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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문화재청
1. 개요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인 삼국시대 7세기 경 한국의 금동반가사유상.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보물 제331호로 지정되었다.2021년 대한민국 보물의 지정번호가 사라짐에 따라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본 불상의 명칭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3)'으로 변경되었다. 다만 나무위키에서는 본 문서를 보는 사람들의 혼란을 고려하여[1] 한국어 위키백과처럼 보물 제331호명을 붙여 문서를 개설하였다.
2. 내용
국립중앙박물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설명판 |
7세기 경 삼국시대에 한국에서 만들어진 금동제 반가사유상으로, 현재까지 발견된 한국의 금동반가사유상 중 유일하게 사각형의 넓은 대좌받침을 하고 있어 일명 '방형대좌 금동반가사유상'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일본 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는데, 연화좌 아래에 별도의 대좌받침을 두는 것은 동시기 일본에서 제작된 반가사유상들에게서 자주 보이는 형식이다.
이 상의 상반신과 팔은 다른 한국의 반가사유상과는 달리 비현실적으로 가늘고 길게 표현되어 있으며, 입고 있는 천의의 모습도 다른데, 이 역시 일본의 반가사유상에서 자주 보이는 양식이다. 이렇게 극도로 추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일본의 반가사유상으로는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 중인 호류사 헌납보물 제162호와 헌납보물 제156호 반가사유상, 나가사키 조린사 반가사유상 등이 있다. 이러한 일본 문화와의 근연성 때문에 이 반가사유상이 일본에서 제작된 후 한반도로 넘어왔거나, 혹은 한국에서 제작했더라도 일본 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은 상태에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본 불상이 제작된 지역은 공식적으로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불상의 양식을 봤을 때 고구려의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고, 당시 한반도 남부에 위치했던 백제와 신라 두 나라 중 한 곳에서 만들어졌다고 추정하는 분위기다. 그 중에서도 옛 백제 지역에서 만들어진 백제의 불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백제에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드는 근거는 역시 상기한 대로 본 불상에 일본 문화가 짙게 담겨져 있다는 점이다. 7세기 당시 백제와 일본의 친교 관계는 상당한 수준이었고, 상호 간에 문화를 주고받은 흔적도 가장 많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 일본에 존재하는 반가사유상 중 상당수가 본 불상과 상당히 비슷한 양식을 하고 있다는 점을 볼 때 당시 일본과 가장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백제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옛 신라지역인 경상도 쪽의 연구자들도 상당수가 이 주장을 인정하고 있으며, 대구 경북 지역의 매체인 TBC의 프로그램에서도 아예 본 불상을 백제의 불상으로 소개한 적도 있을 정도로 백제의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때문에 본 불상을 백제에서 제작한 것이라 확신하는 지역 연구자들은 아예 '백제 방형대좌 금동반가사유상'으로 이름을 확정해 부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관계로 백제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본 불상에 상당히 주목하는 편이다. 반가사유상 중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된 83호는 신라로, 118호는 고구려의 것으로 거의 확정받았고, 그중 그나마 78호가 가장 애매하긴 하지만 이것도 신라 제작설이 약간 더 우세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반면 본 불상은 학계에서 제작국을 비정하는 방향이 거의 백제로 확정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백제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본 불상을 국보들보다 더 중시하기도 한다. 실제로 본 불상은 비록 크기가 국보들에 비해 매우 작은 소형 반가사유상이긴 하지만 제작 기법의 세련됨 만큼은 결코 기존 국보들에도 쉽게 밀리지 않는, 상당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불상이기도 하다.
다만 공식적으로는 아직 신라에서 제작했을 가능성 또한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관계로 일단은 삼국시대의 반가사유상 정도로 표기하고 있다. 일단 과거 통념에 따르면 본 불상이 백제 지역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는 가장 큰 근거가 일본 문화와의 근연성인데, 문제는 최근 들어 한일 양국에서 고고학 기술의 발전으로 각국 유물에 대한 심화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당시 신라 또한 비록 정치적으로는 일본과 적대적이었지만 문화적으로는 일본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고 한일 양국 학계에서 지속적으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라 요즘은 단순히 일본 문화의 영향을 받은 유물이라고 해서 무조건 100% 백제의 것으로 보기가 상당히 애매해진 상황이다. 거기다 옛 학계에서 유물의 세련된 상태만을 보고 신라와 백제의 작품을 구분하던 것 또한 2010년대 이후 한일 양국에서 지속적인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기법적으로 상당히 발전한 형식의 신라 유물들이 계속 발견되거나, 기존에 매우 세련되고 아름다운 유물로 유명했던 작품이 재질을 확인해보니 신라 작품으로 확정되는 등 7세기 당시 신라의 유물 제작 수준이 기존 통념과는 달리 상당히 우수했다는 연구 결과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어 요즘은 이 부분으로도 제작국을 특정짓기가 상당히 힘들어진 상황이다. 특히 불상의 경우 타국에 밀리기는 커녕 오히려 동시기 다른 국가들의 양싸다구를 후려치는 수준의 신라 불상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발견이 되고 있어서 지금은 옛날 통념대로 '이때는 신라의 문화 수준이 아직 무르익지 않은 상황이라 이런 작품을 만들었을 리가 없다'라고 보기가 더욱 애매해졌다.
일단 본 불상에 대한 현 학계의 입장은 '백제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지만, 신라에서 만들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다' 정도로 보면 될 듯하다.
지금으로부터 1,400여년 전에 만들어진 한국의 금동반가사유상으로, 당시 한국의 불교 문화와 금속공예술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이에 1963년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
4. 보물 제331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은 왼다리를 내리고 걸터 앉아서 오른손을 들어 두 손가락을 살짝 뺨에 대고 생각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미륵보살상이다.
긴 얼굴은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고 미소가 없는 정적인 표정이다. 머리는 평평하게 표현되었고 그 위에 높은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있다. 가늘고 긴 몸은 양 어깨와 양 팔에만 옷을 살짝 걸치고 있으며, 옷주름은 단순하면서 매우 도식적으로 표현되었다. 목 둘레의 2중으로 된 구슬 장식은 무거워 보이는데 가슴 앞으로 내려와 X자형으로 교차되고 있다.
대좌(臺座)는 4각형의 대좌 위에 8각으로 된 받침을 놓고 그 위에 다시 연꽃이 새겨진 대좌가 놓여있는 모습인데, 보살상보다 크게 만들어져 전체적으로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4각형의 대좌에는 마름모꼴 문양이 1면에 2개씩 뚫려 있는데 대좌의 이런 모양은 우리나라 금동불에서는 보기 드문 예이다.
조각수법이 선과 면의 구분이 분명하고 잘 다듬어져 세련된 모습이며, 출토지가 분명하지 않지만 2중의 구슬장식과 가운데가 솟아오른 연꽃의 형식 등으로 보아서 삼국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긴 얼굴은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고 미소가 없는 정적인 표정이다. 머리는 평평하게 표현되었고 그 위에 높은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있다. 가늘고 긴 몸은 양 어깨와 양 팔에만 옷을 살짝 걸치고 있으며, 옷주름은 단순하면서 매우 도식적으로 표현되었다. 목 둘레의 2중으로 된 구슬 장식은 무거워 보이는데 가슴 앞으로 내려와 X자형으로 교차되고 있다.
대좌(臺座)는 4각형의 대좌 위에 8각으로 된 받침을 놓고 그 위에 다시 연꽃이 새겨진 대좌가 놓여있는 모습인데, 보살상보다 크게 만들어져 전체적으로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4각형의 대좌에는 마름모꼴 문양이 1면에 2개씩 뚫려 있는데 대좌의 이런 모양은 우리나라 금동불에서는 보기 드문 예이다.
조각수법이 선과 면의 구분이 분명하고 잘 다듬어져 세련된 모습이며, 출토지가 분명하지 않지만 2중의 구슬장식과 가운데가 솟아오른 연꽃의 형식 등으로 보아서 삼국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1] 본 불상이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고 유물 명칭에 1963이라고 붙인 것으로 보이는데 박물 계통에 깊이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나 겨우 알아볼 수 있을까 말까하지, 잠깐 공부하기 위해 유물을 검색하는 일반인들이 이런 등재년도 숫자 같은 걸로 이게 자신이 찾던 그 유물의 이름이 맞는지 알아볼 수 있을리 없다. 과거에는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 반가사유상이라고 검색하면 이게 국보 몇호인지, 혹은 보물 몇호인지 바로 알 수 있었지만 이젠 검색된 제목만으로는 이게 내가 찾는 반가사유상이 맞는지 알기가 힘들어서 상세 페이지를 일일이 들어가봐야 한다. 그나마 반가사유상 중 가장 유명한 국보 제78호와 국보 제83호 두 점은 애칭 공모전을 해서 유물명을 새로 붙인다곤 하는데 나머지 유물들은... 예를 들어 능엄경언해의 경우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등록된 유물이 총 33건인데, 과거에는 홈페이지에서 능엄경이라고 검색하면 내가 찾는 유물을 국보, 보물 번호를 통해 바로 찾을 수 있었지만 이젠 능엄경이라 치면 나오는 수많은 능엄경언해 중에서 이게 대체 어디에 소장되어 있는 건지, 내가 찾고자 하는게 이중 어떤건지 전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