, 홍색 명주, 홍색 단직물, 홍색 명주, 황색 명주, 번모양 명주, 작은꽃 넝쿨무늬 초록색 단직물, 감색 단직물, 남색 기직물, 잎사귀 모양 직물, 흰색 구름무늬 사직물, 오색 견사, 황색 명주, 모시, 목판에 부착된 모시
- 오보병(五寶甁)
- 오곡(五穀): 흰 종이에 볍씨, 콩, 기장 등이 싸여 있었다.
- 오향(五香): 흰 종이에 다섯 묶음으로 싸여 있었는데 정향(丁香), 침향(沈香), 목향(木香), 유향(乳香), 곽향(藿香)이란 글씨가 있었다. 조상경(造像經)에 의하면 이 오향을 나누어 다섯 병 안에 봉안하고 대관정을 받으면 여래의 오분법신향을 얻어 사업이 번창한다고 한다.
- 오약(五藥): 흰 종이에 다섯 묶음으로 싸여 있었는데 계피, 인삼, 감초, 부자(두 묶음)라는 글씨가 있었다. 조상경에 의하면 이 오약을 나누어 다섯 병 안에 봉안하고 대관정(大灌頂)을 받으면 법왕의 몸을 얻어 무병장수한다 한다.
- 오황(五黃): 흰 종이에 다섯 묶음으로 싸여 있어야 하지만 복장에는 세 묶음만 있었다. 대황, 자황, 웅왕이란 글씨가 있었다. 대관정을 받으면 윤회를 벗어나 청정한 몸을 얻는다고 한다. 흑석사 복장유물에 없는 다른 두 묶음은 소황과 우황이다.
- 오보(五寶): 옥, 수정, 진주 등 4종류가 나왔다.
- 사리와 사리용기 : 도금된 용기 안에 사리 1과가 있었다.
복장유물들이 워낙 대단하다보니 상대적으로 소홀하지만 불상 자체도 상당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데 이 불상은 조각승들이 아니라 관아의 장인들이 제작했다. 복장기에는 불상 조성에 참여한 시주자 275명의 이름이 적혀있는데 여기에 이 불상을 제작한 장인들의 이름도 적혀있다. 제작을 지휘한 정5품 도화서(圖畫署) 화원(畵員) 이중선(李重善), 이흥손(李興孫), 부금(付金)[13] 한신(韓信), 금박(金朴)[14] 이송산(李松山), 칠(漆)[15] 김우롱(金牛籠), 막동(莫同), 각수(刻手)[16] 황소봉(黃小奉), 마조(磨造)[17] 김혈동(金穴同), 소목(小木)[18] 양일봉(梁日峯)까지 총 9명이다.
이 명단을 토대로 불상을 조성하는 과정은 이렇다. 화원이 불상의 밑그림을 만들면, 소목과 각수가 불상을 조각하고 모양을 만든다. 그런 다음 마조와 칠이 불상의 표면을 다듬고 그 위에 옻칠을 입힌다. 마지막으로 부금과 금박이 개금(改金)을 해 불상을 완성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불상의 형상을 만든 것이고 마지막으로 불상 내부에 복장기, 경전, 복장유물, 사리함 등을 넣어 불상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정리하면 왕실 인사들이 시주에 대거 나섰기 때문에 1년, 혹은 2년도 안되는 짧은 시간 내에 시주를 완료하고, 관아의 장인들까지 투입해 불상을 빠르게 완성할 수 있었다.
3. 의의
불상은 세조 시기에 왕실이 발원하여 만든 불상인데, 조선 500여 년 동안 이런 사례는 몇 없다. 세조 때의 숭불의식에 대해 알아볼 수 있고, 왕실에서 직접 조성한 완성도 높은 예술적인 불상으로 조선시대 불교 미술사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특히 평평한 가슴과 나발형 머리, 계란형 얼굴, 양 어깨를 덮어 수직으로 흘러내린 법의 등은 고려 후기 불상에 보이는 특징인 반면, 단정한 어깨와 긴 허리, 상투, 장식용 구슬, 옷주름 등은 이후 조선시대의 고유한 특징이다. 조선 왕실이 고려 후기 조각 전통을 계승한 한편, 조선 초 중국 명나라 불상 양식을 합쳤다. 조선의 불상이 발전한 과정을 고찰해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복장유물들은 개별적으로도 하나하나가 국가 보물급 가치가 있고 한국의 서지학과 불경사, 직물사, 염색사 등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4. 외부 링크
5. 국보 제282호
흑석사는 삼국시대 석조마애여래상과 통일신라의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81호 영주 흑석사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절로, 늦어도 통일신라 때 창건된 절이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폐사되었다가 1945년 다시 중창되었는데, 1990년대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던 목조아미타불상 몸체 안에서 많은 유물들을 발견되었다.
이 목조불상은 함께 발견된 기록들에 의해 조선 세조 4년(1458)에 법천사 삼존불 가운데 본존불로 조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정수리에 있는 상투 모양의 육계와 팔, 배 주변에 나타난 옷의 주름에서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이 보인다. 그러나 법천사란 사찰명은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등 여러 지역에 걸쳐 나타나고 있어 정확히 어느 곳에 있었던 절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불상의 몸체 안에서는 불상의 조성을 알리는 글과 시주자 명단이 들어있는 『불상조성권고문』을 비롯하여 불경 내용을 적은 『불조삼경합부』와 불교부적 등 7종에 걸친 14점이 나왔다.
또한 1824년 유점사에서 간행된 『조상경』에 나오는 불상 몸체 안에 넣는 부장물의 내용과 일치하는 38종의 다양한 직물들과 5향(香), 5곡(穀), 유리·호박·진주 등 칠보류가 함께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은 아미타불의 만든 시기를 알려줄 뿐 아니라, 개별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것으로 서지학(書誌學)과 직물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목조불상은 함께 발견된 기록들에 의해 조선 세조 4년(1458)에 법천사 삼존불 가운데 본존불로 조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정수리에 있는 상투 모양의 육계와 팔, 배 주변에 나타난 옷의 주름에서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이 보인다. 그러나 법천사란 사찰명은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등 여러 지역에 걸쳐 나타나고 있어 정확히 어느 곳에 있었던 절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불상의 몸체 안에서는 불상의 조성을 알리는 글과 시주자 명단이 들어있는 『불상조성권고문』을 비롯하여 불경 내용을 적은 『불조삼경합부』와 불교부적 등 7종에 걸친 14점이 나왔다.
또한 1824년 유점사에서 간행된 『조상경』에 나오는 불상 몸체 안에 넣는 부장물의 내용과 일치하는 38종의 다양한 직물들과 5향(香), 5곡(穀), 유리·호박·진주 등 칠보류가 함께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은 아미타불의 만든 시기를 알려줄 뿐 아니라, 개별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것으로 서지학(書誌學)과 직물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1]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는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의 제작시기를 밝히지 않고 있다.[2] 불상 조성을 위한 시주를 권하는 글[3] 불상 조성 후 작성하는 기록[4] 같은 이름의 법천사는 꽤 많이 있지만 정암산 법천사라는 절은 이 불상의 복장기 외에는 교차 검증으로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어디에 있었던 절인지는 알 수 없다.[5] 시주를 시작한 1457년 2월에는 아직 금성대군과 단종이 살아있었다.[6] 정의공주의 남편 안맹담(安孟聃). 부부 모두 법명을 받은 불자였다.[7] 1435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지만 의빈 권씨, 명빈 김씨와 마찬가지로 비구니가 됐기 때문에 이름을 올린 것으로 보인다.[8]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은 새로 만들어 삼존상의 형식으로 있다.[9] 절 뒤편에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81호)이 남아있다.[10]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이 원래 이 절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11] 도둑이 남겨두고 간 것만 회수한 것이라 무언가가 더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12] 정의공주의 남편[13] 금칠을 하는 장인[14] 금박을 만드는 장인[15] 옻칠을 하는 장인[16] 나무를 조각하는 장인[17] 나무를 갈아내는 장인[18] 나무를 깎고 다듬는 장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