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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26 01:45:19

고운사


파일:한시적 넘겨주기 아이콘.svg   이 사찰을 소실시킨 화재에 대한 내용은 2025년 3월 영남권 산불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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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고운사 전경

1. 개요2. 역사3. 문화유산4. 사건사고
4.1. 자현 스님 성폭력 및 횡령 사건4.2. 2025년 의성-안동 산불로 인한 전소
5. 외부 링크

1. 개요

한자 : 孤雲寺 / 로마자 : Gounsa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등운산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이다.

단촌면에 속해 있지만 단촌면 소재지보다는 오히려 안동시 일직면 소재지에서 접근하는 게 더 편하다. 의성군, 안동시, 영주시, 봉화군, 영양군 등지의 절을 관할하고 있다. 인근 지역 유명사찰인 부석사, 봉정사 등도 고운사의 관할 하에 있다.

북의성IC에서 내려서 한참 더 올라가야 한다. 근방에 사는 현지인이나 자주 방문하는 불자라면 주변 마을 도로를 이용해서 동네 고갯길을 넘어가면 금방 가지만, 만일 네비를 찍고 가는 관광객이라면 남안동IC에서 가는 것이 훨씬 빠르다.

2025년 의성-안동 산불로 인해 일부가 전소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2. 역사

681년(신문왕 1년) 신라시대 승려의상(義湘)이 창건하여 이름을 고운사(高雲寺)라고 하였다. 그후 최치원(崔致遠)이 여지, 여사 두 승려와 함께 가운루(駕雲樓)와 우화루(羽化樓)를 짓고 본인의 를 따서 고운사(孤雲寺)로 개칭하였다. 이후 도선(道詵)이 약사여래불과 석탑을 건립하였다.

고운사는 해인사쌍계사와 마찬가지로 최치원과 관련이 깊은 사찰이기도 하다. 사찰의 가허루나 우화루 같은 문루를 최치원이 지었다는 전승도 있고, 이때의 인연으로 고운사의 이름을 최치원의 호를 따서 고운사(孤雲寺)로 표기하기도 한다. 고운사에서는 이러한 최치원과의 인연을 살려서 사찰 입구에 최치원문학관을 세워 2022년부터 최치원문화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

고려시대인 948년(정종 3년)에 중창하였고, 1018년(현종 9년)에 들어 다시 중창하였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1695년(숙종 21년)에 중수하였다. 그후 1835년(헌종 1년)에 불탄 것을 재건하였고, 현대에 들어 1970년대에 건물 일부가 다시 소실된 사고가 있기도 했다.

고운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당이 승군의 식량을 비축하고 부상병들을 모아 치료하던 병참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3.1 운동 당시 지방학림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계의 독립운동 거점 가운데 하나였다. 1919년 3월 18일 고운사의 지방학림을 다닌 권이원이 주지 이만우와 권태석[1], 교사 강혜전의 지도로 송기식 아래에서 안동면에서 벌어졌던 만세 시위에 참가했고, 이 일로 일제는 고운사의 지방학림을 강제폐교시켜 버렸다. #

특히 국립공원 안에 소재한 사찰들이 등산객들을 대상으로 입장료를 받던 때에도 교구본사급 사찰 가운데에는 이례적으로 등산객들로부터 입장료나 주차료를 하나도 받지 않은 거의 유일한 사찰이 고운사였다. ####

안타깝게도 2025년 3월 25일, 2025년 의성-안동 산불로 인해 전소되었다. 화재로 사찰이 소실된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 경우는 교구 본사급 대표 사찰이 화재로 피해를 입은지라 더욱 이례적이다. #

3. 문화유산

경내의 국가 지정 중요 문화유산으로는 보물 제246호로 지정된 '의성 고운사 석조여래좌상'과 보물 제2078호로 지정된 '의성 고운사 연수전', 2024년 7월에 시도유형문화재에서 보물로 승격된 '고운사 가운루'가 있었다.

2025년 3월 25일 산불로 전각인 연수전과 가운루는 외부로 옮기지 못했기 때문에 고운사 전소가 최종 확인되어 소실되었을 것으로 보이며(공식발표는 현재 나오지 않았음) 의성 고운사 석조여래좌상은 외부로 옮겨서 보존되었다.[2]

4. 사건사고

4.1. 자현[3] 스님 성폭력 및 횡령 사건

2019년 7월 당시 해당 사찰의 주지스님 자현에 대하여 문제시가 된 적이 있었다. 당시 이 자현스님에 대한 문제로 안동시 내부에서 시끄러웠던 적 있었는데, 해당 사안에 대해서 가장 먼저 직무정지(사유 : 폭력+성추문+공금횡령)가 된 적 있었다. 관련 영상. 이 다음 해에 8월 27일 자로 확정고지가 된 것은 공권정지 3년, 주지스님 직위 박탈, 변상금(약 2억4천 정도) 배상 부과를 받게 되었다.

4.2. 2025년 의성-안동 산불로 인한 전소

2025년 3월 25일 산불로 전소되었다. 다행히 빠른 대피와 조치로 불상과 같은 성보 동산문화유산들은 보존했지만, 상술했듯이 가운루를 비롯한 건축물들은 화마를 피할 수 없었다.#

특히 이번에 전손된 보물 가운루는 현존 유일했던 교각식 누각이라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더한다. 전술했듯이 신라 말엽 최치원이 입산하여 여지(如智), 여사(如事) 두 대사와 함께 가운루(駕雲樓)와 우화루(羽化樓)를 건립하였는데 이게 모두 소실된 것이다.[4] 이렇게 최치원이 처음 지었다고 전하는 두 채의 문루는 물론이고[5], 사찰의 대웅전(금당)과 연수전(延壽殿)[6], 그리고 사찰 입구에 세웠던 최치원문학관 역시 전소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

고운사 부주지 정우가 대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밝히기로는 당시 방송 장비가 없어 정우 자신이 일일이 사찰 내부를 확인하며 “피해야 한다”고 소리지르며 신도와 스님 40여 명을 산 아래로 대피시키고[7] 사찰로 돌아온 후에는 고운사가 이미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고 한다. 정우는 대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저희가 부처님을 잘 모시지 못해서 선배 스님들이 지켜온 천년 고찰이 한 순간에 화마에 휩쓸렸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그런 참담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저희의 부덕의 소치로 돌리고 싶습니다”라고 참담한 심정을 드러냈다. ##

5. 외부 링크


[1] 의병장 권재중의 아들이다.[2] 석조 불상인지라 그래도 목조 건물보다 화재를 잘 견딜 거라 판단해 불길이 번져 오기 전에 미리 방염포를 씌워 놨지만, 막상 화재가 번지자 규모로 보아 견디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경복궁 자선당 유구의 사례처럼, 석조 문화재라고 화재에 전혀 끄덕없는 건 결코 아니다) 곧 인부들을 호출해 다른 사찰 유물들과 함께 바깥으로 운반했다. 무거운 불상을 옮기는 데만 열 명이 투입되었는데, 불상을 차에 싣자마자 불상을 실은 트럭을 제외한 주위에 대부분 불이 옮겨 붙었고 인부들이 타고 왔던 차들도 모두 화마에 휩싸였다고. #[3] 동명의 스님과는 동명이인이다.[4] 이 건물은 후대에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리라 여겨지는데, 1676년(숙종 2)과 1717년의 중수기가 남아 있다. 현재 건물의 건립 시기는 문헌 사료에 비춰보면 1668년에 다시 중수되어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어 이 자체만으로도 300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자리를 유지한 고건축물이었다. 여러 차례 부분적인 수리를 했음에도 심한 훼손이나 변형 없이 제 위치를 유지했으나 이번 화재로 크게 훼손되거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탔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조선시대, 특히 중기의 양식이 지배적이기는 하나 각 부분의 세부형식이 각기 다른 시대의 수법을 보이고 있어 몇 차례의 중수과정을 짐작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익공계 건물에 귀기둥만 2익공으로 꾸민 점이나, 산지 가람에서 계류 위에 꾸민 누형식 등은 흔치 않은 예였다.[5] 가운루의 경우는 공민왕이 이곳에 들렀을 때에 써서 내걸었다고 전하는 친필 현판도 있었다.[6] 연수전은 영조(1694~1776)와 고종(1852~1919)이 70세가 넘는 정이품 이상의 문관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인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고운사 경내의 유일한 왕실 건물이다. 연수전(延壽殿)은 영조 20년(1748년) 왕실의 계보를 적은 어첩(御帖)을 봉안하기 위해 건립한 전각으로, 1887년 다른 전각들과 함께 중수됐다. 건물은 등운산 골짜기를 따라 형성된 사역(寺域)의 요사채 영역에서 남남서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18세기 중반에 왕실의 계보를 기록한 어첩을 봉안하려고 건립되었는데, 그 뒤 고운사의 화재로 불탔다가 1902년에 다시 건립되었다. 지금 걸려 있는 편액은 1904년에 김성근(金聲根)이 칙서를 봉안하면서 제작하였고, 이 때 현재 남아 있는 벽화도 제작되었다. 1902년에는 고종이 기로소에 들었기 때문에 이 것을 기념해 고종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새로 지었던 것이다.#, # 조선 국왕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는 건축물로서는 원형을 유지한 유일한 사례여서 가치가 컸으나 화마를 피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7] 승려들은 인근 봉정사로 피신했다. 특히 봉정사의 경우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봉정사 극락전이 소재하고 있어서, 이곳까지 산불이 번지는 경우에는 피해가 겉잡을 수 없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