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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오군영을 구성하는 군영. 한양도성을 방어했다.2. 역사
1623년 인조반정으로 국내 정세가 어수선하고 인조와 서인의 친명배금 정책으로 후금과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자 한양의 중앙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후금에 대해 강경책을 표방한 서인 정권은 인조가 친정을 하여 군대를 이끌고 개성으로 나아갈 것을 계획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일면으로 개성 유수 이귀에게 260여 명의 화포군을 선별하여 훈련하게 했는데, 이것이 어영군의 시초다. 인조의 친정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지만(...), 개성 유수가 훈련시킨 화포군은 해산되지 않았고, 다음해 개성에서 도성으로 거처를 옮겨 국왕을 호위하도록 하였다.어영군은 새로운 편제 직후에 일어난 이괄의 난 당시 인조를 공주까지 호종했고, 정묘호란 직후에는 7천명으로 그 수가 크게 증강되어 5군영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이후 효종의 북벌계획에 의해 어영청은 크게 강화되어 그 규모가 3배 가까이 늘어난 크고 아름다운 2만 1천명의 대부대가 된다.[1] 이후 금위영이 창설되면서 군제개편으로 1만 6천명[2] 수준으로 축소된다.
어영청은 주로 포수(조총병), 포병을 양성하였는데[3], 이때문에 훈련도감과 함께 5군영의 중추 겸 최정예로 손꼽히기도 했다. 대장은 어영대장으로 종2품의 당상관이었다. 주로 문관이 역임하였으나, 이완 같은 무관이 대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어영청은 주로 국경지대 수비나 반란 진압에 투입되기도 했다. 대표적인게 가도정벌, 이인좌의 난과 신미양요다.
고종 때 이르러 그 이름을 장어영(壯禦營), 친군총어영(親軍摠禦營)으로 바꾸기도 했던 어영청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완전히 폐지된다.
어영청의 주력군은 지방에서 2달마다 번상하던 번상정군 5초 625명이었으며, 모두 포수였다. 이외에도 포병이던 별파진과 겸별파진 50명, 별무사 22명, 교대 없이 복무하던 직업군인 기병 기사 15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잡무를 처리하던 표하군 및 지원 병종까지 포함하여 3천여명에 가까운 병력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실질적인 전투 병력은 번상정군 및 기사, 별무사, 별파진 및 겸별파진 1,000명 이하가 끝이었으며, 소수의 병력으로 인해 독자적인 작전 수행보다는 훈련도감, 금위영 등에서 차출된 병력들과 합동작전을 펼쳤다.
3. 복식
어영청의 보군들은 주로 전립에 청전복을 착용했으며 갑주는 입지 않았던것으로 보인다.
어영청의 기사들또한 전립에 청전복[4]을 착용하였는데 갑주로는 철갑[5]과 피갑[6]을 혼용하였다.
4. 기타
어영부영의 어원이 바로 이 어영청이다. 처음에는 군기가 엄한 정예군이었으나, 조선 말기로 갈수록 군기가 문란해져 당나라 군대가 되어감에 따라 사람들은 '어영청은 군대도 아니다'라는 뜻으로 '어영비영(御營非營)'이라고 불렀고, 이후 발음의 편의상 어영부영(御營不營)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이괄의 난 시기에 인조를 공주까지 호위한 공이 있고, 북벌론의 일환으로 급격히 성장하였으나 나중에는 한강이 얼기 시작하는 겨울철에만 충청, 전라, 경상의 삼남 군사들을 번상시켜 1,000명을 채웠기 때문에 군기가 느슨해졌다. 결국 이런 군기문란에 군납비리로 말미암아 터져버린 사건이 임오군란.[1] 사실 번상제로 운영되는 군영이라 2만 1천명이 21개로 나뉘어 1천명씩 교대로 상경하는 형태라서 실질적으로 활동하는 병력은 1천명이 전부였다.[2] 5부 25사 125초의 규모다. 1초가 120명 정도[3] 어영청이 특별히 양성하였다 보긴 힘들며 중앙과 지방 통틀어 조선후기 모든 군영은 별파진이라는 포병을 양성하였다.[4] 보군의 전복과 다르게 소매가 홍색이다.이는 무관의 군복도 마찬가지이다.[5] 내부 갑찰이 철인 두정갑으로 상하분리형이다.[6] 내부 갑찰이 가죽인 두정갑으로 상하일체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