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李允孫 諭書. 조선 세조 3년, 1457년에 세조가 평안도 도절제사 이윤손에게 내린 유서. 현재 서울 중랑구에 거처하는 후손 이영옥이 소장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보물 제1289호이다.2. 내용
천순 원년 삼월 십이일(天順元年三月十二日)에 세조가 이윤손에게 내린 친필 유서로, 천순은 명나라 정통제의 연호이며, 유서는 군사권을 가진 관찰사, 절도사, 방어사, 유수 등의 지방관에게 왕이 밀부(密符)와 함께 내리는 명령서이다.산유자 나무를 지름 약 10cm정도의 원형으로 깎아 앞면에는 제기부(第幾符), 발병(發兵) 등을 새기고 뒷면에는 관찰사와 절도사의 명칭을 표시하였다. 이것을 두 개로 쪼개어 왼쪽은 궁궐 안에 보관하고 오른쪽은 지방관에게 주어 지니게 하였다. 만약 국가의 유사시 비상의 명령을 내려 군대를 움직이려면 왕은 반쪽의 밀부와 교서를 해당 관원에게 내리고, 그 관원은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반쪽의 밀부와 왕이 보낸 밀부를 맞추어보아 의심할 바가 없을 때 왕명에 따라 군사를 움직였다. 본문은 총 9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발급년월일 위에는 유서지보(諭書之寶)란 왕의 어보가 찍혀 있다.
밀부와 유서는 제1부에서 제45부까지 있었으며 조선후기로 갈수록 점차 내용이 더해져서 나중엔 총 54부까지 되었다. 이윤손 유서는 제14부이며 기록에 따르면 유서의 명을 충실히 받들어 변방을 무사하게 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였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권벌 유서, 김성일 유서, 이순신 유서, 류성룡 유서, 정기룡 유서, 권응수 유서, 이원익 유서, 선조국문유서 등의 여러 유서들이 남아 전하고 있는데 이윤손 유서는 현존하는 유서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또한 조선 초기 국왕이 내린 유서의 형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역사적, 학술적으로 가치가 높은 사료이다.
3. 보물 제1289호
유서란 왕이 군사권을 가진 관찰사, 도절제사,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등에게 밀부(密符:유수, 감사, 병사, 수사 등에게 병란이 일어나면 즉시 응할 수 있도록 내리는 병부)를 내릴 때 함께 발급하는 명령서이다.
이 유서는 조선 세조 3년(1457) 3월 12일 내린 것으로, 변란에 독단으로 대처할 일을 위해 만든 것으로, 역모에 의해 군사를 함부로 움직이는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세조 3년(1457) 평안도 도절제사 이윤손에게 내린 것으로, 가평이씨 종손 댁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다. 이윤손은 단종, 세조 때의 무신으로, 세종 때에 무과에 합격한 후, 여러 도의 절제사와 호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냈다. 그는 이 유서를 받아 충실히 왕명을 받들어 국경지역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였다.
밀부는 산유자나무를 지름 약 10㎝정도의 원형으로 깎아 앞면에는 ‘제기부’라 새기고 뒷면에는 ‘어압’을 표시하였다. 나중에 둘로 나누어 왼쪽편은 청에 보관하고, 오른쪽편은 지급받는 관리에게 주어 지니게 하였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여러 유서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조선 전기 왕이 내린 유서의 형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 유서는 조선 세조 3년(1457) 3월 12일 내린 것으로, 변란에 독단으로 대처할 일을 위해 만든 것으로, 역모에 의해 군사를 함부로 움직이는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세조 3년(1457) 평안도 도절제사 이윤손에게 내린 것으로, 가평이씨 종손 댁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다. 이윤손은 단종, 세조 때의 무신으로, 세종 때에 무과에 합격한 후, 여러 도의 절제사와 호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냈다. 그는 이 유서를 받아 충실히 왕명을 받들어 국경지역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였다.
밀부는 산유자나무를 지름 약 10㎝정도의 원형으로 깎아 앞면에는 ‘제기부’라 새기고 뒷면에는 ‘어압’을 표시하였다. 나중에 둘로 나누어 왼쪽편은 청에 보관하고, 오른쪽편은 지급받는 관리에게 주어 지니게 하였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여러 유서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조선 전기 왕이 내린 유서의 형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