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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4-07 22:54:10

고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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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운산 고운사
騰雲山 孤雲寺 | Gounsa
파일:고운사 로고.png
<colbgcolor=#B9A26A><colcolor=#fff> 위치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고운사길 415(구계리 116)
현재 상태 18개 중 11개소 전소
설립 681년
창건자 의상대사
주지 등운 스님
등급 제16교구의 본사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632513_310694_55.jpg
과거 고운사 전경[1]

1. 개요2. 역사3. 주요 문화유산
3.1. 보물 고운사 가운루3.2. 보물 고운사 연수전3.3. 보물 고운사 석조여래좌상
4. 사건사고
4.1. 자현스님 성폭력 및 횡령 사건4.2. 2025년 의성발 경북 산불로 인한 피해
5. 외부 링크

1. 개요

파일:고운사 전경 국립중앙박물관.jpg
일제강점기 고운사 전경

고운사(孤雲寺)는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등운산에 위치한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이다.

단촌면에 속해 있지만 단촌면 소재지보다는 오히려 안동시 일직면 소재지에서 접근하는 게 더 편하다. 의성군, 안동시, 영주시, 봉화군, 영양군 등지의 절을 관할하고 있다. 인근 지역 유명사찰인 부석사, 봉정사 등도 고운사의 관할 하에 있다.

북의성IC에서 내려서 한참 더 올라가야 한다. 근방에 사는 현지인이나 자주 방문하는 불자라면 주변 마을 도로를 이용해서 동네 고갯길을 넘어가면 금방 가지만 관광객이라면 남안동IC에서 가는 것이 훨씬 빠르다.

2. 역사

681년(신문왕 1년) 신라시대 승려의상이 창건하여 이름을 고운사(高雲寺)라고 하였다. 그후 최치원이 여지, 여사 두 승려와 함께 가운루(駕雲樓)와 우화루(羽化樓)를 짓고 본인의 를 따서 고운사(孤雲寺)로 개칭하였다. 이후 도선이 약사여래불과 석탑을 건립하였다.

고운사는 해인사쌍계사와 마찬가지로 최치원과 관련이 깊은 사찰이기도 하다. 사찰의 가허루나 우화루 같은 문루를 최치원이 지었다는 전승도 있고, 이때의 인연으로 고운사의 이름을 최치원의 호를 따서 고운사(孤雲寺)로 표기하기도 한다. 고운사에서는 이러한 최치원과의 인연을 살려서 사찰 입구에 최치원문학관을 세워 2022년부터 최치원문화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2]

고려시대인 948년(정종 3년)에 중창하였고, 1018년(현종 9년)에 들어 다시 중창하였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1695년(숙종 21년)에 중수하였다. 그후 1835년(헌종 1년)에 불탄 것을 재건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선사 함홍(1805~1878)과 수월(1817~1893)이 이곳에 머무르며 선풍(禪風)을 진작했다. 현대에 들어 1970년대에 건물 일부가 다시 소실되었다. 안타깝게도 2025년 3월 25일, 2025년 의성발 경북 산불로 인해 많은 전각이 소실[3]되었다. #

고운사는 임진왜란사명당이 승군의 식량을 비축하고 부상병들을 모아 치료하던 병참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4][5] 3.1 운동 당시 지방학림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계의 독립운동 거점 가운데 하나였다. 1919년 3월 18일 고운사의 지방학림을 다닌 권이원이 주지 이만우와 권태석[6], 교사 강혜전의 지도로 송기식 아래에서 안동면에서 벌어졌던 만세 시위에 참가했고, 이 일로 일제는 고운사의 지방학림을 강제폐교시켜 버렸다. #

명부전에 봉안된 지장보살상은 조선 현종 때인 1670년에 명부전을 지으면서 제작된 목조 불상인데, 조선 후기의 조각승 단응(端應)[7]의 제작이라고 전한다. # 해동제일지장도량이라고 불리며, 사세가 번창했을 당시엔 366칸 당우에 200명이 넘는 대중이 상주했던 대가람이었다. 1911년 발간된 등운산고운사사적(騰雲山孤雲寺事蹟)에 보면, 1910년대에 고운사는 참선하는 금당(金堂)과 염불 수행하는 백련암이 있었고, 강원도 운수암(雲水庵)까지 갖춘 총림과 같았다.

1922년에 고운사는 경북 경내의 동화사은해사김룡사기림사 등의 본산과 함께 경북5본산연합회를 결성하였는데, 이게 1936년 경북불교협회로 발전한다. 경북불교협회는 1936년 7월부터 『경북불교』라는 타블로이드판 신문을 발간하여 불교계 소식을 전하였고, 1937년 8월에는 『경북오본산고금기요』라는 다섯 본산의 창건과 가람의 중수, 각 사찰에서 입적한 고승들의 비문 등의 연혁을 기록한 자료집을 발간하였다. 뿐만 아니라 공동으로 1939년 중등학교인 오산불교학교(五山佛敎學校)[8]를 설립하여 1940년 4월 8일 개교하였다. 이 학교는 당시 불교계의 유일한 중등교육기관이었으며, 태평양전쟁 막바지였던 1944년 일제의 '학교전시비상조치법(學校戰時非常措置法)'으로 신입생 모집이 정지되었다가 광복(1945년) 이후 오산농림실수학교(五山農林實修學校)로 개편, 이듬해 1946년 능인중학교(能仁中學校)로 설립이 인가되어 대구이천동에서 개교했다. 1951년 학제 개편에 따라 중학교고등학교로 분리되었으며, 1986년 수성구 지산동으로 이전해서 현재에 이른다. # 지금도 능인중학교와 능인고등학교 홈페이지에 가 보면 자교 연혁의 시작을 오산불교학교의 전신이라고 할 오산학림이 세워졌던 1938년 1월로 잡고 있다. ##

특히 국립공원 안에 소재한 사찰들이 등산객들을 대상으로 입장료를 받던 때에도 교구본사급 사찰 가운데에는 이례적으로 등산객들로부터 입장료나 주차료를 하나도 받지 않은 거의 유일한 사찰이 고운사였다. ####

3. 주요 문화유산

3.1. 보물 고운사 가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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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보물 寶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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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5288> 의성 고운사 가운루
義城 孤雲寺 駕雲樓
Gaullu Pavilion of Gounsa Temple, Uiseong
소재지 <colbgcolor=#fff,#1f2023> 경상북도 의성군 고운사길 415(단촌면)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불전
수량/면적 1동
지정일 2024년 7월 17일
시대 조선시대
소유단체 고운사
관리단체 고운사 }}}
파일:의성 고운사 가운루 조감.jpg
하늘에서 내려다 본 가운루(駕雲樓)
파일:의성 고운사 가운루 전경.jpg
가운루(駕雲樓) 전경
1668년(현종 9년) 건립된 고운사의 누각.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장방형 평면에 팔작지붕 형식을 갖춘 사찰 누각으로 파련형 대공, 소매걷이형 창방의 결구형태, 설주를 둔 창호, 익공의 형태 등을 비롯한 다수의 부재에서 조선 중·후기의 건축적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계곡의 양안을 가로질러 배치한 사찰 누각 중 가장 큰 규모이자 유일한 사례이며, 계곡으로 인한 지형의 고저차를 기둥 높낮이로 해결하는 수법과 넓은 주칸을 해결하는 구조 형식 등은 기존의 다른 사찰 누각과는 차별되는 독특한 구조와 형태로 자연과의 조화를 잘 이룬 건물이다.

건립연대가 비교적 명확하고,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다고는 하나 조선 중・후기에 성행하였던 건축양식이 잘 남아 있으며, 계곡에 가로질러 설치된 독특한 사찰 누각 건물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

2025년 의성발 경북 산불로 인해 2025년 3월 25일 전소되어 완전 소실됐다.

3.2. 보물 고운사 연수전

{{{#!wiki style="margin:-12px 0"<tablebordercolor=#315288>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보물 寶物
}}}
{{{#!wiki style="margin: -15px -10px -15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315288>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보물
<colbgcolor=#315288> 의성 고운사 연수전
義城 孤雲寺 延壽殿
Yeonsujeon Hall of Gounsa Temple, Uiseong
소재지 <colbgcolor=#fff,#1f2023> 경상북도 의성군 고운사길 415(단촌면)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불전
수량/면적 1동
지정일 2020년 8월 31일
시대 조선시대
소유단체 고운사
관리단체 고운사 }}}
파일:현판.jpg
연수전(延壽殿)의 현판과 단청
파일:의성 고운사 연수전 전경.jpg
연수전(延壽殿) 전경
영조고종이 기로소[9]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고운사 경내의 유일한 왕실 건물이다. 건물 내에는 조선시대 기로소에 입소한 4명의 왕인 태조, 숙종, 영조, 고종의 묘호와 시호, 휘 등을 적은 어첩을 보관하고 있으며, 건물의 형태는 조선시대 기로소 안에 있었던 영수각(靈壽閣) 형식을 따라 지었다.

연수전은 절의 다른 건물과 달리 홀로 정남향을 바라보고 있다. 가운데 방 뒷면 위에는 감실(龕室)을 두어 어첩을 보관하도록 하였다. 연수전 주변에는 토석(土石 )담장을 두르고 앞쪽에는 왕의 어첩이 드나드는 곳이기 때문에 가운데 문의 지붕이 좌우보다 한단 높은 솟을삼문을 별도로 지었으며, 만세문(萬歲門)이 적힌 현판을 달았다. 건물의 벽과 기둥, 천장 등에는 왕의 권위과 무병장수, 부귀영화 등을 상징하는 화려한 단청이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 사찰 내의 기로소 원당(願堂) 건물이 남아 있는 것은 의성 고운사 외에는 전라남도 순천에 위치한 송광사에만 있어 오직 2곳에만 현전한다. 하지만 송광사의 경우 현재 불당으로 바뀌어 사라졌기에 고운사의 연수전은 그 역사적 가치가 더욱 크다.

2025년 의성발 경북 산불로 인해 2025년 3월 25일 전소되어 완전 소실됐다.

3.3. 보물 고운사 석조여래좌상

{{{#!wiki style="margin:-12px 0"<tablebordercolor=#315288>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보물 寶物
}}}
{{{#!wiki style="margin: -15px -10px -15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315288>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보물
<colbgcolor=#315288> 의성 고운사 석조여래좌상
義城 孤雲寺 石造如來坐像
Stone Seated Buddha of Gounsa Temple, Uiseong
소재지 <colbgcolor=#fff,#1f2023> 경상북도 의성군 고운사길 415(단촌면)
분류 유물 / 불교조각 / 석조 / 불상
수량/면적 1구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시대 통일신라시대
소유단체 고운사
관리단체 고운사 }}}
파일:의성 고운사 석조여래좌상.jpg
의성 고운사 석조여래좌상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석조 불상. 현재 고운사 약사전 안에 모셔져 있다. 광배와 받침대는 온전히 남아 있고, 불상도 오른손 등 일부를 빼고는 부서진 곳이 거의 없다.

불상의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나발을 붙여 놓았으며 육계[10]는 낮고 편평하여 분명하지 않다. 불상의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있으며, 왼쪽 겨드랑이 밑에서 오른쪽 옆구리까지 옷주름을 같은 간격의 선으로 표현하였다.

불상 뒤쪽의 광배는 끝이 날카로운 배 모양이다. 머리 광배와 몸 광배에는 연꽃과 덩굴무늬 등을 표현하였고, 가장자리에는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받침대 중 윗받침석은 연꽃을 위로 떠받드는 모양으로, 가운데 받침석은 팔각으로 모서리를 기둥 모양으로 장식하였다. 아래 받침석은 연꽃잎을 엎어놓은 모양이다.

광배가 불상보다 더 섬세하고 화려하게 표현된 고운사 석조 여래 좌상은 통일 신라 시대 9세기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4. 사건사고

4.1. 자현스님 성폭력 및 횡령 사건

2019년 7월, 주지스님 자현[11] 의 문제 행적이 알려졌다. 당시 이 자현스님에 대한 문제로 안동시에서 이슈가 됐는데, 이에 직무정지(사유 : 폭력+성추문+공금횡령) 처리가 되었다. 관련 영상. 이 다음 해에 8월 27일 자로 확정고지로 공권정지 3년, 주지스님 직위 박탈, 변상금(약 2억4000만원 정도) 배상 부과를 받게 되었다.

4.2. 2025년 의성발 경북 산불로 인한 피해

2025년 3~4월 전국 동시다발 산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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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c002d><colcolor=#fff> 개별 산불 3월14일2025년 청도 산불^^
2
^^
20일2025년 사천 산불^^
1
^^
21일2025년 3월 산청-하동 산불^^
3
^^(경과)
22일2025년 의성발 경북 산불^^
3
^^
경과 · 피해(#피해 · 운람사)
2025년 울주-양산 산불^^
3
· 2025년 김해 산불
2
^^
23일2025년 함양 산불 · 2025년 옥천-영동 산불^^
2
^^ · 2025년 동두천 산불
25일2025년 울주 언양읍 산불^^
2
^^ · 2025년 봉화 산불 · 2025년 고창-정읍 산불 · 2025년 당진 순성면 산불
26일2025년 달성 산불 · 2025년 무주 산불^^
2
^^
4월6일대구 서변동 산불
7일2025년 4월 하동 산불^^
2
^^
12일2025년 4월 김천 산불^^
1
^^
개별 문서가 없는 산불3월,
4월
기타 지역
사건 사고 2025년 의성발 경북 산불 진화용 헬기 추락 사고 · 대구 서변동 산불 진화용 헬기 추락 사고 · 여성시대 산불 지역비하 및 조롱 사건
관련 문서 수사 및 재판
* 원 안의 숫자는 산불 대응 최고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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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eslapuppy_고운사_잔해.jpg 파일:teslapuppy_고운사_범종.jpg
산불이 지나간 이후 잔해만 남은 고운사 타지 않은 범종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12]
2025년 의성발 경북 산불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전각 18개소 소실, 11개소 존속) 다행히 빠른 대피와 조치로 불상과 같은 성보 동산문화유산들은 보존했지만, 상술했듯이 가운루를 비롯한 주요 건축물들은 화마를 피할 수 없었다.##

당시 화재 진압에 투입된 소방관 이종혁(경산소방서 재난대응과장)에 따르면, 의성 안평면에서 시작한 불은 바람 방향을 따라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산을 넘어왔고, 3월 25일 오후 3시 15분께 변방리에서 강풍을 타고 사찰 방향으로 넘어와 반대편 산까지 불이 옮겨 붙으면서 가운루와 연수전이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소방관들은 승려들에게 탈출할 것을 권한 뒤에 사찰에서 화재 진압에 나섰다. 오후 3시 20분께 단촌면(고운사 소재지) 주민들에 대해 주민 대피 명령이 내려졌고, 승려들이 절에서 나온 것은 불길이 본격적으로 고운사를 덮치기 시작한 시각(경북도 및 의성군에 따르면)에서 10분 전의 일이다.

이번 화재는 교구 본사급의 대표 사찰이 화재로 큰 피해를 입은지라 이례적[13]이다. # 이미 사찰의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던 탱화나 불상, 사찰에서 보관하던 고서, 현판들은 의성조문국박물관 수장고로 전날(24일)에 이동시켰지만, 25일 화재로 보물인 연수전과 가운루를 비롯해 연지암, 해우소, 정묵당, 아거각, 약사전, 고운대암, 극락전, 만덕당, 종무소가 불탔다. 종각, 우화루, 행사채, 수월암, 백련암 공양간, 일주문, 숭가대, 템플관 등도 소실됐다. 고운사에 이르는 수십년 나이의 명품 소나무 숲길도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 그나마 대웅보전을 비롯해 삼성각, 명부전, 나한전, 조실채, 고금당선원, 고불전, 사천왕문, 해우소, 승가대 등은 불길 속에서 살아남았다.# 이나마도 당시 소방관들이 필사적으로 진화에 나서서 지켜낸 것이다.[14]

특히 이번에 전소된 보물 가운루는 현존 유일했던 교각식 누각이라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더했다. 전술했듯이 신라 말엽 최치원이 입산하여 여지(如智), 여사(如事) 두 대사와 함께 가운루(駕雲樓)와 우화루(羽化樓)를 건립하였는데 이게 모두 소실된 것이다.[15] 이렇게 최치원이 처음 지었다고 전하는 두 채의 문루는 물론이고[16], 사찰의 연수전(延壽殿)[17], 그리고 사찰 입구에 세웠던 최치원문학관 역시 전소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

고운사 부주지인 정우 스님이 대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밝히기로는 당시 방송 장비가 없어 정우 자신이 일일이 사찰 내부를 확인하며 “피해야 한다”고 소리지르며 신도와 스님 40여 명을 산 아래로 대피시키고[18] 사찰로 돌아온 후에는 고운사가 이미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고 한다. 정우 스님은 대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저희가 부처님을 잘 모시지 못해서 선배 스님들이 지켜온 천년 고찰이 한 순간에 화마에 휩쓸렸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그런 참담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저희의 부덕의 소치로 돌리고 싶습니다”라고 참담한 심정을 드러냈다. ##

5. 외부 링크


[1] 2025년 의성발 경북 산불로 인해 소실되기 전 모습이다.[2] 다만 최치원에 대한 전승은 1918년에 오시운이 쓴 등운산고운사사적기에 나오고, 그보다 앞선 신유한(1681~1752)의 고운사사적비(1729년)에는 최치원이나 의상, 도선에 대한 언급도 없이 바로 고려 태조 31년(948년)에 운주(雲住)와 조통(照通) 두 화상이 절을 중창하였던 것부터 시작한다. 신유한의 사적비는 고운사의 승려 정월회한(淨月會閑)이 가져온 사찰의 전승을 토대로 저술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신유한은 조선 통신사 서장관으로 일본을 방문(1719~1720)하고 남긴 기행문 <해유록>으로 가장 유명하다. 신유한은 이미 평해군수 시절인 영조 5년(1729년) 고운사사적비 비문을 썼고, 그보다 1년 전인 1728년에 정월 화상의 부탁을 받고 그해 중건한 고운사 부속 암자인 운수암의 「운수암기雲水庵記」를 쓰기도 하는 등 고운사와 연이 깊다. 운수암은 이후 사라져서 그 부지에 화엄승가대학원이 세워졌다. # 서울신문 서동철 논설위원은 고운사 약사전의 석조여래좌상은 최치원이 살았던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미술사학계는 보고 있고 나한전 앞의 삼층석탑도 신라 후기 양식을 보여 주고 있음을 들어서, 신유한의 사적기에 왜 최치원과의 관계가 서술되지 않았고 오시온의 사적기에는 왜 들어가게 됐는지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라고 하면서도 "하지만 고운사와 최치원과의 관계로 국한하면 신뢰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라고 유보적으로 대하고 있다. #[3] 전각 18개소 소실, 11개소 존속. 자세한 내용은 사건사고 참고.[4] 이것도 신유한의 사적비에는 언급이 없다. 신유한 본인은 또한 사명당의 법손을 자처한 승려 태허 남붕(太虛南鵬, ?~1777)이 사명당 관련 자료를 모아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이라는 문집으로 엮을 때 그 교감을 맡아서 자신의 평가를 덧붙이고 발문을 지었던 것도 신유한이다.[5] 나무위키에서는 아메노모리 호슈 항목에서 일본의 와카슈도 풍속을 보고 기겁해서 일본측 외교관 아메노모리에게 "음과 양이 끌리는 게 자연의 이치인데 양과 양이 서로 끌린다는 게 말이 됩니까"라며 따졌다가 아메노모리가 "학사께서 그 즐거움을 아직 모르시는 모양이오."라고 대답해 벙쪄한 일화로 유명하다.[6] 의병장 권재중의 아들이다.[7] 충북 단양 청련암 목조보살좌상, 제천 원각사 목조보살좌상, 대구 옥련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봉화 각화사 동암 요사채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 울진 불영사 극락전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 등이 그의 작품이다.[8] 다섯 본산이 모여 세운 불교 총림인 오산총림을 근대 제도를 갖춘 학교로 개편한 것으로 초대 교장은 당시 대한불교협회 총무였던 김동화(金東華)가 취임하였다.[9] 조선시대에 70세가 넘는 정2품 이상의 문관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 1394년(태조 3년)에 설치하여 1765년(영조 41년)에 독립관서가 되었고, 이때부터 임금도 참여하였다.[10]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 부처의 크고 높은 지혜를 상징한다.[11] 월정사의 자현스님이 아니라 법명 발음만 같은 다른 사람이다.[12] 사진에는 범종이 홀로 멀쩡하게 서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구도에서 보면 화염으로 인해 금이 가 있는 등 적지 않은 파손이 확인된다.[13] 낙산사내장사처럼 산불로 사찰 대부분이 타거나 일부 사찰 건물에 화재로 전소되는 경우는 많았지만, 이처럼 조계종을 대표하는 교구 본사가 통째로 전소된 예는 6.25 전쟁 때를 제외하면 전례가 없는 일이다.[14] 불교방송 보도에 따르면 고운사 경내에는 평소 사찰의 승려 및 신도들이 사용하는 목욕탕이 있었는데, 콘크리트 벙커처럼 되어 있는 구조였다. 이종혁 과장에 따르면 본인을 포함한 소방관 11명이 대웅전만이라도 지키려고 목욕탕으로 쓰던 건물로 공기호흡기를 들고 들어가 오후 5시부터 두 시간여 동안 대피해 있었다고. #[15] 이 건물은 후대에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리라 여겨지는데, 1676년(숙종 2)과 1717년(숙종 43)의 중수기가 남아 있다. 현재 건물의 건립 시기는 문헌 사료에 비춰보면, 1668년에 다시 중수되어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어 이 자체만으로도 30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리를 유지한 고건축물이었다. 여러 차례 부분적인 수리를 했음에도 심한 훼손이나 변형 없이 제 위치를 유지했으나 이번 화재로 크게 훼손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탄 상황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조선시대, 특히 중기의 양식이 지배적이기는 하나 각 부분의 세부형식이 각기 다른 시대의 수법을 보이고 있어 몇 차례의 중수과정을 짐작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익공계 건물에 귀기둥만 2익공으로 꾸민 점이나, 산지 가람에서 계류 위에 꾸민 누형식 등은 흔치 않은 예였다.[16] 가운루의 경우는 공민왕이 이곳에 들렀을 때에 써서 내걸었다고 전하는 친필 현판도 있었다. 이 현판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17] 연수전은 영조(1694~1776)와 고종(1852~1919)이 70세가 넘는 정이품 이상의 문관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인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고운사 경내의 유일한 왕실 건물이다. 연수전(延壽殿)은 영조 20년(1748년) 왕실의 계보를 적은 어첩(御帖)을 봉안하기 위해 건립한 전각으로, 1887년 다른 전각들과 함께 중수됐다. 건물은 등운산 골짜기를 따라 형성된 사역(寺域)의 요사채 영역에서 남남서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18세기 중반에 왕실의 계보를 기록한 어첩을 봉안하려고 건립되었는데, 그 뒤 고운사의 화재로 불탔다가 1902년에 다시 건립되었다. 지금 걸려 있는 편액은 1904년에 김성근이 칙서를 봉안하면서 제작하였고, 이 때 현재 남아 있는 벽화도 제작되었다. 1902년에는 고종이 기로소에 들었기 때문에 이 것을 기념해 고종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새로 지었던 것이다.#, # 조선 국왕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는 건축물로서는 원형을 유지한 유일한 사례여서 가치가 컸으나 화마를 피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18] 승려들은 인근 봉정사로 피신했다. 특히 봉정사의 경우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봉정사 극락전이 소재하고 있어서, 이곳까지 산불이 번지는 경우에는 피해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