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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17 12:11:14

대구 무술명 오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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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물 寶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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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구 무술명 오작비2.gif

1. 개요2. 내용3. 원문 및 해석4. 외부 링크5. 보물 제516호

1. 개요

大邱 戊戌銘 塢作碑. 6세기 경 신라 중고기에 모동리촌(另冬里村, 현 대구광역시 일대)[1]에서 저수지를 축조하고 세운 기념비. 현재 경북대학교박물관에 소장 중이며, 대한민국 보물 제516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내용

파일:대구 무술명 오작비1.jpg

1946년 대구광역시 중구 대안동에서 발견된 주형광배(舟形光背) 모양의 자연석으로, 6세기 경 무술년 사월삭 십사일(戊戌年四月朔十四日)에 신라 모동리촌(另冬里村)에서 저수지를 축조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민간에서 세운 비석이다. 비문은 오랜 세월이 흐르며 마모가 심해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다.

이 비석에 나오는 무술년은 518년(법흥왕 5년) 또는 578년(진지왕 3년) 둘 중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 578년 제작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비체(碑體)의 형식, 비문의 서체 등이 6세기 전반보다는 후반 때와 더 비슷하다는 것을 근거로 삼고 있으며, 518년 제작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오작비의 발견 이후 1968년에 추가로 발견된 영천 청제비가 연구 결과 536년(법흥왕 23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됨에 따라 이 오작비 또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점을 근거로 삼고 있다.

비석에는 제1행 22자, 제2행 17자, 제3행 20자, 제4행 21자, 제5행 28자, 제6행 24자, 제7행 21자, 제8행 18자, 제9행 8자로, 전문 약 179글자가 새겨져 있다. 영천 청제비와 함께 당시 신라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전국적인 관개지 및 관계시설을 구축해놓았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은 순수한 중국식 한문체가 아닌 이두식(吏讀式)의 문체로 되어 있으며 직명·지명·인명 등 고유명사가 대부분으로, 이 고유명사 중간 마다 몇 구절의 문장이 끼워져 있다. 저수지의 크기는 대광(大廣) 20보(步), 높이 5보 4척(尺), 길이 50보 였고, 312명의 인원이 13일 동안 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비문을 쓴 글쓴이와 책임감독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6세기 경 대구 중구 대안동 일대에는 모동리촌(另冬里村), 부작촌(夫作村), 진득소리촌(珍得所里村) 등의 이름을 가진 촌락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 수리시설 및 사회사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3. 원문 및 해석

戊戌年十一月朔十四日另冬里村且只[2]▨塢作記之此成在▨
人者都唯那寶藏阿尺干都唯那慧藏阿尺干
大工尺仇利支村壹利刀兮貴干支▨上▨壹▨利干
道尺辰▨生之▨▨村▨▨夫作村芼令一伐奈生一伐
居毛村代丁一伐另冬里村沙木乙一伐珎淂所利村也淂失利一伐
塢珎此只村內▨利一尺▨▨一尺另所▨一伐伊此木利一尺
▨助只彼日此塢大廣廿步高五步四尺長五十步此作
起數者三百十二人功夫如十三日了作事之
文作人壹利兮一尺
무술년(578년) 11월 삭(朔) 14일에 모동리촌(另冬里村)의 차지▨오(且只▨塢)[3]를 만들고 기록한다.

이것을 만든 사람들은 도유나(都唯那)[4]인 보장(寶藏) 아척간(阿尺干)[5]과 역시 도유나인 혜장(慧藏) 아척간, 대공척(大工尺)[6]인 구리지촌(仇利支村) 출신의 일리도혜(壹利刀兮) 귀간지(貴干支)[7], ▨상▨일▨리(▨上▨壹▨利) 간(干)[8], 도척(道尺)[9]인 진▨생지▨▨촌(辰▨生之▨▨村) ▨▨, 부작촌(夫作村) 출신의 모령(芼令) 일벌(一伐)[10], 나생(奈生) 일벌, 거모촌(居毛村) 출신의 대정(代丁) 일벌, 모동리촌 출신의 사목을(沙木乙) 일벌, 진득소리촌(珎淂所利村) 출신의 야득실리(也淂失利) 일벌, 오진차지촌(塢珎此只村) 출신의 내▨리(內▨利) 일척(一尺)[11], ▨▨ 일척, 모소▨(另所▨) 일벌, 이차목리(伊此木利) 일척, ▨조지(▨助只) 피일(彼日)[12] 등이다.

이 저수지의 크기는 너비 20보, 높이 5보 4척, 길이 50보이다. 이것을 만드는 데 동원된 수는 312인의 공부(功夫)이며, 13일 간에 일을 다 마쳤다.
이 비문을 작성한 사람은 일리혜(壹利兮) 일척이다.

참고자료: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Ⅱ,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판독문

4. 외부 링크

5. 보물 제516호

1946년 대구시 대안동에서 처음 발견되었다가 7, 8년 동안이나 행방을 알 수 가 없었는데, 그 후 다시 경북대학교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비(碑)는 길쭉한 모양의 자연석으로, 아래는 직선으로 잘려 있고 윗부분은 원형으로 처리되어 있다. 아래부분의 모습으로 보아 본래 받침돌 위에 세웠거나 암반 위를 파고 세웠던 것으로 여겨진다.

비의 내용은 건립날짜와 저수지 축조내용 및 관계된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글자가 상당수 깎여나가 해석을 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으나, 신라시대 수리시설이나 사회사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1] (헤어질 령)자는 삼국시대에 (모을 모)의 약자로 사용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 참조.[2] 且只를 高라고 판독하기도 한다.[3] 오()는 저수지 혹은 을 뜻하는 한자이다.[4] 신라에서 진흥왕 대에 마련된 승직(僧職)으로, 그 외의 승직으로는 국총(國統), 대도유나(大都維那) 등이 있었다. 비문의 둑[塢\]을 축조하는 데 지방관 대신 승려가 책임자로 파견된 까닭은 확인되지 않는다.[5] 이처럼 승려에게 관등이 주어진 사례는 이 비가 유일하다.[6] 척(尺)은 일반적으로 기술자를 의미하므로, 대공척은 둑의 축조 작업 전체를 책임진 직책이라고 볼 수 있다. 경주 남산 신성비에 보이는 '장척(匠尺)', '공척(工尺)' 등과 동일한 성격을 지녔다.[7] 신라 외위 11등 가운데 제4등에 해당한다.[8] 신라 외위 11등 가운데 제7등에 해당한다.[9] 대공척과 마찬가지로 둑의 축조와 관련된 직책으로, 영천 청제비의 부척(斧尺)과 유사한 성격이라 할 수 있다.[10] 신라 외위 11등 가운데 제8등에 해당한다.[11] 신라 외위 11등 가운데 제9등에 해당한다.[12] 신라 외위 11등 가운데 제10등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