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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관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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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제주 관덕정.jpg
제주 관덕정

1. 개요

KBS 제주 고고 제주찾기! 관덕정 편 (2021년 1월 12일 방송)

제주도에 남아 있는 관덕정은 제주목 관아의 부속건물로 조선 시대에 처음 세워진 이래 현재까지 헐리지 않고 그 자리를 온전히 보존한, 현재 한반도에 남아 있는 단 둘뿐인 관덕정 건물 중 하나다.[1] 대한민국의 보물 제322호로 지정됐다.

2. 상세

파일:승보시사.png
1702년 《탐라순력도》에 그려진 관덕정의 모습[2]
파일:관덕정 앞 시장 1914년 국립중앙박물관 수정.jpg
일제강점기 관덕정 앞 시장[3]
파일:관덕정 호남제일정 탐라형승 현판 2006년 국립민속박물관.jpg
(위) 호남제일정 (밑) 탐라형승 현판

1448년(세종 30년)에 제주목사 신숙청이 처음 지었으며, 처음에는 3칸 건물이었지만 이후 여러 번 중수와 개축 과정을 거쳐 지금과 같은 정면 5칸, 옆면 4칸의 단층 팔작지붕 양식으로 처마가 길고 건물 높이가 낮은 제주도 건축의 특징을 갖추었다. 당시 지어질 때 현판의 글씨는 제주판관 고득종[4]안평대군에게 부탁해 안평대군이 써 주었으나, 훗날 불타 없어졌고 현재 남아있는 현판의 글씨는 선조 때 정승을 지낸 이산해의 글씨다. 한편,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이라는 편액도 걸려 있는데, 이는 조선에서 제주도가 호남(전라도)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5]

한때는 미국 문화원으로 쓰인 적도 있는데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탁 트인 것이 아니라 문이 달려 있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 처마의 일부가 잘렸으나 이후 다시 복원되었다. 관련 기사

이밖에 알려진 주요 사건으로 관덕정 살인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다. 관련 항목 참조.

근처에는 영주관 터가 존재한다. 영주관은 관덕정에 속했던 곳이었지만, 일제강점기 때 철거됐다.

3. 전해오는 이야기

관덕정에는 한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제주목사 신숙청이 관덕정을 지을때 전국의 이름난 목수들을 한 데 모아 지었으나, 알수 없는 이유로 인해 다 지으면 무너지고 다시 지으면 또 무너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목수들이 이번에는 무너지지 않고 튼튼하게 지으리라 하고 공사에 열중하는데 한 노인이 지나가다 공사 현장을 보고 "또 무너지겠군"하고 중얼거렸고 몇몇 목수들이 이를 들었다.

그렇게 신중하게 지었는데도 무너지자 목수들이 이를 기억하고 수소문하여 노인을 찾아 조언을 들었다. 노인이 "상량식을 할때 닭이나 돼지를 제물로 바치면 안되고 사람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며 조언하고 목수들이 당혹스러워 하자 노인이 한 가지 방법을 알려 주는데 "아무 날, 아무 때 상량식을 준비할때 솥장수가 그 앞을 지나갈텐데 큰소리로 '상량'이라 외치면 솥장수가 놀라 죽을 테니 그를 제물로 바쳐라."라고 알려 주었다.

목수들은 그 조언이 황당무계하다고 느꼈으나 달리 방도가 없어 상량식 날 그대로 따라했더니 지나가던 솥장수가 무슨 소리인가 하고 주위를 살피려 머리를 들어올리나 솥들이 무거워 넘어져서 깔려죽고 죽은 솥장수를 상량식 제물로 바치니 공사가 무너지지 않고 원래 목적대로 무사히 끝낼수 있었다 하더라.

관덕정이 위치한 곳은 제주에서 전통적으로 중심지였던 칠성통이 가까이 있고, 제주도 행정의 중심인 제주목 관아[6]와 성주청[7]이 있었고, 관아가 헐린 뒤에는 제주도청이나 경찰서, 건너편에는 식산은행이 위치해 있었고, 해방 뒤에는 관덕정 바로 옆에 미군정청이 설치되었다. 덕분에 관덕정 앞에서는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사건들이 줄줄이 일어났는데, 당장 신축민란 때는 제주성에 입성한 이재수가 관덕정 앞에서 악질 봉세관에 빌붙어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고 천주교를 앞세워 제주의 토속신앙을 파괴한 사이비 신자들을 잡아다 처형했고, 4.3 사건을 촉발시킨 3.1절 발포사건이 이 일대에서 벌어졌으며 한라산 남로당 무장대의 사령관 이덕구의 시체가 관덕정 앞에 본보기로 내걸리기도 했다.[8] 그야말로 제주의 산역사인 셈이다. 관덕정 앞에서 '산폭도' 혹은 '군경 가족'으로 몰려 공개처형당한 사람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고. 관덕정 한 곳에서 제주 역사의 물결이 몇 번이나 뒤집히고 요동쳤다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4. 기타

제주목 관아의 복원과 함께 그 자리에 있었던 제주의 주요 관공서[9]가 이전되었고, 원래 관덕정 앞에는 제주도 출신 재일교포들이 기증한 분수대도 있었는데[10] 관아 복원을 이유로 철거되었다. 유홍준은 그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제주목 관아가 복원된 것은 좋지만 대신 관덕정 앞이 예전만큼의 제주의 중심지 역할을 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에 관덕정을 중심으로 이어져 왔던 제주의 고유한 광장 문화가 퇴색되었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5. 외부 링크

6. 보물 제322호

제주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제주 관덕정은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의 하나다.

‘관덕(觀德)’이란 문무의 올바른 정신을 본받기 위해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에서 따온 말로, 평소에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누정 건물은 『탐라지』에 의하면 조선 세종 30년(1448) 안무사 신숙청이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세웠다고 하며, 성종 11년(1480) 목사 양찬이 고친 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69년 보수한 것으로 원래의 건축 수법은 17세기 전후의 것으로 추정한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은 사방이 탁 트이게 뚫려 있고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새부리 모양으로 뻗쳐 나온 재료를 기둥 위에 두 개씩 짜 놓았다.

관덕정의 편액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글씨였으나 화재로 손실되어 현재의 글씨는 선조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작품인 것으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남사록』에 의해 밝혀졌으며, 지붕 처마가 긴 것이 특징이었는데 1924년 일본인들이 보수하면서 처마 부분을 많이 잘라냈다.

제주 관덕정은 제주도의 대표적 누정 건축으로 건축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이며 건물 안쪽 대들보와 그 아래에 그려진 작자를 알 수 없는 벽화도 상당히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1] 다른 한 곳은 창경궁 관덕정이다.[2] 그림은 탐라순력도 의 2번째 삽화인 '승보시사'다. 승보시는 소과 초시에 해당하는 시험으로 서울의 사학 외에 개성, 수원, 제주 등에서도 시행했다. 그림에 배경인 1702년 윤 6월 17일에 시행된 승보시는 상시관에 제주목사 이형상, 부시관에 제주판관 이태현, 참시관에 대정현감 최동제가 임명되어 3일간 치러졌는데 총 12명의 응시생중에 시와 부 두 과목에서 각각 1명씩 합격자를 뽑았다.[3] 현재 도로보단 아~주 약간 북쪽에 있다.[4] 본관은 제주 고씨. 세종 때 한성판윤을 역임한 인물. 조선시대 제주인으로써는 가장 높은 관직에 올라 본 사람이다. 제주목 관아의 부속건물인 홍화각의 현판 글씨를 쓴 인물이다. 홍화각 현판의 진품은 삼성혈 전시관에 보관되어 있고, 현재 복원된 홍화각에 걸려있는 현판은 그것의 복제품이다.[5] 이와 비슷한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라는 편액은 전북 남원의 광한루에 있다. 관덕정과 광한루는 정자와 누각이라는 차이가 있다.[6] 2002년 복원[7] 지금의 제주 우체국 자리[8] 제주 출신 소설가 현기영의 자전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라는 제목은 그때 관덕정 앞에 내걸렸던 이덕구의 시체를 은유한 표현이다.[9] 제주시청제주지방법원제주지방검찰청[10] 오사카 거주 재일교포 가운데 60%가 제주 출신이고 1961년 재일 제주도민협회가 결성될 정도로 재일교포 가운데는 제주 출신들이 많은데, 이들 가운데는 4.3 사건의 무차별 학살을 피하기 위해 달아났거나 혹은 살아남기 위해 학살에 가담하고서 제주에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어 도망치듯 떠난 사람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