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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시가 붙은 건물은 현재 창덕궁 영역이다. | |||||||||||||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대한민국 사적 제123호 창경궁 | ||
<colbgcolor=#bf1400> 창경궁 통화전 昌慶宮 通和殿 | ||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 |
건축시기 | 창건연대 미상 1908년 이후 (철훼) |
<colbgcolor=#bf1400> 통화전 터 추정지 |
창경원의 휴게소로 사용되던 통화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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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창경궁의 건물이다. 현재는 없다. 명정전의 북쪽, 영춘헌의 동쪽에 있었다.2. 이름
'통화(通和)'란 '통(通)하여 화합(和)한다'는 뜻이다.3. 역사
언제 지었는지 모른다. 가장 많은 기록이 보이는 때는 순조 시기이다. 1815년(순조 15년)에는 순조의 친할머니 혜경궁 홍씨의 혼궁으로, 1821년(순조 21년)에는 정조의 왕비 효의왕후의 혼전으로 사용했다.# 1830년(순조 30년)에는 효명세자의 혼궁으로 쓰는 등 국상 때 주로 이용했다.위키백과에 따르면, 1833년(순조 33년) 창경궁 대화재 때 불탄 후 중건하지 않았다고 하나, 1907년(융희 원년) ~ 1908년(융희 2년)에 제작한 《동궐도형》에도 모습이 보이므로, 화재를 입지 않았거나 입었어도 다시 지은것을 알수있으나 사진에서 보다시피 지붕의 모습이 팔작지붕에서 맞배지붕으로 바뀌었고 창경원 시절엔 벽체와 주변 행각이 모두 사라지고 휴게소로 이용되다가 문화재라는 인식이 없던 1970년대에 헐리고 만다. 창경궁의 장기 복원계획에 포함되었지만 언제 복원될지는 미지수이다.
4. 구조
※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옛 기록과 그림들로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아래 적은 건물의 특징은 《궁궐지》와 1828년 ~ 1830년에 그린 《동궐도》, 1908년에 그린 《동궐도형》, 1830년 ~ 1908년 사이에 그린# 《통화전 도형》, 1950년대의 창경원 휴게실로 사용되던 시절의 사진을 참고하여 적은 것이다.}}} ||
- 《궁궐지》에 따르면, 정면 3칸, 측면 4칸, 총 12칸이었다. 《동궐도》를 보면, 정면 가운데 칸 앞으로 장대석 2단을 깔았으며 그 가운데에 다시 장대석 2단을 놓아 어도(御道)를 만들고, 어도의 중간부터 건물 앞까지 복도를 설치했다. 복도 측면마다 벽을 두었으나 건물과 맞닿은 칸의 측면은 외부와 통해있었다. 《동궐도형》에는 복도가 보이지 않는다.
- 《동궐도형》에 따르면, 실내는 전부 마루방이다. 전면과 후면의 3칸은 툇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