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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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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泓
1534년(중종 29) ~ 1593년(선조 26) (향년 59세)

1. 개요2. 생애3. 평가4. 여담5. 대중매체

1. 개요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청원(淸源).

2. 생애

1534년 충청도 대흥현(현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별제(別提:정·종6품)를 지낸 아버지 박영무(朴英珷)와 어머니 직장(直長:종7품) 정인걸(鄭仁傑)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박한(朴捍)이다.

23세 되던 1556년(명종 11)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임명된 이후, 강계부 판관(江界府判官:종5품)·정평도호부사(定平都護府使:종3품)·종성도호부사(鍾城都護府使:종3품) 등 외직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당시,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정3품)로 재직하다 일본군의 갑작스런 대규모 기습을 받아 경상좌수영 진포 태반이 쓸려나가며[1] 유능한 휘하 장수들을 잃고 상륙을 저지하지 못했다[2].

이후 자신의 관할지역 중 큰 진포인 동래부에서 이어진 동래성 전투에 참여했다. 박홍은 이때 이각과 함께 하고 있었으며 밀양부사 박진이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소산역에 합류할 때도 함께 맞이했다. 일본군 예비대에게 저지당한 병력을 수습한 이각은 박홍, 박진과 함께 소산역에서 고니시의 일본군에 맞섰으나 병력 수와 실전경험의 측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는 적에게 패퇴하고 만다. 압도적인 병력 차이로 동래성 구원에 실패하고 조선군은 뿔뿔히 흩어지는데 박진은 황산잔도, 이각은 울산, 박홍은 경상좌수영에 남은 전선들을 자침시킨 후[3] 경주 방면으로 물러섰다.

이후 박홍은 후퇴하다가 탄금대 패전 소식이 들리자 방향을 바꿔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북상했고, 이 와중에 도원수 김명원을 만나 좌위대장에 임명되어 임진강 방어전에 참전했다. 조정에 처음으로 왜침 사실에 대한 장계를 올리고 경상우수영, 전라수영에 전령을 보내어 왜적의 침공사실을 통보하고 구원요청을 한 것도 박홍이니 어려운 와중에 자신이 맡은 할 일은 다했다. 그리고 경상좌수영을 불태우고 물자와 병장기를 태운 일도 적에게 넘기지 않기 위한 당연한 업무절차이다.

이후 좌위대장에 임명되어, 임진강 방어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패했다. 또한 전투 초기 임지를 버린 것으로 인해 대간들에게 탄핵을 받아 백의종군하기를 3차례나 반복했다. 그 뒤로 여러 전투에 참가하였으나, 전쟁 도중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귀향하다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4]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병조참판이 추증되었다.

3. 평가

야사에서는 능력 없고 비겁한 장수라는 오명도 많고, 이것을 정설로 받아들여 1980년대 각종 책자에선 겁쟁이 장군으로 너무 자주 나오곤 했다. 1981년 삼성당 출판사에서 낸 이순신 위인전 만화책에선 겁에 질려 배를 불태우고 달아나는 것만 나오며, 1982년에 나왔던 만화책 《성웅 이순신》에선 더 겁쟁이로 나와 배를 불태우고 서둘러 달아나는데 일본군들이 보고 "저런 비겁한 놈 다 봤나?" 하면서 비웃기까지 한다. 1986년 한국일보 연재 소설 임진왜란에서는 장수 이일과 더불어 찌질이로 나온 바 있듯이 오랫동안 겁쟁이 장군으로 자주 나왔다.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나온 '해전의 모든 것'(휴먼 앤 북스) 128쪽을 보면 박홍은 일본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겁먹고 배와 기지를 불태우고 달아난 졸장으로 소개하면서 원균과 같이 조선 수군을 망친 졸장으로 나와있다. 지은이들이 미국과 영국 해군 교본 집필에도 참여한 해군학 전문가들로 이순신을 엄청나게 호평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론 전혀 아니며 이는 박홍에겐 꽤나 억울한 평가이다. 미처 예상 못한 일본의 대규모 침략[5]으로 경상우수영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적은 경상좌수영의 태반이 쓸려나가는 상황[6]에서 어찌어찌 병력을 소집해서 어떻게든 싸우려고 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아주 무능하거나 겁쟁이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기록을 뒤져보면 박홍, 그리고 경상좌병사 이각이 그냥 도망친게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흔히 이각이 그냥 도망친 걸로 묘사하는데, 본디 제승방략 규정상 병사가 이끄는 병력은 동래성 외곽에서 호응하게 되어 있었고 실제로 이각은 동래성 후방에서 별동대를 이끌고 포위망을 구성한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당시 일본군은 공성전시 적 지원을 차단하는 예비부대를 반드시 편성하도록 되어 있었고 수적으로 우세한 예비대에게 차단당했을 뿐 단순히 도망친 것은 아니었다. 여러 사료를 살펴봐야 하나 찾기 쉬운 조선왕조실록, 그것도 두찬이 극심한 선조실록 기사를 단편적으로 인용해서 생긴 일이다.

임란 초기 최전방을 맡은 것과 같은 최전방 방어선에 있었던 부산진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 다대포첨사 윤흥신 등이 최후의 1인까지 분전하다 전사한 것 때문에 왜 그렇게 못했냐고 비판받아 왔는데 경주성을 탈환한 박진도 소산역과 황산잔도에서 패퇴했고, 진주 대첩으로 유명한 김시민김성일이 부르기 전까지는 산에 숨어 있었고 함안군수 유숭인은 신분 감추고 숨어다녔다. 한마디로 조선군은 끝까지 맞서 싸운 장수들이 모두 전사한 것이다. 그래서 박홍에게 이들보다 더한 죄를 뒤집어 씌우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평양에 도착한 후 임진강에서의 패배 책임을 물어 탄핵되기는 했으나 죄를 공으로 씻으라고 넘어갔다. 이후 분조를 이끄는 광해군을 호종해 병력을 모으며 성천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조명연합군에 의해 평양이 수복되자 도원수 김명원 아래로 옮겨 파주까지 종군했다가 지병이 재발해 귀향하던 도중 사망했다.

정리하자면 성실히 전쟁에 대비한 지휘관이었으나 개전 초기에 정발, 윤흥신 등 유능한 휘하 장수들을 잃었다. 이후 작전계획대로 충실히 싸우려 애썼으나, 전선들을 모두 자침 시키고 육상에서의 지연전에 임한 판단은 이순신이 난중일기에 비판하기도 했다[7]. 이후로도 전공을 세우진 못한 고위급 지휘관이다.

김명원과 마찬가지로 야전지휘관보다는 군사행정가 타입이었던 것 같다. 정조때 편찬된 국조인물고 박홍편을 보면 박홍이 경상좌수사로 부임한 뒤 선정을 베풀어 백성과 군사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순무어사가 좌수영을 감찰했을 때도 좌수영이 잘 정비되고 군기가 잘 갖추어져 있어서 높은 등급을 받아 임기가 연장되었다고 한다. 다만 군사지휘관으로서는 재능이 없었는지[8] 그 이후에도 임진강 전투에도 참여했으나 전공을 올리지 못했고 광해군의 분조에도 참여했지만 이렇다할 기록을 남기지는 못했다.

4. 여담

박홍처럼 억울한 평가를 받는 장수로는 이일이 있다. 대표적으로 조선 백성을 죽여 일본군으로 위장시켰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일은 상주에서 병사들을 한창 수습하던 차에 일본군이 쳐들어온다고 사방에 떠들어대며 병사들의 사기를 바닥에 떨어뜨린 백성을 참수한 적은 있어도 조선 백성을 죽여 일본군으로 위장한 적은 없다. 그리고 이 참수에 관해서는 당시의 법률로 이일이 정당하다 할 수 있는데, 최초의 지상군 소집이 있었던 대구는 이일이 도착하기도 전에 함락되면서[9] 병력이 흩어졌고 상주에서 현장 모집을 통해 간신히 방어선을 마련하고 있었는데 정식 보고 절차를 거치지 않고 훈련도가 부족한 병사들 사이에 그런 말을 퍼뜨렸으니 당시 군법상 죽어도 할 말은 없다. 특히 이순신도 이와 비슷하게, 명량 해전 직전 적이 쳐들어온다며 소문을 퍼뜨리던 백성을 잡아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가 있다.

비록 이일이 상주 전투에서 패하긴 했지만, 이건 누가 봐도 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일본군의 진격을 눈 뜨고 볼 수는 없으니 싸우기는 해야 했고 조선은 제승방략에 따라 외적에 맞섰기에 앞서 말한대로 군사가 집결하기로 한 대구에 군사가 모여 있는데 졌다면 그건 이일의 책임이 크다. 하지만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이 이일이 도착하기도 전에 군사가 흩어졌다는 거다. 그러니까 이일은 12척의 전함만으로 싸워야 했던 이순신보다도 더 조건이 나빴다. 이순신은 12척의 배와 정예 수군이라도 있었지 이일은 그것도 없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배운 것도 없는 주변 민간인들을 병사로 징발해야 했다. 당연히 질은 보장 못하고, 병력의 수마저 턱없이 모자랐다. 이런 상태에서 졌으니 질만 해서 진 거다.

5. 대중매체



[1] 경상좌수군은 개전 직전 병력을 부산진 근처로 재배치하며 대비했으나, 일본군의 첫날 부산진에 상륙한 선봉 규모가 400척에 다다르면서 본영 중심으로 집결하지 못했다. 전선을 자침 시키고 농성으로 시간을 벌려던 부산진다대포가 각각 하루에서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전멸했다.[2] 부산진 첨사 정발, 다대포 첨사 윤흥신[3] 박홍이 도망치고 난 뒤 병사와 마을 주민 25명은 끝까지 남아 싸웠다고 하는데 이들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 옛 좌수영 터에 있는 25 의용단이다. 이들도 이름은 있었으나 제대로 남아있는 이름이 아니어서 이름에서는 어지간해서는 안 쓰는 망(亡) 등의 글자가 사용되어 표기되기도 하였다. 이들에 대한 제사는 일제강점기 때에도 지내졌으며, 1990년대 무렵까지만 해도 안내문에 '경상좌수사 박홍이 도망치자...'라는 대목이 있었는데, 어느 사이에 그 부분이 삭제되었다. 하지만 9월 25일에 방영된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에서 해당 사당이 나왔을 때 박홍이라는 인명은 나오지 않았으나 '경상좌수사가 도망갔다'는 언급은 꽤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여전히 전투를 포기하고 달아난 패장이라는 인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4] 일부 사전의 예 : 네이버 백과 사전에서는 전사하였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운영하는 사이트인 한국 역대 인물 종합 정보 시스템에서는 병사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5] 임진년 이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은 예상했지만 적의 규모나 침공 루트에선 좀 더 규모가 큰 왜구 정도로 생각했지 수십만에 달하는 대규모 인원을 동원한 총력전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조선 역사를 조금만 공부해 보면, 당시 조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 건 이상할 게 없다.[6] 경상좌수영은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된 수군의 육군 전환을 논의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수영으로, 최소한 경상좌수영에 대해서는 이 조치가 행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경상좌수영에 소속된 부산포, 다대포, 서평포 등이 모두 해전을 시도하지 않고 농성을 택한 것으로 보아 이게 기본 방침인 듯하며 박홍이 동래성에서 집결한 것 역시 병사 이각과 울산성의 병력이 집결한 걸 보아 제승방략에 따른 기본 방침인 듯하다는 개인의 서술도 있지만, 정발을 다룬 항목에 있듯이 부산진도 세 척의 전함이 있었고 이순신 휘하 장수들도 거느린 전선은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다만 경상좌수영과 다른 수영들의 차이는 단 하나다. 예상치 못한 적의 대규모 강습으로 인해, 본영을 중심으로 집결할 수 없었다는 것. 일본 선봉인 400여척의 대함대가 행한 강습 앞에, 잘해야 부산진과 다대포의 두 첨사들이 거느린 전선은 열 척도 안되었다. 게다가 첫 교전을 치른 부산진의 경우, 사냥훈련을 나갔다가 돌아온 첨사 정발과 일본군의 상륙이 거의 같은 시간대였다. 결국 부산진, 그리고 함락된 부산진을 통해 몰려오는 적 육군 앞에 다대포와 동래부까지도 계획된 농성 외에 선택지가 없었다. 제승방략의 구조상 육군으로 전환되었다는 추측보다는, 경상좌수군이 집결하여 바다에서 막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대규모 기습이었고, 일본군의 상륙을 저지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작전 계획에 따라 박홍 휘하 좌수영의 직할대는 지상전에 참전했다고도 추측할 수 있다.[7] 실제로 싸우지도 않고 전선들을 자침시켜 수군 전력의 태반을 날린 경상우수사 원균과는 달리, 관할 구역의 지상전을 포기하지 않은 점에서 전략적 판단으로 평가 받을 수 있다. 당시 조정에서도 원균의 경우는 비판 받기도 했지만, 박홍이 전선들을 포기한 것을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상좌수사 본인은 지상전을 나서더라도 중군장 등에게 수습한 전선을 맡겨 다른 수영에 퇴각시켰다면 분명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분명 있다.[8] 사실 좌수영 소속 휘하 장수들인 정발, 윤흥신, 송상현을 보면 군사들의 역량을 높였던 것은 일본군의 평가로도 검증된다. 다만 위의 유능한 휘하 장수들이 개전 이틀 만에 모두 전사한 경상좌수영이었던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9] 이것은 일본군의 진격이 기형적으로 빨랐던 탓이지 이일이 늑장을 부려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