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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물 제846호 | |
창경궁 풍기대 昌慶宮 風旗臺 | |
소재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창경궁) |
분류 | 유물 / 과학기술 / 계측교역기술용구 / 도량형 |
수량 | 1기 |
지정연도 | 1985년 8월 9일 |
제작시기 | 조선 시대 후기 |
<colbgcolor=#bf1400> 풍기대[1] |
[clearfix]
1. 개요
<colbgcolor=#bf1400> YTN SCIENCE에서 제작한 풍기대 영상 |
昌慶宮 風旗臺
창경궁의 풍기대이다.
2. 내용
2.1. 용도
농업에 있어 날씨는 매우 중요한 변수이다. 그러므로 농경국가 조선에서 날씨를 관찰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으며 바람 관측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편서풍이 불면 좋은 날씨이고, 반대로 동풍이 불면 날씨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바람 측정을 좀 더 과학적으로 하려고 만든 기구가 바로 풍기대이다.#2.2. 이름
풍기(風旗)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측정하기 위해 사용한 깃발이며 풍기대(風旗臺)는 풍기를 세웠던 받침대이다. 현재의 풍향계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풍자는 당연히 바람 풍자 이다.조선시대에는 깃발을 '상풍기(相風旗)', '풍기죽(風旗竹)'이라 불렀으며, 깃발과 받침대 전체를 통틀어서는 '상풍간(相風竿)', '풍기(風旗)', 혹은 줄여서 '간(竿)' 등으로 일컬었다. 받침대를 따로 부르는 말은 없었다. '풍기대(風旗臺)' 명칭은 1917년에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가 발행한 《조선고대관측기록조사보고》에서 처음 등장했다.
2.3. 구조
}}} ||- 소반 모양을 조각한 대 위에 구름무늬를 새긴 팔각형 기둥을 올린 형태이다. 기둥 최상단부 중앙에는 깃대를 꽂을 수 있는 구멍이 있고, 거기서 살짝 옆으로 33cm 아랫부분에 배수 구멍이 뚫려 있다. 깃대를 둘 구멍 사이로 들어간 빗물이 빠져나올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 깃대의 길이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남아있는 자료가 없다. 깃대 끝에 깃발을 달았으며 깃발은 세로 폭이 좁고 가로 폭이 길다. 깃발이 날리는 방향으로 풍향을, 흩날리는 정도로 풍속을 측정할 수 있었다.#
3. 외부 링크
4. 보물 제846호
풍기대란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추정하는 깃발을 세운 대이다.
이 풍기대는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높이 228㎝로 아래에 상을 조각한 대를 놓고 그 위에 구름무늬를 양각한 8각기둥을 세운 모양이다. 8각 기둥 맨 위의 중앙에는 깃대 꽂는 구멍이 있고, 그 아래 기둥 옆으로 배수 구멍이 뚫려 있다. 깃대의 길이는 확실하지 않으며 깃대 끝에 좁고 긴 깃발을 매어 그것이 날리는 방향으로 풍향을 재고, 나부끼는 정도로 바람의 세기를 잴 수 있었다. 풍향은 24방향으로 표시하고 풍속은 그 강도에 따라 8단계 정도로 분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풍향의 측정은 농업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관측 자료로 세종 때부터는 제도화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강우량을 측정하는 수표의 경우와 같이 처음에는 풍기대를 절의 당간 지주처럼 만들었으리라 추측된다.
풍기대는 지금은 없어지고 그림으로만 남아 있는 조선시대 관측기의 실증적 유물로, 기상관측기의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이 풍기대는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높이 228㎝로 아래에 상을 조각한 대를 놓고 그 위에 구름무늬를 양각한 8각기둥을 세운 모양이다. 8각 기둥 맨 위의 중앙에는 깃대 꽂는 구멍이 있고, 그 아래 기둥 옆으로 배수 구멍이 뚫려 있다. 깃대의 길이는 확실하지 않으며 깃대 끝에 좁고 긴 깃발을 매어 그것이 날리는 방향으로 풍향을 재고, 나부끼는 정도로 바람의 세기를 잴 수 있었다. 풍향은 24방향으로 표시하고 풍속은 그 강도에 따라 8단계 정도로 분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풍향의 측정은 농업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관측 자료로 세종 때부터는 제도화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강우량을 측정하는 수표의 경우와 같이 처음에는 풍기대를 절의 당간 지주처럼 만들었으리라 추측된다.
풍기대는 지금은 없어지고 그림으로만 남아 있는 조선시대 관측기의 실증적 유물로, 기상관측기의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