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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 |
<colbgcolor=#315288><colcolor=#fff> 밀양 영남루 密陽 嶺南樓 | |
위치 | 경상남도 밀양시 중앙로 324 (내일동 40) |
분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조경건축 / 누정 |
시설 | 1동 (대루, 능파각, 침류각, 여수각) |
건축시기 | 조선 시대 |
지정일자 | 2023년 12월 28일 |
관리 | 밀양시 |
밀양 영남루 전경 |
1. 개요
밀양 영남루(密陽 嶺南樓)는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누각으로, 귀빈을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거나 휴식을 취하기 위한 옛 밀양도호부 객사의 부속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1844년 재건된 조선 후기 대표 누각 중 하나이다. 영남루는 밀양강의 수려한 경관과 화려하고 뛰어난 건축미가 돋보여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로서 평양 부벽루, 진주 촉석루와 더불어 한국의 3대 누각[1]으로 꼽혀왔고, 예로부터 많은 문인들의 사랑을 받았다.100년 전, 흑백사진에 담긴 《영남루》 모습
영남루는 1963년 보물 제147호로 지정되었고, 삼척 죽서루와 함께 2023년 12월 28일 대한민국의 국보로 승격 지정되었다.
2. 역사
영남루의 시초는 통일신라 때 세운 영남사(嶺南寺)라는 절에 있던 금벽루(金璧樓) 혹은 소루(小樓), 죽루(竹樓)라 불리는 작은 누각에서 시작된다. 이후 고려 때 절은 폐사되고 누각만 남아 있던 것을 1365년(공민왕 14)에 밀양군수 김주(金湊)가 중창하고 영남루(嶺南樓)라 한 것이 관영 누각으로서의 시작이다.조선 초 밀양부사로 부임하 안질(安質)이 영남루를 중창하면서 영남루 서쪽 주변에 소루(小樓)를 건축하였고, 1442년 권기(權技)가 소루(召樓)로 명명했고, 이를 부사 이충걸(李忠傑)이 임경당(臨鏡堂)으로 개명하였다. 연산군 때에 밀양부사 김영추(金永錘)가 임경당 반대쪽인 영남루 동북쪽에 망호당(望湖堂)을 지으면서, 이를 빈객을 위한 숙소로 제공하였다. 1542년(중종 37)에는 부사 박세후(朴世煦)가 망호당을 영남루 대루의 동쪽 바로 옆으로 옮기면서 능파각(凌波閣)이라 하였고, 임경당도 침류각(枕流閣)으로 개명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6세기 중반 영남루는 중앙의 대루를 중심으로 좌우 양쪽의 익루(翼樓)로 침류각과 능파각이 놓이는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영남루는 임진왜란 때 객사와 함께 모든 부속 시설이 소실되었고, 이후 중창 및 중수를 거듭하여 1844년 이인재(李寅在)가 밀양부사로 재임할 당시 대루의 규모를 확장하며 동서에 각각 능파각과 침류각을 배치하고, 대루와 침류각을 연결하는 여수각(如水閣, 층층각)을 설치하여 현재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이때 많은 부속건물을 지었고, 영남루를 포함하여 영역 전체를 ‘밀주관(密州館)’이라 불렀으며, 관원들과 지방 빈객들을 접대하고 유숙시키는 객사로 사용하였다.
3. 건축
밀양강변 절벽 위에 자리한 영남루의 대루는 동서로 뻗은 정면이 5칸, 남북으로 한 측면이 4칸인 가로장방형 대형 목조누각이다. 지붕은 옆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의 형태를 갖추고 있고, 부연을 사용한 겹처마에 처마 끝에는 막새를 달았다. 기둥의 높이가 높고, 기둥 간 간격이 넓으며, 마루 바닥을 높여 웅장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을 자아낸다. 대루의 각각 동쪽과 서쪽에는 익루로 능파각과 침류각을 달고 있고, 각각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침류각의 동쪽 배면 기단 위로는 계단 모양의 여수각이 연결되어 있다. 건물 서쪽면에서 침류각으로 내려가는 지붕은 높이차를 조정하여 층을 이루는 등, 경사지를 이용해 4동의 건물을 적절히 배치한 영남루는 건물 자체의 뛰어난 조형미가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다른 누정이 따라 올 수 없는 한국의 누각을 대표하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4. 시문과 편액
영남루는 빼어난 경관으로 인하여 역사적 명사들이 수많은 시문을 남겼다. 고려시대 정지상은 영남루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야경을 표현한 한시 「영남사루(嶺南寺樓)」를 남겼다. 전해지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一溪明月憑欄夜, 시내 비추는 달빛 받으며 난간에 의지한 밤이오,
萬里淸風卷箔天. 만리청풍(萬里淸風) 맞으며 발(箔)[2]을 걷은 하늘이네.
「영남사루(嶺南寺樓)」 중 일부, 출처: 고려시대 문학비평서인《보한집》(補閑集)
또한 조선 선조 때에는 영남루에 걸린 시판이 이미 300여 개에 이르렀다고 하나 지금은 12개의 시판이 남아 있다. '영남루' 이름 현판만 3개가 있고, 영남루의 당대 위상을 알리는 다양한 글귀의 편액이 9개나 된다.萬里淸風卷箔天. 만리청풍(萬里淸風) 맞으며 발(箔)[2]을 걷은 하늘이네.
「영남사루(嶺南寺樓)」 중 일부, 출처: 고려시대 문학비평서인《보한집》(補閑集)
- 송하 조윤형[3]이 1788년에 64세의 나이로 쓴 ‘영남루(嶺南樓)’ 현판
(1844년 중건하기 전에 쓰여져 이전의 중건 이전의 누각에도 걸려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 각각 7세, 11세 나이로 이현석, 이증석 형제가 1843년에 쓴[4] '영남루(嶺南樓)' 현판과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 현판
- 고종 때 좌의정을 지낸 귤산 이유원의 '교남명루(嶠南名樓)'[5]와 '강좌웅부(江左雄府)'[6] 현판
- 성파 하동주[7]가 1931년 쓴 '영남루(嶺南樓)' 현판
영남제일루 현판 |
5. 관람 정보
관람시간: 매일 9:00 ~ 18:00아랑전설 속의 아랑을 기리기 위한 아랑각, 단군 이래 역대 8왕조의 시조의 위패를 봉안한 천진궁, 작곡가 박시춘 옛집, 무봉사 등이 가까이에 있어 영남루를 관람하고자 한다면 함께 둘러보면 좋다. 특히 무봉사에 있는 보물 제493호인 밀양 무봉사 석조여래좌상은 옛 영남사(嶺南寺)에 있었던 불상이기에 영남루와 그 뿌리가 같아 함께 둘러보면 좋을 것이다.
6. 여담
- 여담으로, 영남루는 광복 이후 1955년 국보 제245호로 지정되었지만, 1962년 문화재보호법 시행에 따른 문화재 재평가로 인하여 1963년 보물로 변경 지정되었다. 이로 인해 밀양시는 영남루를 다시 국보로 지정하기 위해 국보 승격 신청을 두 차례 한 적 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2014년, 시는 영남루에 대한 국보 승격을 신청했지만,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는 그해 말 부결 결정을 내리며 첫 번째 도전이 실패하였다. 2016년에도 재차 국보 지정을 신청했는데 문화재청 현지실사 등이 진행되던 2018년, 시는 문화재청에 제출한 국보 승격 관련 신청서류들을 스스로 거뒀다. 밀양 영남루에 대한 건축학적 가치 등을 재조명하기 위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추가적으로 조사를 한 후, 2021년부터 세 번째로 승격을 추진한 결과 2023년 12월 28일 삼척 죽서루와 함께 국보로 승격되었다. 60년 만에 다시 국보의 이름을 거머쥔 셈이다.
- 밀양 아리랑의 가사에서도 영남루가 언급된다. 아리랑이 구전으로 전해지다 보니, 사설에 따라 가사 내용이 조금씩 상이하기는 하다.
남천강 굽이쳐서 영남루를 감돌고
벽공에 걸린 달은 아랑각을 비추네
영남루 명승을 찾아가니
아랑의 애화가 전해 오네
와 이리 좋노 와 이리 좋노 와 이리 좋노
밀양의 영남루는 와 이리 좋노
- 밀양영남루휴게소가 새로 개업했지만 최소 9km 거리나 되므로 훼이크 지명이나 마찬가지다.
7. 외부링크
8. 국보
영남루의 시초는 통일신라 때 세운 영남사(嶺南寺)라는 절에 있던 금벽루(金璧樓) 혹은 소루(小樓), 죽루(竹樓)라 불리는 작은 누각에서 시작된다. 이후 고려 때 절은 폐사되고 누각만 남아 있던 것을 1365년(공민왕 14)에 밀양군수 김주(金湊, 1339∼1404)가 중창하고 영남루(嶺南樓)라 한 것이 관영 누각으로서의 시작이다. 고려시대 정지상(鄭知常, ∼1135)은 영남루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야경을 표현한 한시 「영남사루(嶺南寺樓)」를 남겼다.
조선 초 밀양부사 안질(安質, ∼1447)이 영남루를 중창하면서 영남루 서쪽 주변에 소루(小樓)를 건축하였고, 1442년 권기(權技, ∼)가 소루(召樓)로 명명하였으며, 그 후 부사 이충걸(李忠傑, 1465∼1527)이 임경당(臨鏡堂, 현 침류각)으로 개명하였다. 1442년(세종 24) 연산군 때에 밀양부사 김영추(金永錘)가 임경당 반대쪽인 영남루 동북쪽에 망호당(望湖堂)을 지으면서 빈객숙소로 제공되었다. 1542년(중종 37)에는 부사 박세후(朴世煦, 1494∼1550)가 망호당을 영남루 대루의 동쪽 바로 옆으로 옮기면서 능파각(凌波閣)이라 하였고, 임경당도 침류각(枕流閣)으로 개명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16C 중반 영남루는 중앙의 대루를 중심으로 좌우 양쪽의 침류각과 능파각이 놓이는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 16세기 중엽의 회화로 알려진 이경홍(李慶弘, 1540∼1595)의『밀양십이경도(密陽十二景圖)』를 보면, 대루 좌우에 전각을 각각 배치하고 있는 묘사가 지금의 영남루와 유사한 배치 형태를 보이고 있음.
하지만, 영남루는 임진왜란 때 객사와 함께 모든 부속 시설이 소실되고, 이후 중창 및 중수를 거듭하였다. 영남루는 1844년 이인재(李寅在)가 밀양부사로 재임할 당시 대루의 규모를 확장하면서 동서에 각각 능파각과 침류각을 배치하고, 대루와 침류각을 연결하는 여수각(如水閣, 층층각)을 설치하여 현재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이때 많은 부속건물을 지었고, 영남루를 포함하여 영역 전체를 ‘밀주관(密州館)’이라 불렀으며, 관원들과 지방 빈객들을 접대하고 유숙시키는 객사로 사용하였다.
영남루의 대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 장방형 평면의 대형 목조누각으로 7량가 구조이다. 팔작지붕에 부연을 사용한 겹처마에 처마 끝에는 막새를 달았다. 내부는 통칸으로 구성 후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4면을 돌아가면서 난간을 설치하였다. 능파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5량가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대루의 우물마루와 바닥이 통한다. 침류각은 대루 서쪽에 위치하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5량가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동쪽 배면 기단 위로는 계단 모양의 여수각이 연결되어 있다. 이처럼 경사지를 이용하여 4동의 건물을 적절히 배치한 영남루는 건물 자체의 조형미가 뛰어날 뿐 아니라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모습은 다른 누정이 따라 올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빼어난 경관으로 인하여 역사적 명사들이 수많은 시문을 남겼다. 조선 선조 때 영남루에 걸린 시판은 이미 300여 개에 이르렀다고 하나 지금은 12개의 시판이 남아 있다. 주요 편액은 영남루 북쪽 처마에 걸린 세 개의 대형 편액으로,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이 쓴 ‘영남루(嶺南樓)’가 중앙에,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쓴 ‘강좌웅부(江左雄府)’와 ‘교남명루(嶠南名樓)’가 각각 좌우에 걸려있다.
밀양 영남루는 풍부하게 남아있는 각종 고증기록을 통해 16세기부터 현 위치를 유지하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고, 빼어난 건축형식과 배치는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져 예술적으로 가치가 높으며, 수많은 명사들이 탐방하고 교류하며 남긴 시문 등은 높은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국보(國寶)로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조선 초 밀양부사 안질(安質, ∼1447)이 영남루를 중창하면서 영남루 서쪽 주변에 소루(小樓)를 건축하였고, 1442년 권기(權技, ∼)가 소루(召樓)로 명명하였으며, 그 후 부사 이충걸(李忠傑, 1465∼1527)이 임경당(臨鏡堂, 현 침류각)으로 개명하였다. 1442년(세종 24) 연산군 때에 밀양부사 김영추(金永錘)가 임경당 반대쪽인 영남루 동북쪽에 망호당(望湖堂)을 지으면서 빈객숙소로 제공되었다. 1542년(중종 37)에는 부사 박세후(朴世煦, 1494∼1550)가 망호당을 영남루 대루의 동쪽 바로 옆으로 옮기면서 능파각(凌波閣)이라 하였고, 임경당도 침류각(枕流閣)으로 개명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16C 중반 영남루는 중앙의 대루를 중심으로 좌우 양쪽의 침류각과 능파각이 놓이는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 16세기 중엽의 회화로 알려진 이경홍(李慶弘, 1540∼1595)의『밀양십이경도(密陽十二景圖)』를 보면, 대루 좌우에 전각을 각각 배치하고 있는 묘사가 지금의 영남루와 유사한 배치 형태를 보이고 있음.
하지만, 영남루는 임진왜란 때 객사와 함께 모든 부속 시설이 소실되고, 이후 중창 및 중수를 거듭하였다. 영남루는 1844년 이인재(李寅在)가 밀양부사로 재임할 당시 대루의 규모를 확장하면서 동서에 각각 능파각과 침류각을 배치하고, 대루와 침류각을 연결하는 여수각(如水閣, 층층각)을 설치하여 현재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이때 많은 부속건물을 지었고, 영남루를 포함하여 영역 전체를 ‘밀주관(密州館)’이라 불렀으며, 관원들과 지방 빈객들을 접대하고 유숙시키는 객사로 사용하였다.
영남루의 대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 장방형 평면의 대형 목조누각으로 7량가 구조이다. 팔작지붕에 부연을 사용한 겹처마에 처마 끝에는 막새를 달았다. 내부는 통칸으로 구성 후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4면을 돌아가면서 난간을 설치하였다. 능파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5량가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대루의 우물마루와 바닥이 통한다. 침류각은 대루 서쪽에 위치하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5량가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동쪽 배면 기단 위로는 계단 모양의 여수각이 연결되어 있다. 이처럼 경사지를 이용하여 4동의 건물을 적절히 배치한 영남루는 건물 자체의 조형미가 뛰어날 뿐 아니라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모습은 다른 누정이 따라 올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빼어난 경관으로 인하여 역사적 명사들이 수많은 시문을 남겼다. 조선 선조 때 영남루에 걸린 시판은 이미 300여 개에 이르렀다고 하나 지금은 12개의 시판이 남아 있다. 주요 편액은 영남루 북쪽 처마에 걸린 세 개의 대형 편액으로,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이 쓴 ‘영남루(嶺南樓)’가 중앙에,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쓴 ‘강좌웅부(江左雄府)’와 ‘교남명루(嶠南名樓)’가 각각 좌우에 걸려있다.
밀양 영남루는 풍부하게 남아있는 각종 고증기록을 통해 16세기부터 현 위치를 유지하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고, 빼어난 건축형식과 배치는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져 예술적으로 가치가 높으며, 수많은 명사들이 탐방하고 교류하며 남긴 시문 등은 높은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국보(國寶)로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 국가유산청 홈페이지: 밀양 영남루(密陽 嶺南樓) (과거 보물 제147호였을 때의 설명)
누(樓)란 건물의 사방을 트고 마루를 높여 지은 집으로 일종에 휴식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밀양도호부 객사에 속했던 곳으로 손님을 맞거나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고려 공민왕 14년(1365)에 밀양군수 김주(金湊)가 통일신라 때 있었던 영남사라는 절터에 지은 누로, 절 이름을 빌어 영남루라 불렀다. 그 뒤 여러 차례 고치고 전쟁으로 불탄 것을 다시 세웠는데, 지금 건물은 조선 헌종 10년(1844) 밀양부사 이인재가 새로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기둥은 높이가 높고 기둥과 기둥 사이를 넓게 잡아 매우 웅장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건물 서쪽면에서 침류각으로 내려가는 지붕은 높이차를 조정하여 층을 이루고 있는데 그 구성이 특이하다. 또한 건물 안쪽 윗부분에서 용 조각으로 장식한 건축 부재를 볼 수 있고 천장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이다.
밀양강 절벽의 아름다운 경관과 조선시대 후반기 화려하고 뛰어난 건축미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누각이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밀양도호부 객사에 속했던 곳으로 손님을 맞거나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고려 공민왕 14년(1365)에 밀양군수 김주(金湊)가 통일신라 때 있었던 영남사라는 절터에 지은 누로, 절 이름을 빌어 영남루라 불렀다. 그 뒤 여러 차례 고치고 전쟁으로 불탄 것을 다시 세웠는데, 지금 건물은 조선 헌종 10년(1844) 밀양부사 이인재가 새로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기둥은 높이가 높고 기둥과 기둥 사이를 넓게 잡아 매우 웅장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건물 서쪽면에서 침류각으로 내려가는 지붕은 높이차를 조정하여 층을 이루고 있는데 그 구성이 특이하다. 또한 건물 안쪽 윗부분에서 용 조각으로 장식한 건축 부재를 볼 수 있고 천장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이다.
밀양강 절벽의 아름다운 경관과 조선시대 후반기 화려하고 뛰어난 건축미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누각이다.
[1] 여기에 남원 광한루를 더해 한국의 4대 누각이라고도 한다.[2] 햇빛 등을 가리는 물건 따위로, 문맥상 밤하늘의 청명함을 강조하는 표현으로서 쓰였다.[3]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필체인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의 제자로, 각 체의 글씨에 모두 능했다. 그림에 정선과 김홍도가 있다면, 글씨에는 조윤형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4] 영남루를 중건한 당시 밀양부사 이인재의 차남, 장남이다. 영남루를 중건하는 과정에서 서예 실력이 뛰어났던 자식들에게 편액 글씨를 쓰게 한 것으로 보인다.[5] 문경새재 남쪽의 이름난 누각[6] 강(낙동강) 좌측의 아름답고 큰 고을[7]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던 아버지 하제봉으로부터 추사체를 전수받은 진주의 대표 서예가였다.[8] 제주관덕정은 호남제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