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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시가 붙은 건물은 현재 창덕궁 영역이다. | |||||||||||||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대한민국 사적 제123호 창경궁 | ||
<colbgcolor=#bf1400> 창경궁 선인문 昌慶宮 宣仁門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 |
건축시기 | 1483년 (창건) 1616년 (중건) 1877년 (중건) |
<colbgcolor=#bf1400> 선인문[1] |
창경궁 안쪽에서 바라본 선인문[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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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창경궁의 출입문이다. 정문 홍화문의 남쪽에 있다.2. 역사
<colbgcolor=#bf1400> 〈동궐도〉 선인문 |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광해군 때 재건했다. 1857년(철종 8년)에 화재를 입었고 1877년(고종 14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3. 용도
왕세자와 신하들이 주로 사용했다. 위치 상으로 궐내각사 및 동궁 권역과 가깝기 때문이다. 또한 남아있는 기록에도 그렇게 적혀있다. 《한경지략》에서는 ‘신하들이 드나든다’고 소개했다. 《동국여지비고》 - 〈경도〉 편에는 ‘동궁의 정문으로 신하들이 출입한다’고 쓰여있다. 또한 세자가 궁 밖을 드나들 때, 특히 성균관 입학할 때 이용한 내용이 《승정원일기》 등에 적혀있다.#단, 고종이 재위 기간에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예외도 있었던 듯 하다.#
4. 구조
- 《동궐도》와 현재의 모습이 다르다. 지붕은 현재는 평지붕이지만, 《동궐도》에는 창경궁 동북쪽 출입문인 월근문처럼 왼쪽 칸 지붕이 낮고 오른쪽 칸 지붕이[A] 높은 솟을지붕 형태였다. 그리고 문 북쪽으로 현재는 돌담이 붙어있지만, 《동궐도》에서는 행각이 붙어있는 모습이다. 아마 철종 때 불탄 것을 고종 때 재건하면서 바꾼 듯 하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기와를 얹어 마감했다. 지붕 양 끄트머리에는 용두를 올렸다.
- 문짝과 벽체는 전부 붉은 칠을 한 나무판이다. 천장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만들었고, 문틀 위에는 궁판을 놓고 그 위에 홍살을 올렸다. 왼쪽 칸 궁판은 7개로 세로 길이가 길며, 오른쪽 칸 궁판은 8개로 세로 길이가 짧다.[A] 양쪽 문짝의 높이가 다른데, 오른쪽 칸의 높이가 더 높다.[A]
5. 여담
- 유독 왕실에서 일어난 나쁜 사건들과 엮였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당할 때와, 민회빈 강씨가 누명을 쓰고 폐출당할 때 이 문으로 쫓겨나갔다. 또한 희빈 장씨가 사약받고 죽은 뒤 시신이 여기로 나갔다. 선인문 안쪽에서는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가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철종 때 불탔는데 하필 순원왕후의 국상을 치르던 중이었다.
이 정도면 가히 창경궁의 흉지라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