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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74호 | |
청자 오리모양 연적 靑磁 鴨形 硯滴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
분류 | 유물 / 생활공예 / 토도자공예 / 청자 |
수량/면적 | 1개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제작시기 | 고려 시대(12세기) |
<colbgcolor=#315288> 청자 오리모양 연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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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靑磁 鴨形 硯滴. 청자 오리모양 연적은 고려 시대인 12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상형(象形) 고려청자 연적으로, 전체적으로 오리 모양이다. 그래서 오리 압(鴨) 자를 써서 청자압형연적(靑磁鴨形硯滴) 또는 청자압형수적(靑瓷鴨形水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연적은 서예를 할 때 쓰는 물을 담아두는 그릇으로 벼루와는 다른 용도다. 벼루는 먹물을 담기 위한 용도이지만 연적은 먹물을 만들기 위한 물을 담아두는 용도다.
청자 오리모양 연적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에게 팔려가기 전에 간송 전형필이 거액을 주고 사서 가까스로 지켜낸 유물이라, 유감스럽게도 본 연적의 출처나 제작시기와 같은 정보는 현재로썬 정확히 알 길이 없다.
고려시대에 고려청자로 만들어진 오리모양 연적은 본 연적 외에도 내려져 오는 것이 몇 점이 더 있다. 하지만 청자 오리모양 연적은 그 중에서도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제작 수준이 가장 뛰어나며 외형도 세련되어 아름답기로 손꼽힌다.
청자 오리모양 연적은 1962년에 국보 제74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2. 내용
2.1. 전형필의 손에 들어가기 까지[1]
앞서 개요의 설명에서 간송 전형필이 본 연적을 거액을 주고 구매하여 일본인에게 넘어갈 뻔한 것을 막았다고 했는데, 그 자세한 내막은 다음과 같다.청자 오리모양 연적은 개스비 컬렉션의 일부였는데, 개스비 컬렉션이란 영국 귀족 출신의 변호사 존 개스비(John Gadsby)가 일본 제국 시기 도쿄에 거주하면서 수집한 고려청자 수집품들을 일컫는다. 존 개스비는 일본 제국으로 25살때 이주해와서 변호사 일을 했다고 하는데, 그는 귀족 출신이니만큼 예술품을 보는 안목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도쿄에서 골동품 수집을 시작했고 처음에는 일본의 유물들을 사모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에 반하게 되었고 여러 경로를 통해 최상급 고려청자들을 하나 둘 사모으기 시작했다.
헌데, 도쿄의 골동품 시장에 풀려있던 고려청자나 일본인 수집가들로부터 구입한 고려청자들은 죄다 도굴로 불법적으로 유출된 것들이었다. 개스비 컬렉션의 유물들만 해도, 개스비 이전 소장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도굴로 유출된 유물들일 것이라는 정황이 드러난다. 국보 제65호로 지정된 청자 기린형뚜껑 향로는 경성 고등법원 검사 아유카이 후사노신의 소장품이었고, 국보 제66호로 지정된 청자 상감연지원앙문 정병의 경우 조선총독부 재판소 고등법원장인 요코다 고로가 개스비 이전의 소유주였다. 역시 국보 제270호로 지정되어 있는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의 이전 주인은 주 대한제국 일본공사 출신의 하야시 곤스케였다. 어쨌든 개스비 자신의 뛰어난 안목을 토대로 사모은 명품 유물들이니만큼 그의 고려청자 컬렉션은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일본 제국은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광기에 휩싸여 점차 미쳐돌아가게 되고, 1936년 일본 육군 장병들이 일으킨 군부 쿠데타 시도인 2.26 사건이 일어난 것을 보고 개스비는 사태가 심상치 않으며 곧 전쟁이 터질 것을 직감하고 일본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개스비는 일본을 떠나면서 가지고 있던 소장품을 다 처분하고 돌아가기로 마음 먹고는 1937년에 본인 소유의 유물들을 내놓기로 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예의 고려청자 컬렉션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형필은 개스비의 고려청자 컬렉션에 이미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고 있었기에, 개스비가 고려청자들을 다 처분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개스비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는 당시 돈으로 40만원이라는 엄청난 거액을 주고 개스비로부터 본 유물을 포함한 고려청자 20점을 인수한다.[2]
아마 전형필이 본 컬렉션을 사지 않았다면, 귀중한 고려청자 명품들은 다시 일본인들의 손에 넘어가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다. 또한 일본으로 넘어간 우리나라 문화재들의 현황을 고려해보면, 지금에 와서는 그 소재조차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3]
전형필이 구입한 20점의 고려청자들 가운데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총 9점으로, 그 목록은 아래와 같다.
- 국보 제65호 청자 기린형뚜껑 향로
- 국보 제66호 청자 상감연지원앙문 정병
- 국보 제74호 청자 오리모양 연적
- 국보 제270호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
- 보물 제238호 백자 박산형뚜껑 향로
- 보물 제286호 청자 상감포도동자문 매병
- 보물 제349호 청자 상감국화모란당초문 모자합
- 보물 제1954호 청자 음각환문 병
- 보물 제1955호 청자 양각도철문 정형 향로
2.2. 상세
청자 오리모양 연적은 높이 8cm, 너비 12.5cm의 연적으로, 명확하지는 않지만 제작 시기는 아마도 고려청자 제작 기술이 절정을 이루었던 12세기 무렵일 것으로 추정한다. 본 연적은 일반적으로 고려청자하면 떠오를 특유의 비색과 은은한 광택을 전체적으로 잘 보존하고 있으며, 형상화한 오리의 형체가 뚜렷하고 사실적이며 아주 정교하다.본 연적의 사용법은 오리의 등에 올라가 있는 연꽃잎에 뚫려 있는 구멍(주입구)으로 물을 넣어 오리의 뱃속에 물을 담아두며, 물을 따를 때는 오리를 기울여서 오리 주둥이 오른편에 작게 뚫린 배출구로 물을 따르는 방식이다. 오리의 등에 달린 주입구를 막기 위한 마개도 같이 전해지는데, 이는 반쯤 핀 연꽃 봉오리 모양을 하고 있다.
연적의 외형은 그야말로 오리 그 자체인데, 물 위를 헤엄치는 오리를 형상화 하고 있다. 실제 오리가 헤엄칠 때처럼 날개는 등에 딱 붙어 있고 두 발은 몸통 밑으로 감추었으며 앞가슴은 빼내밀어서 오리가 헤엄칠 때의 모습이 완연하다. 오리의 몸체는 오동통하여 볼륨감이 있고, 날개에 달린 깃털의 결 뿐만 아니라 꼬리죽지의 깃털까지도 섬세하게 음각으로 묘사했다. 등에는 연꽃잎과 줄기를 얹고 있는데, 줄기들 끝에는 몇 개의 연꽃봉오리가 붙어 있고 줄기는 서로 꼬여 있다. 오리의 머리는 왼쪽 상단을 향해 살짝 기울어져 있는데, 등에서부터 이어져온 꼬인 줄기 한가닥을 왼편 주둥이에 물고 있다.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오리 주둥이 오른편에는 배출구가 뚫려 있는데, 이 배출구에는 물을 따르기 위한 장식이 붙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장식이 붙어 있던 흔적은 남아 있지만[4] 안타깝게도 떨어져 나가서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청자 오리모양 연적 오른쪽 모습 |
고려시대에 본 연적을 연적의 용도로 실제로 사용했는지 아니면 장식과 감상 용도의 사치품이었을지 지금으로써는 알 수 없지만, 대단히 높은 제작 수준과 디자인 상의 세련됨을 보아서 최소한 고려 귀족 계층의 소유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청자 오리모양 연적은 약간의 손상을 제외하면 보존상태가 대단히 좋고, 그 높은 미적인 수준과 절정에 오른 고려의 청자 제작 수준을 보여주는 공예품으로서의 가치를 높게 인정 받아,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74호로 지정되었다.
3. 기타
30원 보통우표[7] |
- 청자 오리모양 연적은 1970년 2월 25일에 발행된 30원권 보통우표의 도안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4.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청자 오리모양 연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청자 오리모양 연적
- KBS 천상의 컬렉션: 개스비 컬렉션
- 간송미술문화재단: 청자압형연적
- 한국 미의 재발견 - 도자공예: 청자 오리모양 연적
- 두산백과: 청자압형수적
5. 국보 제74호
오리 모양으로 만든 고려시대의 청자 연적으로 높이 8㎝, 너비 12.5㎝의 크기이다.
물위에 뜬 오리가 연꽃줄기를 물고 있으며 연잎과 봉오리는 오리의 등에 자연스럽게 붙어있다. 오리의 등의 연잎으로 장식된 부분에는 구멍이 있어서 물을 넣도록 되어있고, 연꽃 봉오리 모양의 작은 마개를 꽂아서 덮고 있다. 물을 따르는 부리는 오리 주둥이 오른편에 붙어 있는데, 이 부리가 연줄기에 달린 봉오리 끝으로 통했으리라 짐작되지만, 지금은 그 부분이 부서져 있어 원형을 확실히 알 수 없다.
이 연적은 오리의 깃털까지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정교한 기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알맞은 크기와 세련된 조각기법, 그리고 비색(翡色)의 은은함을 통해 고려 귀족 사회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다.
물위에 뜬 오리가 연꽃줄기를 물고 있으며 연잎과 봉오리는 오리의 등에 자연스럽게 붙어있다. 오리의 등의 연잎으로 장식된 부분에는 구멍이 있어서 물을 넣도록 되어있고, 연꽃 봉오리 모양의 작은 마개를 꽂아서 덮고 있다. 물을 따르는 부리는 오리 주둥이 오른편에 붙어 있는데, 이 부리가 연줄기에 달린 봉오리 끝으로 통했으리라 짐작되지만, 지금은 그 부분이 부서져 있어 원형을 확실히 알 수 없다.
이 연적은 오리의 깃털까지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정교한 기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알맞은 크기와 세련된 조각기법, 그리고 비색(翡色)의 은은함을 통해 고려 귀족 사회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다.
[1] 본 단락은 전적으로 KBS 천상의 컬렉션 가운데 '개스비 컬렉션'의 내용을 주 텍스트로 삼아 작성되었다. 출처: KBS 천상의 컬렉션 - 개스비 컬렉션[2] 일제강점기 시기 돈으로 40만원은 기와집을 400채나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현재 대한민국의 원화로 환산하면 무려 약 1,200억원에 달한다고 한다.[3] 일본은 약탈문화재에 대한 공개를 극히 꺼리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공립 박물관이 소장한 약탈문화재에 대한 대외 공개도 꺼리는 판인데, 개인이 소장한 약탈문화재라면 더더욱 비밀스럽게 감추려 든다. 이로 인해 일본에 넘어가 있는 우리 문화재들에 대한 실정과 실태 파악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4] 장식은 아마도 연꽃 모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5] 陶窯址=요지 또는 가마터[6] 출처: 간송미술문화재단 - 청자압형연적, 한국 미의 재발견 도자공예 - 청자 오리모양 연적[7] 1970년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