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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위호군(忠武衛護軍) 화산군(花山君) 권응수 權應銖 | |
<colbgcolor=#a52a2a><colcolor=#fff> 출생 | 1546년 11월 21일 |
경상도 신녕현 대량면 상추동 (現 경상북도 영천시 화산면 가상리 웃가래실마을)[1]# | |
사망 | 1608년 7월 13일 (향년 61세) |
한성부 | |
본관 | 안동 권씨[2] |
가족 | 부친 - 권덕신(權德臣) |
자 | 중평(仲平) |
호 | 백운재(白雲齋) |
시호 | 충의(忠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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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5선 국회의원 및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권중돈은 그의 10대손이다.
2. 생애
1546년(명종 1) 11월 21일 경상도 신녕현 대량면 상추동(현 경상북도 영천시 화산면 가상리 웃가래실마을)에서 아버지 권덕신(權德臣, 1518 ~ 1578. 11. 29)과 어머니 성주 이씨(1518 ~ 1578. 12. 24) 이운겸(李云謙)의 딸 사이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584년(선조 17) 별시 무과에 병과 105위로 급제#, 수의부위권지(修義副尉權知) 자리를 거쳐 훈련원 부봉사(訓鍊院副奉事)로서 의주의 용만관[3]를 지켰다. 이후 경상좌수영을 지휘하던 박홍의 밑에서 일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홍의 삽질로 경상 좌수영은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별 수 없이, 권응수는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그곳에서 의병을 규합, 5월부터 활동을 시작해 6일에는 한천에서 의병 최초로 승리를 거두었다. 7월에는 화공으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이끄는 일본군 제5군이[4] 점령하였던 영천성을 탈환하였다. 이 공으로 권응수는 경상 좌도 병마절도사를 보좌하는 우후(虞侯)에 임명되었다.
8월에는 경주 전투 (1차)를 벌여 경주 탈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계속하여 전공을 쌓아 경상도 병마 좌별장 등의 자리에 올랐다. 1차 및 2차 울산성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전쟁 후에는 선무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608년(선조 41) 7월 13일 한성부에서 별세하였으며,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3. 특기
국조인물고에 따르면 활을 잘 쏘았고, 특히 편전(애기살)에 능했다고 한다.4. 기타 매체
임진왜란의 의병장을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위인이나 아쉽게도 대중적인 인지도는 높지 않다.김성한 작가의 소설 7년전쟁 제3권에 등장한다.
5. 권응수 초상(權應銖 肖像)
대한민국의 보물 | ||||
667호 | ← | 668-1호 | → | 668-2호 |
예천 한천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 권응수 장군 유물-권응수 초상 | 권응수 장군 유물-선무공신 교서 |
전형적인 조선 중기 초상화로 측면을 보고 있다. 가슴에 배착된 흉배는 호랑이가 그려져 그가 무관이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임진왜란이 종전된지 6년 후인 1604년(선조 37년)에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책록되었는데, 선무공신에 녹훈될 당시 권응수에게 내려진 공신 화상(畵像)으로 추정된다. 권응수 장군의 여타 유물들과 함께 보물 668-1호로 지정되어 있다.
6. 관련 문서
- 권응수 장군 유물 장검 - 보물 제 668-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