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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榮州 榮州洞 石造如來立像. 경상북도 영주시의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신라시대 폐사지에서 발견된 8세기 경의 석조 불상. 현재 영주시 도립 공공도서관 뜰(경상북도 영주시 중앙로 7(가흥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보물 제60호로 지정되어 있다.2. 내용
1952년, 영주초등학교 앞에 위치해 있을 당시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 사진 출처 : 영주시민신문 - 1952년 애곡(哀哭) 문화재…지금은 어디에
높이 2.39m.
1917년 영주시 가흥동 남산들에 제방공사를 하던 중 발굴한 신라시대의 석불로, 이후 학계의 연구 결과 이 주변이 신라시대에 조성된 사찰터임이 확인되었지만 고려말, 조선초 즈음에 폐사된 관계로 이 사찰의 정확한 이름은 알 수가 없다. 발굴 직후 한동안 영주초등학교 앞에 놔두었다가, 이후 지금의 영주 도서관 자리로 이동하였다.
불상의 전체적인 양식이 719년에 조성된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 제82호)과 유사한 형식을 하고 있지만, 보관 상태는 훨씬 더 안좋은 편이다. 매우 당황스러운 것은 이 파손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인데, 학계에서 이 석조불상을 연구한 결과 인위적으로 불상의 눈동자를 쪼아낸 자국이 발견되었고, 이후에도 불상 몸 전체에 일부러 파손을 한 흔적이 지속적으로 확인되었다. 이렇게 불상을 일부러 파손한 이유는 아직까지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일반적인 보살상은 상반신이 나형(裸形)이고 신체에 목걸이와 영락 장식을 가득 걸치는 것이 일반적인 데에 비해 이 영주동 석조여래입상은 불상처럼 법의를 입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왼쪽 겨드랑이로 내려뜨린 띠 매듭 표현은 경주 남산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87호)을 비롯하여 금동약사여래입상(보물 제328호) 등 신라 중대의 불상조각에서 주로 나타난다. 이는 영주동 석조여래입상이 불상의 법의를 입은 보살상으로 불(佛)과 보살의 외적 특징이 혼동된 채 만들어졌음을 알려준다. 또한 넓적한 사각형의 얼굴, 특히 두꺼운 입술의 표현은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보물 제221호), 영주 석교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116호) 등에서만 보이는 것으로, 신라시대 당시 경상북도 영주시 만의 독특한 지역적 특색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불상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선이 날카로우며,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해 주는 곡선이 분명하게 처리되어 있다. 이런 분명한 곡선처리는 이 작품이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 제82호)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임을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지금으로부터 1,300여년 전에 만들어진 한국의 석조 불상으로, 신라시대 당시 영주 지역의 불교문화와 석조공예술에 대하여 연구해볼 수 있는 자료이다. 1963년 1월 21일에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영주 영주동 석조여래입상
- 두산백과: 영주리 석불입상
- 한국어 위키백과: 영주 영주동 석조여래입상
-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 경북북부: 영주동 석불입상
- 향토문화전자대전: 영주 영주동 석조여래입상
4. 보물 제60호
광배와 상이 하나의 돌에 조각된 거의 완전한 형태의 보살상으로, 원래는 시내의 절터에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굵은 목에 넓고 둥근 어깨는 힘차고 당당한 모습이며, 이러한 경향은 굵은 팔, 다리 및 투박한 손발 등 신체의 각 부분에까지 공통적으로 드러나 전체적으로 박력있는 남성의 체구를 연상시킨다. 넓적한 사각형의 얼굴, 특히 두꺼운 입술의 표현은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보물 제221호), 영주 석교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116호) 등과 유사한 것으로 지역적인 공통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보살이 걸치고 있는 옷의 표현 중 특징적인 것은 왼쪽 겨드랑이에 표현된 매듭이다. 이 매듭에서 내려오는 옷자락은 지그재그형을 그리며 팔 위에 걸쳐있다. 이런 표현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금동약사여래입상(보물 제328호)에서 볼 수 있을 뿐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 않은 예이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는 선이 날카로우며,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해 주는 곡선이 분명하게 처리되어 있다. 이런 분명한 곡선처리는 이 작품이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 제82호)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임을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이 보살상은 건장한 체구와 강한 힘을 내재한 듯한 박력있는 작품으로, 표현이 세련되거나 화려한 느낌은 없지만 형식적인 모습은 아니다. 이러한 신체 특징과 광배의 형태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굵은 목에 넓고 둥근 어깨는 힘차고 당당한 모습이며, 이러한 경향은 굵은 팔, 다리 및 투박한 손발 등 신체의 각 부분에까지 공통적으로 드러나 전체적으로 박력있는 남성의 체구를 연상시킨다. 넓적한 사각형의 얼굴, 특히 두꺼운 입술의 표현은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보물 제221호), 영주 석교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116호) 등과 유사한 것으로 지역적인 공통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보살이 걸치고 있는 옷의 표현 중 특징적인 것은 왼쪽 겨드랑이에 표현된 매듭이다. 이 매듭에서 내려오는 옷자락은 지그재그형을 그리며 팔 위에 걸쳐있다. 이런 표현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금동약사여래입상(보물 제328호)에서 볼 수 있을 뿐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 않은 예이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는 선이 날카로우며,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해 주는 곡선이 분명하게 처리되어 있다. 이런 분명한 곡선처리는 이 작품이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 제82호)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임을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이 보살상은 건장한 체구와 강한 힘을 내재한 듯한 박력있는 작품으로, 표현이 세련되거나 화려한 느낌은 없지만 형식적인 모습은 아니다. 이러한 신체 특징과 광배의 형태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