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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06 23:05:13

풍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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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물 寶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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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물 제308호
<colbgcolor=#315288><colcolor=#fff> 전주 풍남문
全州 豐南門 | Pungnammun Gate, Jeonju
소재지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로3길 1(전동 83-4)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시설
시설 1동
건축시기 조선 시대 후기, 1768년(영조 44년)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관리 전주시
1. 개요2. 역사3. 구조4. 기타
파일:풍남문.jpg
2015년, 바깥쪽에서 바라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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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로3길 1(전동 83-4)에 있는 조선 시대성문이다. 전주부성의 남문으로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성의 흔적이다. 대한민국의 보물 제308호로 지정되어 있다. 풍남문이라는 이름은 전주의 별호인 풍패(豊沛)[1]에서 유래한 것으로, 풍패의 남문이라는 뜻이다.
파일:한국전주부남문.jpg파일:전주남문.jpg
1900년대 추정, 바깥쪽에서 바라본 모습 일제강점기, 안쪽에서 바라본 모습

2. 역사

1388년(고려 공양왕 원년)에 전주부성이 처음 축조된 이듬해인 1389년에 지어진 것으로 전해지며, 처음 축조한 전주부성 남문의 문루는 단층이었다고 한다. 이때의 성문은 1597년(조선 선조 30년)에 정유재란이 발발하면서 전주부성의 다른 성문들과 함께 파괴되었다.

1734년(조선 영조 10년)에 당시 전라도관찰사 조현명이 재건하면서 문루를 2층으로 높였으며, 명견루라 명명했다. 이전에는 옹성이 있었으나, 이때 없애고 대신 치성(포루)를 세웠다. 1767년(조선 영조 43년)에 화재로 소실되고 1768년(조선 영조 44년)에 재건됐다. 이때 전라도관찰사였던 홍낙인[2]이 풍남문이라 명명하였다.

1907년에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전주부성이 철거될 때에도 풍남문은 사라지지 않고 남았으나, 종각포루가 헐리고 지면이 120㎝ 정도나 묻히는 등의 훼손을 겪었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복원공사가 진행됐다.

3. 구조

파일:한국전주부남문의측면.jpg파일:한국전주부남문의측면2.jpg
1900년대[6] 추정, 남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왼쪽에 종각, 오른쪽에 포루가 보인다. 북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왼쪽 나무 뒤로 포루가 어렴풋이 보인다.

4. 기타

서울숭례문, 평양 대동문과 마찬가지로 명실상부 전주를 대표하는 문화재이자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다. 전주 한옥마을, 경기전, 전동성당과 같은 관광지가 인접해 있고, 경기전에서 남부시장 가려면 풍남문을 거치는 것이 정석이라, 전주 관광 코스에 거의 필수적으로 포함되곤 한다. 풍남문 일대가 전주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르면서 각종 행사나 집회도 많이 열리고 있으며, 지역 연고구단인 전북 현대가 우승을 하면 이곳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이기도 한다.

풍남문광장 조성 전에는 남부시장쪽에 파묻혀 있는 모습이라 전주에 처음 놀러온 사람이라면 경기전과 전동성당만 보고 가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주변 건물을 전주시가 매입해 허물고 풍남문광장이 조성되면서 시인성이 아주 좋아졌다.


[1] 풍패라는 별호는 한나라태조유방의 고향인 패현 풍읍에서 유래한 것으로, 조선왕조의 본관이었던 전주를 유방의 고향에 빗댄 것이다.[2] 영풍부원군 홍봉한의 장남이자, 조선의 제22대 국왕인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큰오빠이다.[3] 지붕 마루에 하얀 석회를 발라 마감한 것[4] 참고로 호남제일루 현판은 남원 광한루에 있으며, 호남제일정 현판은 정읍 피향정과 제주읍성 관덕정에 있다. 한편 경상감영이 있었던 대구읍성의 남문에는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유재춘,2006] 유재춘. (2006). 18세기 全州府城 축성기록 '築城啓草' 硏究. 사학연구, 81, pp. 39-85.[6] 명치 40년(1907년) 8월 27일 이전에 찍은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