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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崔希亮 壬亂關聯 古文書. 조선 선조 31년인 1598년, 임진왜란 당시 흥양(興陽:지금의 전라남도 고흥군) 현감으로 있던 일옹(逸翁) 최희량(崔希亮)이 저술한 전쟁 관련 첩정 문서. 총 12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 국립나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대한민국 보물 제660호로 지정되어 있다.2. 내용
임란첩보서목(壬亂捷報書目)이라고도 부른다.임진왜란 당시 최희량이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전라도관찰사 등에게 보낸 첩정 문서이다. 조선 시대에는 군대나 행정기관에서 상하급자 사이에 오고가는 각종 행정문서의 종류와 양식을 엄격히 구별했는데, 관찰사·병사·수사 등 왕명을 받고 지방에 나간 주요 지휘관이나 행정책임자가 국왕에게 보고하는 문서는 ‘장계’, 중앙 행정부서나 주요 관원이 국왕에게 간단한 보고를 올리는 것은 ‘초기’, 중요 사안을 보고하는 것은 ‘계본’, 그보다 중요성이 떨어지지만 형식을 갖춰 보고하는 것은 ‘계목’이며, 동급 관원이나 기관 사이에 주고받는 문서는 ‘평관’,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하달하는 문서는 ‘관’ 등으로 규정했다.
그 중에서 군대에서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올리는 문서는 ‘첩정’(牒呈)이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첩정은 당시 군대의 운영 실태와 전투 실상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가 높은 자료다
최희량의 임란첩보서목은 전형적인 우리나라 1500년~1600년대의 첩정문서로 당시 한국의 군함에 탑재되었던 각종 무기와 장비의 수량에 대한 보고서 및 당시 판옥선의 무장 수준, 주요 탑재 화포의 종류와 수량, 탑재하는 포탄과 화살 등 발사체의 수량, 사용한 활의 종류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결재 표시(수결) 또한 수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한국 수군의 전황 및 군진상황, 그리고 당시 공문서의 형식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3. 외부 링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최희량 임란관련 고문서
- 두산백과 : 최희량임란첩보서목
- 국어국문학자료사전 : 최희량임란첩보서목
- [우리나라 병서(兵書)] 임란첩보서목(壬亂捷報書目) - 임진왜란 당시 水軍 전황 보고서
4. 보물 제660호
최희량 임란관련 고문서 - 첩보서목(崔希亮 壬亂關聯 古文書 - 捷報書目)은 선조 31년(1598) 임진왜란 당시 흥양(지금의 전라남도 고흥군)현감으로 있던 일옹 최희량(1560∼1651)이 당시 전라수군절도사 이순신 장군과 전라도 관찰사에게 왜적을 격파한 전과보고 문서이다.
최희량은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전관으로 활약하였고, 정유재란 때는 이순신의 부하로 있으면서 많은 전공을 세워 후에 원종공신에 올랐다.
원래는 따로 흩어져 있던 것을 공의 후손인 최기정이 서목의 뒤에 19절지로 배접하여 첩으로 만들었다. 이 첩책 표지에 최기정이 ‘최일옹파왜보첩원본’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각 문건마다에 백지 또는 붉은 종이를 표지로 붙여 내용분류를 쉽게 하였다.
이 문건의 내용은 현지에서 작성한 전과보고서로, 그 여백에 상관이 회답을 적어보내는 형태의 당시 공문서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또한, 왜적들과 싸워 크게 승전을 거둔 전말을 담고 있어 다른 기록에는 있지 않은 귀중한 사실이 이 서목을 통해 새로이 밝혀졌다.
이것은 당시 공문서의 양식을 살필 수 있는 매우 희귀한 자료로 평가된다.
최희량은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전관으로 활약하였고, 정유재란 때는 이순신의 부하로 있으면서 많은 전공을 세워 후에 원종공신에 올랐다.
원래는 따로 흩어져 있던 것을 공의 후손인 최기정이 서목의 뒤에 19절지로 배접하여 첩으로 만들었다. 이 첩책 표지에 최기정이 ‘최일옹파왜보첩원본’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각 문건마다에 백지 또는 붉은 종이를 표지로 붙여 내용분류를 쉽게 하였다.
이 문건의 내용은 현지에서 작성한 전과보고서로, 그 여백에 상관이 회답을 적어보내는 형태의 당시 공문서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또한, 왜적들과 싸워 크게 승전을 거둔 전말을 담고 있어 다른 기록에는 있지 않은 귀중한 사실이 이 서목을 통해 새로이 밝혀졌다.
이것은 당시 공문서의 양식을 살필 수 있는 매우 희귀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