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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시의 박물관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e40001,#222222><tablebgcolor=#e40001,#222222> | 조선중앙력사박물관 朝鮮中央歷史博物館 Korean Central History Museum |
▲ 조선중앙력사박물관의 모습 | |
<colbgcolor=#e40001,#222222><colcolor=white> 설립 | 1945년 12월 1일 |
주소 | 조선중앙력사박물관 (평양시 중구역 경림동) |
사진의 왼쪽(강변)에 위치한 건물. 그 맞은편 건물은 조선미술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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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박물관. 평양시 중구역 경림동, 김일성광장에 있다.1945년 12월 1일에 개관했다.
2. 특징
유홍준이 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4권(평양의 날은 개었습니다)[1]에 따르면, 조선중앙력사박물관의 전신은 1935년 모란봉 을밀대 가는 길에 세워진 일제강점기의 평양부립박물관(平壤府立博物館)으로[2]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1일에 평양박물관으로 재개관한 뒤, 6.25 전쟁 당시 유엔군이 북진하면서 엄청난 폭격을 맞아 건물 두채 남기고 평양이 그야말로 석기시대 수준으로 박살(...)이 난 뒤에 시가지를소장 유물의 질과 양은 남한의 주요 박물관에 비해서도 매우 초라한 수준이라고 한다. 원래 이 박물관에 있었던 유물은 고구려 와당 등의 유물과, 낙랑 채화칠협 등 낙랑 시대 유물, 평양 등지 에서 나온 여러 출토품 및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도가 다였고, 1945년 12월 1일 개관 당시 소장 유물의 수는 2천 점 정도였다. 이는 원래 이 박물관이 평양부립, 즉 요즘말로 지역 시립박물관 정도에 그치는 작은 박물관이었기 때문이다. 해방과 남북분단까지 한반도의 주요 유물은 거의 경성부의 조선총독부 박물관과 이왕가 미술관에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평양 이외에 일제강점기부터 박물관이 있었던 또 다른 역사도시인 개성은 해방 직후에는 38선에서 살짝 남쪽에 있어 남한 관할이었다. 그외에도 경주, 부여, 공주와 같은 다른 고도들 역시 죄다 남한 소속이었다. 따라서 38선은 정확히 한반도의 허리를 관통했으나 한반도 역사의 무게중심이 남부 지역에 많이 쏠렸기 때문에 북한이 가져갈 수 있었던 유물의 양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유홍준에 따르면, 해방 직후 초대 국립박물관장이 된 김재원 관장이 38선 이남 남한령(송악산 북쪽 언저리 아래까지 남한.)인 개성부립박물관을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국립박물관 개성분관으로 승격시켰지만 전전부터 계속 38선에서 국지전이 벌어지자 개성분관의 안위가 불안해져서, 1949년 5월 18일 김재원 관장은 개성분관에서 전시하고 있던 유물 대부분, 특히 고려청자 명품들을 모두 서울 본관으로 옮겨버렸다. 이후 정말로 6.25 전쟁이 터지고, 전후에는 개성분관을 비롯한 개성 시가지가 북한령에 넘어가기는 했지만, 적조사 철불, 흥국사지 탑 등 부동산 문화재만 남았지 대부분의 문화재들은 죄다 후방으로 내려가서 이미 알맹이는 없다시피 하여 결국 평양에 남은 2천 점이 북한 문화재의 핵심이 되었다고. 서울과 부여, 공주 등에 있던 문화재도 전쟁이 일어나자 낙동강 전선 안쪽 부산으로 모두 내려보내 북한이 손에 넣을 수 없었다.[3] 즉 중국이 국공내전 직후 분단될 때 중화민국 정권이 대륙의 주요 유물을 대만으로 피신시킨 것과 비슷한 일이 한국이 분단될 때도 있었던 것이다.
1995년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그나마 유홍준이 북한을 답사한 1997년에는 북한 정권 수립 이후 북부 지방 각지의 새로운 유물들이 모여 13만 점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덕분에 북한은 단순히 실물 문화재를 주욱 전시해놓는 고전적인 형태를 벗어나 남한보다 상당히 일찍 레플리카(정밀복제품)를 박물관에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되었다.[4] 13만점이라는 것은 이 레플리카까지 포함시킨 수량. 2022년 현재는 어느 정도일지 불명.
비록 복제품이 다수이긴 하지만 이렇게 관람객이 한국사를 공부할 수 있도록 여러 조치를 했고, 북한정권 특성상 애국주의 배양을 위해 학생들이 박물관을 찾도록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비중있는 기관으로 받들었다고 한다. 이 박물관이 조선미술박물관, 민속박물관과 함께 평양의 명실상부한 중심인 김일성광장에 있다는 것으로도 북한 도시계획상 박물관을 얼마나 중요한 위상으로 두고 배치했는지 알 수 있다. 서울로 치면 국립중앙박물관이 광화문광장에 있는 셈.
비록 북한 박물관의 소장 유물이 남한에 비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절차에 따라 유물을 확보하고 소장하였다. 그 결과 소장유물이 2010년 기준(『북한의 박물관』, 장경희) 약 15만 점으로 북한의 국립박물관치고는 유물이 많고, 가장 늦은 소속박물관인 평성 력사박물관의 소장 유물도 1만 점이 넘는다. 나머지 지방소속박물관도 유물 3천~6천여 점을 소장했으므로 숫자가 결코 적지 않다. 참고로 조선중앙력사박물관도 남한의 국립중앙박물관처럼 '중앙'이라는 말이 산하에 소속박물관들을 두는 것을 의미하며, 청진력사박물관, 함흥력사박물관, 강계력사박물관, 원산력사박물관, 신의주력사박물관, 향산력사박물관, 평성력사박물관, 사리원력사박물관, 해주력사박물관, 개성고려박물관[5], 그리고 계획 중인 혜산력사박물관이 있다. 사족으로 우리나라의 국립민속박물관과 비슷한 조선민속박물관도 있다.
한국 전쟁 때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해 인민군이 쫓겨가고 평양이 한미연합군에게 점령되자 평양박물관 건물은 어느 미군부대가 접수했는데, 박물관 건물 지하실에 권총사격장을 만들고 사격 연습을 하던 한 미군 병사가 표적으로 쓰던 시멘트 벽이 허술한 것을 알아챘고, 벽을 조사하다가 벽이 이중벽으로 되었고 그 안에 평양박물관에서 소장했던 유물들이 숨겼음이 드러났다. 인민군이 평양에서 퇴각하기 전 숨겨놓은 것으로 유물 가운데는 채협총(1931년 발굴조사)에서 나온 낙랑 시대의 채협칠기 유물도 있었는데, 당시 학자들이 이 유물들을 수습해 서울로 옮기려고 했지만 당시에는 국군이 압록강에 도달하는 등 곧 북진통일이 성사될 것 같은 낙관적 분위기여서 서두르지 않던 사이 중국군이 참전하고 1.4 후퇴가 벌어져 부랴부랴 후퇴하는 바람에 그대로 놓고가서 실현되지는 못했다고.[6] 만약 개성에서와 같이 평양박물관의 유물도 남한으로 가져오는데 성공했다면 북한에는 진짜로 문화재가 거의 전무했을 것이다.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이나 북한의 박물관 및 문화재 현황에 대해 조금 더 자료를 찾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2008년에 도서출판 예맥에서 나온 <평양 조선중앙력사박물관(아름다운 우리문화재 2)>을 읽어보는 것을 권한다. 한국에서는 거의 유일한 조선중앙력사박물관 소장 유물에 대한 도록이다. 다만 2020년 현재 시점에서는 품절 도서로 분류되어 있다. #
3. 구성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서 보관 중인 안학궁의 치미. (높이 210cm) 평양 안학궁 출토. 출처[7]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서 보관 중인 ‘해모양 뚫음무늬 금동장식’(삼족오 금동장식). 평양 진파리 출토. 출처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서 보관 중인 평양 청암리토성 출토 '불꽃 뚫음무늬 금동관'(고구려 금관) 출처
박물관 내부는 모두 19호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음과 같다.국가지식포털 북한지역정보넷
- 1호실 - 김일성이 평양의 주요 사적을 돌아보고 찍은 기념사진들 전시(...)
박물관에다 무슨 짓을.. - 2, 3호실 - 선사시대관. 평양 상원 검은모루동굴 유적지에서 발굴된 구석기시대 유물과 현생인류의 진화 단계를 보여주는 유물, 관련 화석[8]
- 4~5호실 - 고조선, 부여, 진국 및 한민족 고대 국가 관련 유물 전시
- 6~9호실 - 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 시대로 취급하는 고구려 자료관. 유일하게 남한지역의 소장유물보다 급이 높다.
- 10호실 - 주로 남쪽, 무령왕릉이나 석굴암 같은 백제, 신라, 가야 유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
지만 대부분 복제품이다. - 11호실 - 발해 자료관
- 12~14호실 - 고려시대관
- 15~17호실 - 조선시대관
- 18~19호실 - 근현대관. 일제강점기 의병 및 항일 투쟁을 다루고는 있지만 그것도 김일성 및 그 일가의 활동에 대해서 몰아주기 식 전시나 설명이 많아서 상당히 껄끄럽다.[9]
햇볕정책이 시행돼 남북교류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던 2006년 까지 조선중앙력사박물관 유물 가운데 일부가 6월 13일부터 8월 16일까지 '북녘의 문화유산-평양에서 온 국보들'이라는 표제로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대여 전시되었다.[10] 8월 28일부터 10월 26일까지는 대구에서도 국립대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전시가 이루어졌다. 특히 서울 전시 당시 고려 태조 왕건의 청동상이 함께 전시되었는데, 전시 4년 전인 2002년에 방영된 사극 태조 왕건에서 주인공 왕건 역할을 맡았던 최수종이 개관 전날 특별초청되어 왕건의 청동상을 관람했고, "혼신을 다해 연기했던 분을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은 생각을 가져왔는데 서울의 한복판에서 북한의 최고문화유산을 보게 돼 영광이다. 이번 기회로 통일에 한 발짝 더 다가간 느낌이다"라고 소감을 밝히기도.조이뉴스24 보도
박물관의 입지는 김일성광장의 한복판으로 일단은 좋은 편이다.[11] 북한 정부에서 역사교육의 학습장, 문화유산을 통한 애국주의 배양의 장으로써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당장 제1관에 김일성이 유적지를 찾아가 찍은 기념 사진을 전시해 놓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키백과에 따르면 북한의 경제난 악화에 따라 관람객이 없을 때는 전기를 꺼놓고 있다고 하는데 이게 문제가 큰 것이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 가운데 실제 진품도 만만치 않은데[12] 시대가 오래된 유물인 이상 내부에서 습도나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 관리되지 못하면 유물 자체가 자칫 손상될 수도 있기 때문.[13][14]
4. 통일 이후의 전망
전술했듯 평양 최대의 박물관이라는 대표성, 역사성은 물론이거니와 그 부지도 평양의 한복판인 김일성광장에 위치해 있는 등 상당히 접근성이 괜찮은 편이라서, 건물을 최신식 장비와 수장고 시설로 완비하고[15] 이름을 '국립평양박물관' 또는 '평양시립박물관'으로 바꾸는 식으로 고스란히 유지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1] 과거에는 나의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 상권이었다.[2] 해방 직후 우리나라의 박물관 사정은 우선 서울(경성부)에 조선총독부 박물관과 이왕가 미술관이 있었고 나중에 이 두 곳이 국립박물관으로 합쳐지며, 서울 이외에는 옛 수도로서 유물이 많은 경주와 부여에 국립박물관의 분관이 있었다. 그리고 공주에 공주고적현창회 진열실, 개성과 평양에 각각 부립박물관이 있었다.[3] 부산은 6.25 와중에조차 북한이 끝내 한 번도 손을 대지 못했기 때문. 그러나 이때 부산에 피신시킨 유물 중 조선 궁중유물 상당수가 부산 용두산 대화재 때 소실되었다.[4] 유홍준에 따르면 아예 북한은 문화보존총국(우리나라의 문화재청) 산하에 문화유물창작사가 독립기관으로 존재하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왠지 창작이라는 말이 신경쓰이는 것은 기분 탓이겠지 물론 그 복제품이라는 것도 호모 에렉투스 시절의 검은모루동굴 풍경 상상도라던가 고인돌 끌고 가는 청동기인 모형이라던가, 대성산성 배치도나 안학궁 모형도, 안악 3호분 실물대(말 그대로 실물 크기로 박물관 안에 재현되어 있다!) 복원, 발해 상경용천부 석등 모조품이나 남한에 있는 다보탑 같은 것들. 남한의 박물관에서도 으레 전시되어 있는 상상모형(디오라마)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5] 개성 성균관 전각을 박물관으로 사용중이다.[6] 경향신문 1975년 6월 21일자 기사.[7] 참고로 남한의 국립중앙박물관에 레플리카가 전시되어있다.[8] 박물관에 전시된 리플리카 가운데 상원검은모루 동굴에 살았을 호모 에렉투스의 모습을 그린 상상도가 있는데, 유홍준은 똑바로 서지 못해 꾸부정하게 걸으면서 두개골은 작고 몸에는 털이 많고 입술은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호모 에렉투스의 모습 그대로라고 평했다. (외국에서도 박물관에 원시인의 상상도를 설치할 때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를 혼동해 그냥 털 없는 원숭이를 그려 놓은 경우가 많다고.) 영남대학교 이청규 교수(당시 고고학, 현재는 문화인류학)도 영남대 박물관 대학에서 강의할 때 이 상상도를 보여주면서 "호모 에렉투스를 비교적 정확히 그렸다"고 평가했다고.(출처: 유홍준 나의 북한문화유산 답사기/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4권)[9] 일본어 위키백과 설명으로는 고려가 원나라에 복속된 것,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한 것이나 근현대 운요호 사건에 대해서는 전시가 안 되어 있다고.[10] 이때 유물들은 평양에서 원산을 거쳐 금강산을 통해 남쪽으로 전달되었다.미국의소리[11] 일본의 고고학자인 도쿄대 사이토 다다시 교수는 평양을 방문하고 쓴 북조선 고고학의 신발견(1996년)에서 "평양시의 중심지인 김일성광장의 양 측에 조선중앙력사박물관과 조선미술박물관이 마주하고 있다는 것은 이 나라가 박물관과 미술관을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는가를 무언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이런 자리설정은 세계의 박물관에서도 유례가 드물다"고 평가했다. 유홍준도 평양을 방문하기 전까지 방송에 나오던 김일성광장의 양 옆 건물이 로동당 당사나 의사장 정도인 줄 짐작했었다고. (출처: 유홍준, 나의 북한문화유산답사기)[12] 대표적인 것이 상원 검은모루동굴에서 나온 뗀석기와 동굴하이에나, 짧은턱하이에나 같은 화석들을 비롯 신의주에서 발굴된 청동기 시대의 미송리식 토기.[13] 박물관에서는 유물 보존을 위해 내부에 자체적으로 온도와 습도 조절(그리고 충해蟲害 방지)을 적절히 해 주어야 한다.[14] 우리나라에서도 대구에 있는 화폐박물관의 경우 관람객이 없을 때 불을 꺼놓고는 있기도 하지만 유물 보존을 위한 일부 동력은 상시 돌리고 있기에, 북한의 경우 유물을 보존 관리할 박물관 내 자체적 동력을 남겨놓기는 하는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고, 실제로도 돌리지 않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15] 북한의 지방 국립박물관들 중 정말 열악한 박물관이 대다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