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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居昌 農山里 石造如來立像. 현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 모리산의 필봉 자락 동쪽 기슭에 바위를 깎아 만든 8세기 중후반경 통일신라시대의 석조 불상 1점. 현재 '경남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 산53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보물 제1436호로 지정되어 있다.2. 내용
사진 출처 : 거창군 공식 블로그 - 거창의 보물을 찾아서 거창 농산리 석조여래입상
불상 높이 2.70m.
경상남도 거창군 고제면 농산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원각상(圓刻像)으로, 불꽃무늬의 거신광배(光背)와 연꽃무늬의 원추형 대좌(臺座)를 모두 갖추고 고부조(高浮彫)로 새긴 석불입상이다. 현재는 오랜 세월로 인해 광배 윗부분이 다소 깨지고 불상의 일부분도 파손되어 있다.
불상의 경우 상체에서 여러 겹의 U자형의 주름을 이루다가 허리 부분에서 Y자형으로 갈라져 다리 부분까지 대칭적인 옷주름을 이루는 우전왕(優塡王, Udyana王) 형식의 통견을 입고 있으며, 이러한 양식은 현재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8세기 전반기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사암제석불입상, 그리고 보물 제121호인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의 남면 불입상 등에서도 보이는 형식이다.
불상의 두 발은 불신과 별도로 대석 위에 조각되어 있는데 마멸과 손상이 심하여 왼쪽 발가락 일부만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우측 상단부가 깨어져 나간 광배는 불신과 한 돌로 이루어진 배 모양의 주형거신광으로 어느 정도의 형태는 유지하고 있으나 화염문 등 구체적인 문양 표현은 알 수 없다.
비록 불상의 손이나 광배 등 부분적으로 많은 파손이 보이고 있으나, 지금으로부터 1,300여년 전에 최초 제작된 원 장소에서 단 한번의 이동도 없이 그대로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귀중한 불상으로, 특히 8세기 경 경남 거창 지역의 사실주의 조각 양식을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유물이다. 이에 1972년 2월 12일 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되었다가, 2005년 7월 7일 대한민국 보물로 승격되었다.
3. 외부 링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농산리석조여래입상
- 두산백과 : 거창 농산리 석조여래입상
- 향토문화전자대전 : 거창 농산리 석조 여래 입상
- 한국어 위키백과 : 거창 농산리 석조여래입상
- 답사여행의 길잡이 13 - 가야산과 덕유산 : 농산리 석조여래입상1
- 답사여행의 길잡이 13 - 가야산과 덕유산 : 농산리 석조여래입상2
- 대한민국 구석구석 : 거창 농산리 석조여래입상
4. 보물 제1436호
거창 농산리의 낮은 야산 기슭에 있는 이 석불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다. 입불상으로 자연석을 적당히 다듬어 윗면에 두 발을 새겨 놓은 1매의 대석과, 대석에 꽂아 세울 수 있도록 한 돌에 광배를 함께 조성한 불신 등 두 개의 돌로 구성되었다.
신체에 비하여 다소 머리부분이 큰데 얼굴이 부분적으로 손상되었지만 전체적으로 후덕한 느낌을 준다. 양어깨를 덮어 내린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가슴에서 U자형 옷주름을 이루다 잘록한 허리 부분으로부터 Y자형으로 갈라져 양 대퇴부에서 대칭적인 의문(衣紋)을 이루는 이른바 우전왕(優塡王, Udyana王)식 옷주름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형태는 통일신라 700년 전후 추정의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사암제불입상(砂岩製佛立像)을 비롯하여 719년명 감산사상(甘山寺像), 730년~760년 경 추정의 경주 굴불사지 사면석불(堀佛寺址四面石佛) 남면 불입상 등 8세기 이후 상들에서 나타나는 양식적 특징으로 이 불상의 조성시기를 추정하게 해 준다.
두 발은 불신과 별도로 대석 위에 조각되어 있는데 마멸과 손상이 심하여 왼쪽 발가락 일부만 형태를 유지할 뿐이다. 우측 상단부가 깨어져 나간 광배는 불신과 한 돌로 이루어진 배 모양의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으로 어느 정도의 형태는 유지하고 있으나 화염문 등 구체적인 문양 표현은 알 수 없다.
비록 부분적인 파손이 있으나 이 불상은 야산의 구릉에서 원위치를 지키고 있는 귀중한 불상으로 규모가 비교적 크고 정제된 조각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비슷한 예가 많지 않은 점에서 가치가 있다.
신체에 비하여 다소 머리부분이 큰데 얼굴이 부분적으로 손상되었지만 전체적으로 후덕한 느낌을 준다. 양어깨를 덮어 내린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가슴에서 U자형 옷주름을 이루다 잘록한 허리 부분으로부터 Y자형으로 갈라져 양 대퇴부에서 대칭적인 의문(衣紋)을 이루는 이른바 우전왕(優塡王, Udyana王)식 옷주름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형태는 통일신라 700년 전후 추정의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사암제불입상(砂岩製佛立像)을 비롯하여 719년명 감산사상(甘山寺像), 730년~760년 경 추정의 경주 굴불사지 사면석불(堀佛寺址四面石佛) 남면 불입상 등 8세기 이후 상들에서 나타나는 양식적 특징으로 이 불상의 조성시기를 추정하게 해 준다.
두 발은 불신과 별도로 대석 위에 조각되어 있는데 마멸과 손상이 심하여 왼쪽 발가락 일부만 형태를 유지할 뿐이다. 우측 상단부가 깨어져 나간 광배는 불신과 한 돌로 이루어진 배 모양의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으로 어느 정도의 형태는 유지하고 있으나 화염문 등 구체적인 문양 표현은 알 수 없다.
비록 부분적인 파손이 있으나 이 불상은 야산의 구릉에서 원위치를 지키고 있는 귀중한 불상으로 규모가 비교적 크고 정제된 조각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비슷한 예가 많지 않은 점에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