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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80호 | |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 慶州 九黃洞 金製如來立像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용산동6가) |
분류 | 유물 / 불교조각 / 금속조 / 불상 |
수량/면적 | 1구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제작시기 | 통일신라시대 초기 |
1. 개요
慶州 九黃洞 金製如來立像.신라시대에 제작되어 692년(효소왕 원년)에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에 봉안되었던 황금 불상.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국보 제80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내용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과 함께.
높이 14㎝.
순황금으로 제작된 신라시대 금제 불상으로, 1942년 경주시 구황동의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해체, 수리하던 중 출토된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안에서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과 함께 발견되었다. 발굴 당시 사리 용기, 금동제 굽다리 접시, 은제 굽다리 접시, 유리구슬 등이 함께 들어 있었는데, 사리함 뚜껑 안쪽에 눌러 쓴 기록에 의하면 이 입상은 692년에,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은 10여년 뒤인 706년에 봉안한 것이다.
경주시 남산의 사제사(四祭寺)터 석조불입상과 같은 양식을 하고 있는 신라시대의 유물로, 대략 600년대 초반에 신라에서 제작된 것이다. 갸름한 얼굴에 신라의 미소로 유명한 웃음을 지으며 똑바로 앞을 보고 있고 가장자리에 투각(透刻)된 화염무늬와 빗줄기 등은 금 세공기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에는 수많은 금동불상 유물이 전해지고 있으나, 순금으로 만들어진 근현대 이전의 불상은 오직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과 본 불상 단 2점 뿐이다. 이는 금이 비싸서이기도 하지만, 기술적으로도 순금으로 불상을 조각하기가 매우 어렵고 까다롭기 때문이다.
순금은 두드리면 펴지고 휘면 굽어지는 성질이 있는 반면 불에 아주 강하다.[1]그래서 근현대 이전의 기술로는 다른 금속처럼 주물로 형상을 만드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때문에 순금으로 무언가를 만들려면 일일이 두드려서 만드는 단조 과정을 굉장히 오래도록 복잡하게 해야됐는데 거기다 불상 같은 경우 돋을 새김(부조)은 좀 쉬운편이나 두리새김(환조)는 안쪽에서 밖으로 두드릴 수 없어 제작이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특히 얼굴표정, 옷 주름 등을 두드려서 나타내기는 아주 곤란하여 순금불상을 만드는 것은 엄청난 고도의 기술력을 요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모든 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순금을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금동불상을 만든 후 금도금을 하는 형태로 불상을 만들었다.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과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 2023년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모습 |
100% 순황금으로 제작된 불상으로 신라시대 금세공기술 및 금속공예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또한 신라시대 불교 문화를 고찰하는 데에도 좋은 사료가 된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
- 두산백과 :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
- 미술백과 :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
- 한국어 위키백과 :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
- 미술백과 : 황복사 터 부처와 아미타불
4. 국보 제80호
경주구황리금제여래좌상(국보 제79호)과 함께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에 안치된 사리함 속에서 발견된 불상이다. 전체 높이 14㎝의 순금으로 만든 불상이며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모두 갖추고 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고, 갸름한 얼굴은 양감이 있고 자비롭다. 눈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콧날은 날카롭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있다.
약간 좁은 어깨에는 두껍게 표현된 옷을 걸치고 있는데, 앞면에는 U자형의 옷주름을 새기고 있다. 치마는 발목 부분에서 양쪽으로 약간 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삼국시대의 불상 양식이 아직 남아 있는 모습이다. 오른손은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은 옷자락을 잡고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는 머리 뒤에 원형으로 표현하였는데, 불꽃무늬에 둘러싸여 전체적으로 보주형(寶珠形)을 띤다. 원 안의 연꽃무늬를 중심으로 빛이 뻗어나가는 모양을 하고 있으며, 가장자리의 불꽃무늬는 섬세하게 뚫을새김하였다. 대좌는 따로 만들어 끼운 것으로 12각의 받침 위에 엎어 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새겼다.
머리와 신체의 적당한 비례, 옷주름의 형태 등을 볼 때, 삼국시대 후기의 불상에서 좀 더 발전한 통일신라 초기 새로운 양식의 불상으로 보인다. 사리함에 새겨진 글을 통해 692년에 탑을 건립할 때 넣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만든 연대가 거의 확실하여 통일신라시대 불상 연구에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고, 갸름한 얼굴은 양감이 있고 자비롭다. 눈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콧날은 날카롭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있다.
약간 좁은 어깨에는 두껍게 표현된 옷을 걸치고 있는데, 앞면에는 U자형의 옷주름을 새기고 있다. 치마는 발목 부분에서 양쪽으로 약간 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삼국시대의 불상 양식이 아직 남아 있는 모습이다. 오른손은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은 옷자락을 잡고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는 머리 뒤에 원형으로 표현하였는데, 불꽃무늬에 둘러싸여 전체적으로 보주형(寶珠形)을 띤다. 원 안의 연꽃무늬를 중심으로 빛이 뻗어나가는 모양을 하고 있으며, 가장자리의 불꽃무늬는 섬세하게 뚫을새김하였다. 대좌는 따로 만들어 끼운 것으로 12각의 받침 위에 엎어 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새겼다.
머리와 신체의 적당한 비례, 옷주름의 형태 등을 볼 때, 삼국시대 후기의 불상에서 좀 더 발전한 통일신라 초기 새로운 양식의 불상으로 보인다. 사리함에 새겨진 글을 통해 692년에 탑을 건립할 때 넣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만든 연대가 거의 확실하여 통일신라시대 불상 연구에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1]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때 성당 한복판의 황금십자가가 무사했던 이유도 불에 쉽게 녹지 않는 성질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