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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瑞鳳塚 金冠. 서봉총에서 발견된 신라시대의 여성용 금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보물 제339호로 지정되어 있다.2. 내용
높이 30.7㎝, 지름 18.4㎝, 둘레 57cm 드리개 길이 24.7㎝. 무게 0.83kg1926년에 경주 노서동 제129호분 서봉총에서 당시 스웨덴 황태자였던 오스칼 프레드리크 빌헬름 올라프 구스타프 아돌프(Oscar Fredrik Wilhelm Olaf Gustaf Adolf)가 발굴한 신라시대 금관이다.
이때 다수의 부장품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그중 은제대합(銀製大盒)에 고구려의 연호인 연수 원년 신묘년 3월에 왕이 제작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이 금관도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추적해보면 서기 391년, 451년, 511년 중 하나인데 서봉총의 무덤 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은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반까지 축조되었으므로 511년은 너무 멀고 서기 391년이나 451년 중 하나라고 추정한다.
고분의 규모와 출토유물로 보아, 당시 신라의 왕비나 또는 왕비에 버금가는 최고 지배층의 여성이 사용했다고 추측한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재질을 조사한 결과 순도 80%의 금으로 확인되었다.
3. 서봉총 금관 모독 사건 (1935년)
한국 미의 재발견 - 고분미술 : 서봉총 금관과 왕(?)이 된 기생
기생이 서봉총 금관 모욕한 사건을 보도한 1936년 6월자 부산일보 기사 |
기사 속의 사진의 원본이다. 서봉총 금관과 각종 유물로 치장한 22살 평양 기성권번 출신의 기생 차릉파 |
사진속 서봉총 금관을 쓰고 있는 여성은 평양의 기생 차릉파(車綾波)(1915~?)이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금관과 서봉총 금제 허리띠와 서봉총 금제 드리개, 서봉총 금제 목걸이를 차고 있고 사진에서는 자세히 보이지 않지만 서봉총 금귀걸이와 서봉총 금팔찌, 서봉총 금반지까지 착용했다고 한다. 사실상 서봉총에서 출토된 유물 전부가 기생의 악세사리로 되었다. 당시 차릉파가 착용한 순금 유물들의 무게만 해도 2관 800돈(10.5kg)에 달했다. 차릉파는 이 사건 이후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얻어 1940년 모던 일본 조선판 잡지에서 당대 식민지 조선에서 두번째 가는 재산을 가진 기생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신라 금관으로 협박하며 사기꾼들에게 돈을 뜯겼다는 내용도 이후 기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이효석의 소설 '은은한 빛'에서도 언급된다.
서봉총 금관을 쓰고 있는 평양기생의 모습을 보도한 기사.사진 출처 : 매일경제 뉴스 - 일제는 왜 나흘만에 서둘러 신라왕릉 발굴했나
어깨높이에서 찍은 다른 사진 |
차릉파를 치장하는데 사용된 서봉총 유물들 사진이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대로 금관과 금관과 연결된 드리개, 금제 허리띠, 금제팔찌, 그리고 목걸이와 반지이다.[1] |
2019년 9월 선을 넘는 녀석들에서 설민석이 이 에피소드를 소개하기도 했다. 다만 언론에는 서봉총 금관이 아닌 천마총 금관을 씌운 것으로 잘못 보도되어 나갔다.[7] 해럴드 : '선을 넘는 녀석들' 설민석 "일제, 천마총 금관을 기생에 씌웠다"… 선녀들 분노 폭발, 내외뉴스, 이코노미
4. 외부 링크
5. 보물 제339호
서봉총금관(瑞鳳塚金冠)은 경주 노서동 신라 무덤인 서봉총에서 출토된 높이 30.7㎝, 지름 18.4㎝, 드리개(수식) 길이 24.7㎝인 금관이다.
넓은 관 테 위에 5개의 가지를 세웠고, 상하에 점선으로 물결무늬를 찍고 나뭇잎 모양의 원판과 굽은 옥으로 장식했다. 관 테에 못으로 고정시켜서 세운 5개의 가지 중 중앙과 그 좌우의 3가지는 山자형 장식을 3단으로 연결하고, 가지 끝은 꽃봉오리 모양으로 마무리 했다. 이 가지 주위에는 2줄씩 점선을 찍어 금판이 휘지 않도록 했고, 나뭇잎 모양의 원판과 굽은 옥을 달았다. 山자형 장식의 좌우에는 끝이 꽃봉오리 모양으로 마무리 된 사슴뿔 장식을 세웠고, 이 곳에도 원판과 옥으로 장식했다.
내부의 골격은 2개의 금판대를 전후·좌우에서 관 테에 연결하여 반원을 그리면서 교차시켰고, 그 위에 3가닥이 난 나뭇가지를 붙이고 가지 끝에 새 모양 장식판을 하나씩 부착시켰다. 관 테 좌·우에 길게 굵은고리(태환식) 귀고리 드리개를 달아 늘어뜨렸다. 이러한 독특한 내부 장식은 서봉총 금관이 유일하다.
넓은 관 테 위에 5개의 가지를 세웠고, 상하에 점선으로 물결무늬를 찍고 나뭇잎 모양의 원판과 굽은 옥으로 장식했다. 관 테에 못으로 고정시켜서 세운 5개의 가지 중 중앙과 그 좌우의 3가지는 山자형 장식을 3단으로 연결하고, 가지 끝은 꽃봉오리 모양으로 마무리 했다. 이 가지 주위에는 2줄씩 점선을 찍어 금판이 휘지 않도록 했고, 나뭇잎 모양의 원판과 굽은 옥을 달았다. 山자형 장식의 좌우에는 끝이 꽃봉오리 모양으로 마무리 된 사슴뿔 장식을 세웠고, 이 곳에도 원판과 옥으로 장식했다.
내부의 골격은 2개의 금판대를 전후·좌우에서 관 테에 연결하여 반원을 그리면서 교차시켰고, 그 위에 3가닥이 난 나뭇가지를 붙이고 가지 끝에 새 모양 장식판을 하나씩 부착시켰다. 관 테 좌·우에 길게 굵은고리(태환식) 귀고리 드리개를 달아 늘어뜨렸다. 이러한 독특한 내부 장식은 서봉총 금관이 유일하다.
[1] 여기에 나온 유물들 모두 총동원되었다. 사진속 허리띠는 연결하기 전의 모습이다. 차릉파 사진 속에서는 금관과 드리개, 허리띠, 목걸이를 확인할수 있고 사진에 보이지는 않지만 사진 속 출토된 팔찌 2개와 반지5개도 모두 차릉파에 팔과 손에 끼워졌다. 이외에도 사진에는 없지만 서봉총 금귀걸이도 치장하는데 사용됐다.[2] 조선총독부에서 1933년에 개설한 박물관이다. 모란봉 을밀대 가는길에 있었다. 6.25전쟁때 파괴되고 조선중앙력사박물관으로 계승되었다.[3] 부산일보 기사는 전시회가 끝나고 야유회가 열렸고 반환 하루전에 사진이 찍혔다고 되어있지만, 조선일보에서는 전시회 5일전에 야유회가 열렸고 그 다음날 사진이 찍혔다고 되어있다. 몇개월 흐른 뒤에 기사였으니 오류가 있었을수도 있고 실제로 전시회 전과 후에 사진촬영을 했을 수도 있다.[4] 9개월 뒤 조선일보는 이러한 차릉파가 배운 것이 없이 자란 여자라 이러한 국보급 유물에 모욕적인 행위도 호기심을 가지고 좋아했다고 비판했다.[5] 당시 이 작업을 함께 했던 일본인들은 차릉파를 신라 여왕이나 왕후처럼 대하며 조롱 했다고 전해진다. 작업을 함께했던 일본인이 금관을 쓴 기생 차릉파에게, "왕후 공주가 되었으니 너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말했고, "이 금관도 경주 기생집 근방에서 발견되었는데 지금도 기생의 머리 위에 있으니 금관과 기생이 어떤 인연이 있나 보다"라고 고이즈미가 말하였고 "옛사람의 것을 쓰고 사진을 찍으니 불길하다"며 거기 있던 사람 모두 일제히 웃었다,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고 935년 신라의 멸망에 정확히 1000년이 되는 해다 보니 우스갯소리로 1000년만에 부활한 57대 신라 여왕이라는 말도 돌았다.[6] 금관의 둘레가 57cm라 여성의 평균머리 둘레인 55~56cm에 비해 널널한 편이라 쓰는 것 머리 둘레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천년이 넘었던 금관을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억지로 기생의 머리에 씌우려고 해서 망가질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차릉파의 머리 크기에 딱 맞추어 떨어지지 않도록 깊게 씌우는 과정에서 손상이 발생했다.[7] 참고로 천마총 금관은 일제강점기가 훨씬 지난 1973년에 발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