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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6 18:29:19

정발(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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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발 장군의 영정
뒤의 그림은 조선 영조 때의 화가 변박(卞璞)이 그린 『부산진순절도』다.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

1. 개요

鄭撥

조선 중기의 무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고(子高), 호는 백운(白雲)이며 임진왜란 발발 후 첫 번째 전투인 부산진 전투에서 전사한 조선군 장군이다.

2. 생애

1553년(명종 8) 경기도 마전군 군내면(현 연천군 미산면 광동리 너븐골)에서 간성군수를 지낸 아버지 정명선(鄭明善)과 관찰사 남궁숙(南宮淑)의 딸인 어머니 함열 남궁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1577년(선조 10) 별시 무과에 병과 7위로 급제한 후# 해남현감, 거제현령 등의 지방 외관직과 비변사낭관 등 중앙직을 두루 거쳤다. 관련 기록이 많지는 않지만 1589년 1월 비변사에서 무장을 불차 채용할 때 들어갔고 이순신·이복남·박진 등과 함께 이름이 거론되고 동년 7월 30일 국경을 넘어 염탐하던 여진족을 쏘아죽였다는 실록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북방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유능한 장수로 인정받았다.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몇 달 전에 그는 부산진[1] 첨절제사로 부임하여 부산진성 수비를 맡았다. 1592년 3월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길을 빌려달라는 내용이 담긴 투서를 건네고 왜관에 있는 일본인들이 급히 피신하는 것을 보고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는 부산 앞 바다에 있는 절영도[2]에 주둔하며 군사 훈련과 사냥을 실시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날에도 절영도로 사냥[3]을 나갔다가 일본 선단이 접근한다는 보고를 들었는데 처음에는 세견선으로 오해하여 경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군이 육지에 근접해 조총을 쏘아대자 외침임을 알아차리고 배를 탈취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전선 3척을 자침시키고 왜관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을 구금하는 한편 백성들을 성안으로 소개시켜 농성에 돌입했다. 1592년 4월 14일 새벽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제1군이 부산진성으로 밀려들면서 정발이 지휘하는 부산진성 수비군과 격돌함에 따라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정발과 그가 지휘하는 수비군과 인근에서 몰려든 피난민들은 그 어떤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분전했으나 6배나 차이나는 압도적인 수적 열세 때문에[4] 4시간여만에 전투는 패배로 끝나고 정발은 전사했다. 검은 옷을 입었다고 흑의 장군이라고 부르며 이는 18세기 화공 변박의 부산진 순절도에도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전사 당시 관직은 절충장군(정3품 상계 당상관) 행[5] 경상좌도 부산진 수군첨절제사였다. 전면 패주하는 혼란한 상황에서 초기 전황에 대한 파악이 늦어 한동안 전사 여부가 확정되지 않았으나 아내 임씨가 진정을 넣고 임진년 말에 전사가 확인되어 공로를 인정받았다.[6]

적진이었던 일본측에서의 평가는 매우 후했는데 전후에 조선 통신사 황신에게 부산성 전투에 참여했던 일본 장수 마쓰라 시게노부는 "우리는 부산진 전투에서 좌절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며 프로이스의 기록에도 "거의 전원이 전사할 때까지 싸웠다",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히 높은 훌륭한 병사들"이라고 서술했다. 정발과 부산진의 병사들, 그리고 백성들이 치열하게 맞서 싸웠고 별다른 저항이 없을 것으로 예측했던 일본군의 입장에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백성들이 낫 들고 달려들고 지붕 기왓장 들어내서 성벽에서 던져대니 평소 전투하는 거 구경하러 오던 일본 농민들을 생각하다가 큰코다쳤다. 당시 일본의 전투는 다이묘나 유력 가문들 간의 세력 다툼이었던 데다 한쪽이 패하면 그것으로 전쟁은 종결되고 패전 측의 영지나 주민들은 승전 측에 예속되는 것으로 보상이 이뤄졌으며 처벌도 전쟁을 일으킨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들 및 측근들, 가신, 또는 그 일가 위주로 진행될 뿐 영지나 주민들은 승전 측의 경제력을 증가시키는 요소라서 굳이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침을 이미 경험해봤던 조선 주민들에겐 다른 얘기였다. 참전한 고자에몬의 비망록에 따르면 성이 함락된 이후 주민은 물론 가축은 물론 길고양이마저 죄다 도륙하였다고 한다. [7]

전투가 워낙 혼란해서 시체는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의관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이후 진군을 멈추지는 않았고 일본군은 동래성으로 향했다.(동래성 전투) 일본군과 부산진 주변 백성들은 분전한 부산진 첨절제사 정발을 기리는 의미로 정발을 흑의 장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는 전쟁 중에 자신이 맡은 임무에 소홀했다는 억울함을 사기도 했지만 이내 누명을 벗었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충신으로 인정받았다.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동래 충렬사에 배향되었고 묘소는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8]#에 있으며 부인 임씨와 합장되어 있다.

3. 기타

4. 대중매체



[1]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일대다. 이름 때문에 오해할 수도 있는데 현재의 부산진구가 아니다.[2] 지금의 부산 광역시 영도구다.[3] 이 때문에 간혹 전쟁의 낌새를 모르고 놀러나갔다는 오해가 있지만 이 시기에 사냥은 그 자체가 기동 훈련이었다.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정기적으로 사냥을 통해 군사훈련을 했다. 특히 산이 많은 나라인 한반도 특성상 군대가 사냥을 하려면 무기를 들고 동료들과 함께 산에서 뛰어야 했고 훈련 이후엔 잡은 동물의 고기라는 보상도 주어지는 효과적인 훈련법이었으며 정발은 일본의 수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사냥을 시행했다.[4] 부산진성을 수비하는 조선군은 정규군 800명과 피난민 2,200명 총합이 3,000명이었으나 공격해온 일본군은 18,700명이었다.[5] 행은 품계보다 낮은 직급의 관직을 수행할때 붙는다.[6] 선조 실록 1592년 8월 7일, 11월 25일 기사에서 정발이 정말 죽은 게 맞는지 선조가 확인하는 대목이 있다. 전쟁 초기의 혼란으로 파천 직후 조정이 파악한 초기 전투는 김해, 밀양, 상주 전투, 탄금대 전투 정도였기 때문이다.[7] 전국시대에 농민들을 꼭 가만둔 건 아니다. 피난민들을 "농지에서 일하지 않은 죄"로 억까해서 죽이던 경우도 있었다. 조선에서처럼 일본에서도 간혹 피난민들이 산골짜기에 임의로 성채를 만들어 농성하는 경우도 있었다. 병사들이 쫓아와서 도륙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 그리고 이렇게 잡혀 죽거나 서유럽 노예상에 의해 전세계로 수출되기도 했다. 전국시대 자국민 노예 수출 박리다매로 유명한 게 우에스기 겐신다테 마사무네.[8] 이 곳은 현재도 경주 정씨 집성촌이다.[9] 을사사화에서 죽은 윤임의 다섯째 아들로 개전 직후 다대포진에서 왜군과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휘하 장졸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윤흥신의 석상은 부산진역 인근의 고관 입구에 있으며 정발의 동상과는 약 600m 가량 떨어져 있다.[10] 작가가 철저한 고증을 하는 스타일인데 아마도 출생연도인 1553년을 1533년으로 잘못 이해한 듯 싶다.[11] 한국식 한자음은 평조익. 이 소설 초반부에 자주 등장하는 평조신(平調信), 야나가와 시게노부의 사촌.[12] 본작과 달리 와키자카 군은 부산진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13]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전선 건조 지휘장 조수창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