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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82호 | |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慶州 甘山寺 石造阿彌陀如來立像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
분류 | 유물 / 불교조각 / 석조 / 보살상 |
수량/시설 | 1구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제작시기 | 통일신라 성덕왕 19년(720) |
<colbgcolor=#315288>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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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慶州 甘山寺 石造阿彌陀如來立像. 신라 성덕왕 18년인 719년에 현 경상북도 경주시 월성군 내동면 신계리에 위치한 감산사(甘山寺)에서 만들어진 신라시대의 화강석제 석조불상.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호)와 함께 발견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이며, 대한민국 국보 제82호로 지정되어 있다.2. 내용
총 높이 2.75m.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울산광역시로 가는 길 주변의 토함산 기슭에 위치한 감산사(甘山寺)에서 만들어진 신라시대의 석불로,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과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이 한국의 대표적인 형제 황금 소불상,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제78호, 83호가 한국의 대표적인 형제 반가사유상이라면, 이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과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호)는 한국을 대표하는 형제 석제 거불로 불린다.
이 부처상이 만들어진 감산사는 김지성(金志誠)이란 사람이 자신이 소유했던 감산장전(甘山莊田)을 희사하여 세운 절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 두 석조아미타불입상과 석조미륵보살입상에 새겨진 명문과 삼국유사 권3 탑상(塔像)편 남월산(南月山)조의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 두 점의 불상 뒷면에는 불상의 제작을 의뢰한 발원자 및 조성 경위, 조성 배경 등에 관하여 자세하게 적혀 있어 신라시대의 사회·문화상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데, 불상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개원(開元) 7년인 성덕왕 18년(719년)에 왕의 기밀 사무를 취급하던 최고 행정기구인 집사성(執事省)의 시랑(지금의 부총리 격)을 지내던 김지성(金志成)이 돌아가신 부모를 위하여 미륵상 1구와 아미타상 1구를 만들었으며 특히 이 아미타여래상은 아버지를 위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김지성은 평소 자연을 좋아하여 노장자(老莊子)의 유유자적함을 사모하였으며 불교도 중히 여겼다고 하며, 이에 67세가 되던 해에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가 도덕경(道德經)을 읽고 불교 이론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이후 다시 복직되어 관에 들어갔으나 마음만은 불교를 떠나지 못해 모든 재산을 희사하여 감산사를 세웠다고 한다. 감산사를 짓는 공덕은 국왕 이하 여러 친족 및 일체 중생을 제도케 하여 성불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붓다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부분에는 불교의 시원이 서역에서 시작되어 중국으로 전해졌고, 그것이 신라에까지 이르렀는데, 지금의 신라 땅이 마치 사위성과 같고 극락과 비슷하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불상을 만든 것은 국주대왕(國主大王), 이찬 개원공(愷元公), 돌아가신 부모님, 돌아가신 동생이자 소사(小舍)였던 양성(梁誠, 김양성), 사문 현도(玄度), 돌아가신 아내 고로리(古路里), 돌아가신 누이동생 고보리(古寶里)와 함께 아내 아호리(阿好里) 등을 위한 것이다. 아울러 이 작은 발원의 인연으로 인하여 모두 피안(彼岸)에 오르고 사생육도(四生六道)가 함께 깨달음을 얻고자 하였는데, 문장은 내마(奈麻)인 총(聰)이 짓고, 사문 경융(京融)과 대사(大舍) 김취원(金驟源)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마지막 부분에는 아버지 인장일길간이 향년 37세에 돌아가시자 동해에 뼈를 뿌렸다는 내용과 성덕왕 19년(720) 4월 22일에 김지전이 죽었다는 내용도 있다.
이 두 불상은 719년에 만들어진 이후 계속 경주 감산사(甘山寺)에 봉안되어 있다가,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현재의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이 때는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 등 수많은 경주 시내의 유물들이 일제의 치적쌓기 경쟁의 일환으로 서울이나 일본 등으로 강제로 옮겨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두 불상도 같은 상황에 처했던 것이다.
이 아미타여래입상은 형제상인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다 조금 더 크고 화려한 형태를 하고 있다. 불신·광배·대좌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 이 불상은 불신과 대좌의 높이 비율이 3:1이고, 등신대의 불신에 적당한 광배로 전체적인 구도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균형을 이룬 구도는 형태에서도 잘 나타나 머리와 불신의 높이 비율이 1:4로, 굴불사지석불상 중 아미타상이나 벽도산 아미타상(碧桃山阿彌陀像)과 함께 인체 비례에 가까운 사실적 표현을 하고 있다. 아미타불은 통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설법인을 결한 채 연화대좌 위에 서 있는데, 기존의 신라 불상에서는 볼 수 없던 이국적인 얼굴과 얇은 법의 위로 드러나는 관능미를 갖춘 몸을 가지고 있다. 유려하게 표현된 크고 작은 법의 주름은 가슴에서 U자로 파도치듯 반복되어 내려오다가 배꼽 아래에서 갈라져 양다리 위에서 다시 U자를 그리며 흘러내리고 있다. 미륵보살상에서도 보이는 광배 옆면의 꽃문양도 신라 불상에서는 처음 보이는 특징이다.
불신, 광배, 대좌를 하나의 돌에 새긴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석조상과 달리, 이 아미타불상은 불신, 광배, 대좌 상대(윗부분)를 하나의 돌에 조각한 다음, 따로 만든 대좌의 중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 정도 크기의 불상은 불신, 광배, 대좌를 하나의 돌에 같이 조각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감산사 보살상과 불상은 불신과 대좌를 따로 주조한 다음 결합하여 완성한 8세기 전반의 금동불 조성 방법과 매우 유사하여 석불 제작 당시 금공장의 참여를 추측하게 한다.
이 두 석조불상의 뒷면에 새겨진 명문은 신라 금석학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으며, 이를 통해 불상을 제작한 확실한 기년명을 알 수 있어 신라시대 불교조각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아미타불상의 광배 뒷면에 새긴 21행 391자의 불상 조성기는 이 불상이 법상종 사찰의 강당에 모시던 아미타불임을 밝히고 있어 금당주존(金堂主尊) 미륵보살과 함께 신라 법상종의 신앙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1,30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훼손된 부분이 거의 없으며, 표현이 사실적이고 관능적인 모습을 하고 있어 신라시대 8세기 초를 대표하는 불상 중 하나로, 그 가치가 높다. 형제 불상인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함께 1962년 12월 20일에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의 양식을 이어받은 작품으로 양산 미타암 석조아미타여래입상, 영주 영주동 석조여래입상 등이 있다.
3. 외부 링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 두산백과 :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 한국어 위키백과 :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 한국 미의 재발견 - 불교 조각 :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
- e뮤지엄 :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
-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
4. 국보 제82호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감산사는 신라 성덕왕 18년(719)에 김지성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 국왕과 왕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 창건 후 그는 어머니를 위해 미륵보살을, 아버지를 위해 아미타불을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는 두 불상을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호),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국보 제82호)으로 지정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석조아미타불입상은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인체 비례에 가까운 사실적 표현을 하고 있는 작품이다. 불상의 얼굴은 풍만하고 눈·코·입의 세부표현도 세련되어 신라적인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신체는 비교적 두꺼운 옷 속에 싸여 있어서 가슴의 두드러진 표현은 없지만, 당당하고 위엄이 넘쳐 부처님의 모습을 인간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온 몸에 걸쳐서 U자형의 옷주름을 나타내고 있다. 목에는 한번 뒤집힌 옷깃을 표현했는데 이는 신라 불상의 특징으로, 불상의 전체적인 형태와 함께 불상을 박진감있게 보이게 하는 요소가 된다.
불신 뒤의 광배(光背)는 배(舟) 모양이며 가장자리에는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새겼다. 광배 안에는 3줄의 선을 도드라지게 새겨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구별하고 있으며, 몸광배 안에는 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불상이 서 있는 대좌(臺座)는 맨 아래가 8각이고, 그 위에는 엎어 놓은 연꽃무늬와 활짝 핀 연꽃무늬를 간략하고 큼직하게 새기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이상적 사실주의 양식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일 뿐 아니라, 광배 뒤의 기록에 의해 만든 시기와 만든 사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불상으로 우리나라 불교 조각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석조아미타불입상은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인체 비례에 가까운 사실적 표현을 하고 있는 작품이다. 불상의 얼굴은 풍만하고 눈·코·입의 세부표현도 세련되어 신라적인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신체는 비교적 두꺼운 옷 속에 싸여 있어서 가슴의 두드러진 표현은 없지만, 당당하고 위엄이 넘쳐 부처님의 모습을 인간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온 몸에 걸쳐서 U자형의 옷주름을 나타내고 있다. 목에는 한번 뒤집힌 옷깃을 표현했는데 이는 신라 불상의 특징으로, 불상의 전체적인 형태와 함께 불상을 박진감있게 보이게 하는 요소가 된다.
불신 뒤의 광배(光背)는 배(舟) 모양이며 가장자리에는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새겼다. 광배 안에는 3줄의 선을 도드라지게 새겨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구별하고 있으며, 몸광배 안에는 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불상이 서 있는 대좌(臺座)는 맨 아래가 8각이고, 그 위에는 엎어 놓은 연꽃무늬와 활짝 핀 연꽃무늬를 간략하고 큼직하게 새기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이상적 사실주의 양식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일 뿐 아니라, 광배 뒤의 기록에 의해 만든 시기와 만든 사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불상으로 우리나라 불교 조각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