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보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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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물 제4호 | |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 安養 中初寺址 幢竿支柱 | |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예술공원로103번길 4 (석수동)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당간 |
수량/시설 | 1기 |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
건축시기 | 통일신라 |
전면에 보이는 돌기둥 두 개가 당간지주고 뒤에 보이는 석탑이 중초사지 삼층석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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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양시 중초사지에 위치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로 보물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2. 상세
당간지주의 높이는 3.64m로, 두 돌기둥이 85cm 간격으로 마주 보고 서 있다. 간구[2]는 상, 중, 하 세 곳에 마련되어 있다.당간지주의 옆면에는 횡서로 아래와 같은 명문이 씌여져 있다. 이 명문을 통해 당간지주의 조성연대뿐만이 아니라 절의 이름까지도 알 수 있다. 또한 속한문(俗漢文)을 이용해 고대 국어사의 좋은 연구자료가 되기도 한다.
寶曆二年歲次丙午八月朔六辛丑日中初寺東方僧岳 一石分二得同月廿八日二徒作初奄九月一日此處至丁未年 二月卅日了成之節州統皇龍寺恒昌和上上和上 眞行法師貞坐義說法師上坐年嵩法師史師二 妙凡法師則永法師典都唯乃二昌樂法師法智法師徒上二智生法師眞方法師作上秀南法師
보력[3] 2년 세차(歲次) 병오년 8월 6일 신축일에 중초사 동쪽 승악(僧岳)의 돌 하나가 갈라져 둘을 얻었다. 같은 달 28일에 두 무리가 옮기기 시작하여 9월 1일에 이곳에 이르렀으며, 정미년 2월 30일에 모두 마쳤다. 당시 절주통(節州統)은 황룡사(皇龍寺)의 항창화상(恒昌和上, ? ~ ?)이다. 상화상(上和上)은 진행(眞行法師)이며, 정좌(貞坐)는 의열(義說)법사이다. 상좌(上坐)는 연숭(年嵩)법사이고, 사사(史師)는 둘인데, 묘범(妙凡)법사와 칙영(則永)법사이다. 전도유내(典都唯乃)는 둘인데 창악(昌樂)법사와 법지(法智)법사이다. 도상(徒上)은 둘인데, 지생(智生)법사와 진방(眞方)법사이다. 작상(作上)은 수남(秀南)법사이다.
보력[3] 2년 세차(歲次) 병오년 8월 6일 신축일에 중초사 동쪽 승악(僧岳)의 돌 하나가 갈라져 둘을 얻었다. 같은 달 28일에 두 무리가 옮기기 시작하여 9월 1일에 이곳에 이르렀으며, 정미년 2월 30일에 모두 마쳤다. 당시 절주통(節州統)은 황룡사(皇龍寺)의 항창화상(恒昌和上, ? ~ ?)이다. 상화상(上和上)은 진행(眞行法師)이며, 정좌(貞坐)는 의열(義說)법사이다. 상좌(上坐)는 연숭(年嵩)법사이고, 사사(史師)는 둘인데, 묘범(妙凡)법사와 칙영(則永)법사이다. 전도유내(典都唯乃)는 둘인데 창악(昌樂)법사와 법지(法智)법사이다. 도상(徒上)은 둘인데, 지생(智生)법사와 진방(眞方)법사이다. 작상(作上)은 수남(秀南)법사이다.
3.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
- 답사여행의 길잡이 7 - 경기남부와 남한강: 중초사터 당간지주와 삼층석탑
- 답사여행의 길잡이 7 - 경기남부와 남한강: 중초사지 당간지주
- 두산백과: 중초사지 당간지주
4. 보물 제4호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양 지주가 원래 모습대로 85㎝ 간격을 두고 동서로 서 있다. 이곳을 중초사터라고 하는 것은 서쪽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기록에 따른 것이다.
현재 지주의 기단은 남아있지 않고, 다만 지주 사이와 양쪽 지주의 바깥에 하나씩 총 3장을 깔아서 바닥돌로 삼고 있는데, 이 역시도 원래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기단 위에 당간을 세우는 받침은 지주 사이에 돌을 마련하고 그 중심에 지름 36㎝의 둥그런 구멍을 뚫어서 마련하였다.
양쪽 지주에 장식적인 꾸밈이 없으며, 윗부분을 둥글게 다듬은 흔적이 있어 시대가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간구멍을 각각 지주의 상·중·하 세 곳에 뚫었다. 동쪽 지주의 윗부분이 깨어져 있는데, 8·15해방 후 인근의 석수(石手)들이 석재로 반출하기 위한 자취라고 전해진다.
각 부분에 섬세하게 조각을 해두지는 않았어도, 단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서쪽 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명문은 모두 6행 123자로 해서체로 쓰여졌다. 이 글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 1년(826) 8월 6일에 돌을 골라서 827년 2월 30일에 건립이 끝났음을 알 수 있다. 당간지주에 문자를 새기는 것은 희귀한 예로, 만든 해를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국내에서 유일한 당간지주이다.
현재 지주의 기단은 남아있지 않고, 다만 지주 사이와 양쪽 지주의 바깥에 하나씩 총 3장을 깔아서 바닥돌로 삼고 있는데, 이 역시도 원래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기단 위에 당간을 세우는 받침은 지주 사이에 돌을 마련하고 그 중심에 지름 36㎝의 둥그런 구멍을 뚫어서 마련하였다.
양쪽 지주에 장식적인 꾸밈이 없으며, 윗부분을 둥글게 다듬은 흔적이 있어 시대가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간구멍을 각각 지주의 상·중·하 세 곳에 뚫었다. 동쪽 지주의 윗부분이 깨어져 있는데, 8·15해방 후 인근의 석수(石手)들이 석재로 반출하기 위한 자취라고 전해진다.
각 부분에 섬세하게 조각을 해두지는 않았어도, 단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서쪽 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명문은 모두 6행 123자로 해서체로 쓰여졌다. 이 글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 1년(826) 8월 6일에 돌을 골라서 827년 2월 30일에 건립이 끝났음을 알 수 있다. 당간지주에 문자를 새기는 것은 희귀한 예로, 만든 해를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국내에서 유일한 당간지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