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2-16 17:19:24

정약용 간찰

1. 개요2. 여유당전서본3. 여유당전서 미수록본4.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5. 하피첩과 매조도6. 5대(5代) 간찰7. 기타

1. 개요

조선 후기의 유학자인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남긴 친필 간찰들.

2. 여유당전서본

정약용이 평생에 걸쳐 저술한 방대한 양의 작품들을 모아놓은 문집인 여유당전서 154권 76책에는 약 220여통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주로 채제공, 정범조, 권엄, 이가환, 이정운, 윤필병, 이익운, 최헌중, 김한동, 이정덕, 이시수, 유형, 유의, 심환지, 이의준, 이조원, 이수하, 홍인호, 성정진, 이익진, 홍시보, 한치응, 채홍원, 이유수, 심규로, 윤지조, 이중련, 신성모, 이기경, 박제가, 윤지범, 엄원, 심유, 김후, 이삼환, 이인섭, 방도명, 윤취협, 이문달, 권기, 채홍규, 채서공, 강이원, 조익현, 만계, 이필연, 윤지익, 한재렴, 권상학, 김이재, 이민수, 정수칠, 윤영휘, 김정희, 홍약여, 여동식, 김기서, 이재의, 신작, 정약전, 김매순 등 61인에게 보낸 편지이며, 그 외 두 아들에게 보낸 16통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3. 여유당전서 미수록본

문집에는 실리지 않은 사소한 친필 편지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다산학술문화재단에서 '다산 간찰집'이란 명칭으로 출간하였다.

다산여황상서간첩(茶山與黃裳書簡帖), 매옥서궤(梅屋書), 다산간찰첩(茶山簡札帖), 은봉집간(隱峯集柬) 등의 서첩을 통해 전해진 것으로, 여유당전서 문집에는 수록되지 않은 편지 121통이 수록되어 있다.

네이버 책 : 다산 간찰집 여유당전서 미수록

4.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이 유배지에 있을 때 가족과 친지,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들. 총 61통의 편지를 책으로 발간하였다. 1979년 박석무가 번역해 1991년, 2009년에 개정되었으며 최근 2019년 세번째로 개정되었다. 역자는 여전히 동일하다.

네이버 책 :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2009년 간행된 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5. 하피첩과 매조도

霞帔帖. 하피는 노을빛 치마라는 뜻으로 정약용이 두 아들 정학연(1783~1859)과 정학유(1786~1855)에게 교훈이 될 만한 구절을 써서 준 친필 서첩이다.

정약용이 전남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10년째 하고 있던 1810년, 남양주에 있던 부인 홍혜완(1761~1838)이 정약용에게 시집올 때 입었던 낡은 명주 치마를 보냈다. 정약용은 그 치마를 잘라 두 아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구절을 써내려갔고 그렇게 만든 4권의 서첩에 하피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본래 4권이지만 현재 3권만 알려져 있다. 하피첩 1권의 서문에는 이 서첩의 내력이 쓰여있다.
余在耽津謫中 病妻寄敝裙五幅 蓋其嫁時之纁衻 紅已浣而黃亦淡 政中書本 遂剪裁爲小帖 隨手作戒語 以遺二子 庶幾異日覽書興懷 挹二親之芳澤 不能不油然感發也 名之曰霞帔帖 是乃紅裙之轉讔也 嘉慶庚午首秋 書于茶山東菴 蘀翁
내가 탐진(강진)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을 적에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 다섯 폭을 보내왔는데, 그것은 시집올 때의 훈염(纁袡, 신부의 예복)으로 붉은빛은 흐려지고 노란빛은 옅어져 글씨 쓰는 바탕으로 알맞았다. 이것을 잘라서 조그만 첩(帖)을 만들고, 손이 가는 대로 훈계하는 말을 써서 두 아이에게 준다. 훗날 이 글을 보고 감회를 일으켜 두 어버이의 흔적과 손때를 생각한다면 틀림없이 그리는 감정이 뭉클하게 일어날 것이다. 이것을 ‘하피첩(霞帔帖)’이라고 이름지었는데, 이는 곧 홍군(紅裙, 붉은 치마)을 달리 표현한 말이다.
가경(嘉慶) 경오년(1810, 순조 10) 7월에 다산(茶山, 다산초당)의 동암(東菴)에서 쓰다. 탁옹(籜翁)

정약용은 부인에게서 받은 치마로 두 아들에게는 하피첩을 써서 보낸 준 다음, 1812년에 막내딸[3]이 시집을 가자 그 이듬해인 1813년, 남은 치마로 매화병제도(梅花屛題圖)라는 그림을 그려 보내 주었다. 이 매조도에도 하피첩과 비슷한 내용이 쓰여있다.
余謫居康津之越數年 洪夫人寄候裙六幅 歲久紅琥剪之爲四帖 以遺二子 用其餘爲小障 以遺女兒 嘉慶十八年癸酉七月十四日冽水翁書于茶山東菴
강진에서 귀양살이한 지 몇 해 지나 부인 홍씨가 해진 치마 여섯 폭을 보내왔다. 너무 오래돼 붉은색이 다 바랬다. 그걸 오려 서첩 4권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이 작은 그림을 그려 딸아이에게 전하노라.
가경(嘉慶) 18년 계유년(1813, 순조 13) 7월 14일에 열수옹(冽水翁)이 다산(茶山, 다산초당)의 동암(東菴)에서 쓰다.

위의 막내딸에게 준 매조도와 별개로 진위 논란이 있는 1813년 8월 19일에 그린 매조도가 하나 더 있다. 이 매조도의 배경에는 야사가 있는데 정약용이 다산초당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1808~1818) 자신과 제자들의 수발을 들어줄 소실(小室) 정씨를 두었고 그렇게 몇 년을 지내다보니 자연스럽게 둘 사이에서 홍임이라는 딸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 매조도는 내용상 홍임을 위해 그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막상 홍임이 아니라 난초 밭에 씨 뿌리는 늙은이에게 주기 위해 썼다고 되어 있다. 홍임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는 달리 유배 생활 도중 생긴 딸을 드러내놓을 정도로 떳떳하지는 못했기에 답답한 처지의 본인을 빗대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아무튼 소실을 두고 딸이 태어나면서 유배 생활 중 새로운 활력을 찾았던 것인지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의 명저가 이 시기에 쓰여졌다.

두 매조도를 그린 1813년에 정약용은 이미 해배령(解配令)을 받은 상태였으나 바로 고향인 마재마을(현 남양주시 조안면)로 돌아오지 않고 5년 후인 1818년에야 돌아왔다. 마재로 돌아올 때 홍임 모녀도 데리고 왔는데 얼마 안있어 둘은 다시 강진의 다산초당으로 돌아갔다.[4] 홍임 모녀가 돌아간 후 정약용은 강진의 제자에게 두 사람을 잘 돌봐달라는 편지를 보낸다. 정약용과 홍임 모녀에 대한 이야기는 정식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고 소문으로만 떠돌던 것이 1999년, 한 고서점에서 남당사(南塘詞)라는 16수 한시가 발견되면서 공식화되었다. 누가 썼는지 알 수 없는 이 시에는 모녀의 사연과 감정선이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따라서 강진의 어느 문인이 썼거나 혹은 정약용 본인이 썼다는 주장이 있다. 이 매조도는 홍임 모녀에게 주지 못했는지 1822년에 마재에 놀러온 친구 이인행(1758~1833)에게 주었고 그의 후손이 가지고 있다가 2009년에 공개되었다.

하피첩은 정악용 가문의 후손들에게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6.25 전쟁 중 분실되어 다산문집에 내용만 남아있을 뿐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5] 그러다가 2006년 4월 KBS TV 프로그램 TV쇼 진품명품에 뜬금없이 등장했다. 의뢰인의 설명에 따르면 자신은 수원에서 인테리어일을 하는 사람인데, 2004년 어느 날 철거현장에서 만난 폐지 줍는 할머니의 리어카에서 고문서 3권을 발견했고 잘은 모르지만 왠지 모르게 끌려 공사장의 폐품을 가져가는 대신 책을 달라고 해 교환했다고 한다. 그리고 2년 후 이것을 진품명품에 감정 의뢰한 것이었다. 당시 의뢰인은 가치를 잘 몰랐기에 감정가를 1권 당 5만원씩, 총 15만원으로 책정했지만 진품명품의 감정위원은 이 책을 감정하다 이것이 말로만 들었지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정약용의 하피첩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중이던 막내딸에게 준 매조도와 비교해보니 치마의 재질이나 결이 같아 진품으로 확인, 1억원으로 평가했다.

몇 달 뒤 의뢰인은 해당 감정위원에게 연락해 하피첩을 팔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감정위원은 정약용이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쓴 책이므로 강진군이 매입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연결해주었으나 강진군의 문화재 구입 예산으로는 의뢰인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평소 알고 지내던 고서적류 컬렉터인 부산저축은행의 김민영 전 대표를 소개를 시켜줬고 김민영이 구입한 후인 2010년 10월에는 보물 제1683-2호에 지정되었다. 그러나 부산저축은행이 그 다음해에 파산하면서 이 책은 예금보험공사에 압류되었고 2015년 9월에는 김민영이 소유했던 다른 고서적들과 함께 한꺼번에 경매에 부쳐졌다. 하피첩 외에도 경국대전, 월인석보 등 보물로 지정된 고서적만 17건이나 되었는데 이 문화재들의 특성과 가치를 생각해서 공공기관만 응찰할 수 있도록 하였고 하피첩은 국립민속박물관과 남양주 실학박물관이 경쟁한 끝에 국립민속박물관이 7억 5000만원에 낙찰받아 국가 소유가 되었다.

6. 5대(5代) 간찰

정약용의 부친(재원공)과 아들(학연, 학우), 손자(대림, 대무, 대번, 대초), 증손자(문섭) 등 문중 5대(代)에 걸친 간찰들.

전남 강진군에서 정약용 요조첩(窈窕帖), 견월첩(見月帖) 17여점에 이어 공개한 유물들로 나주 정시 월헌공파 종회 소장품과 다산의 외손 등 친지가 가보로 보관하던 작품들이다.

정약용의 아버지, 아들, 손자, 증손자의 친필 편지를 중심으로 총 24점의 편지가 공개되었다.

7. 기타

2010년에 소강(小岡) 민관식 전 대한체육회장이 평생에 걸쳐 수집했던 유물인 '민관식 컬렉션' 2만 9천 451점을 그의 유족들이 나라를 위해 수원박물관에 무상 기증했을 때, 유물 정리과정에서 1826년에 정약용이 지었던 친필 간찰 1통이 발견되었다.


[1] 여기서 정조의 그 유명한(?) 술버릇이 언급된다. 바로 강제로 술먹이기. 정약용에게 옥필통에 술을 담아서 마시도록 했다.[2] 정약용과 친분이 있었던 학승 아암의 제자. 자홍이 법명이고 기어는 호이다.[3] 정약용은 부인 사이에서 6남 3녀를 두었으나 5명은 병으로 죽고 2남 1녀만 살아남았다. 1801년 강진으로 유배갈 당시에 이 막내딸은 7살이었다고 한다.[4] 유배 생활에서 도움을 줬다 해도 딸까지 낳아 모녀를 데리고 왔으니 정실부인의 눈에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혼인 때 입은 낡은 치마를 강진으로 보낸 것도 그런 사실을 대강 파악한 후 허튼 생각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성 의미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5] 정약용의 후손들은 마재의 고택에 살았는데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고택이 완전히 물에 잠겨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그때만 해도 정약용의 유물들은 잘 지켜졌으나 그 후 살림이 어려워지면서 마재를 떠나 이곳저곳을 떠도는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6] 2023년 8월 1일부터 8월 20일까지 국립민속박물관 파주관에서 전시되며, 이 중 8월 13일까지는 원본 전시를 한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