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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D1C27,#222222><colcolor=white> 행 정 구 역 | <colbgcolor=#ED1C27,#222222><colcolor=white> 상위 | 자강도 |
하위 | 34동 2리 | |
주 요 인 물 | 대의원 | |
시당 | (강계시당 책임비서) | |
인민위 | (강계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 |
면적 | 263.67㎢ | |
시간대 | UTC+9 | |
인구 | 251,971명 (2008년) | |
인구밀도 | 956명/km² (200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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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계시 전경 |
강계시 야경 |
[clearfix]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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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계 시내의 야경[3][4] |
자강도 소재지이자 자강도 최대도시이며, 4군 중 하나인 자성군과 함께 자강도라는 이름이 기원한 곳이지만 대한민국 이북 5도 행정구역으로 평안북도 동북부에 위치한 강계군에 속한 강계읍이다.
조선 세종 때 4군(자성, 우예, 여연, 무창) 진출 거점 도시인 이래 평안도 동북부 지역의 거점 도시였으며, 조선 말기에 8도를 23부로 개편할 때에도 현재의 자강도와 유사한 강계부의 중심 도시였다. 산으로 둘러쌓인 분지에 여러 강들의 합류지라는 점에서 춘천, 충주 등의 입지 조건과 비슷하다.[5]
2. 상세
강계시 외룡동 일대[6]의 거리. (2018)[7] |
4월의 강계시 충성동 일대의 한 광장[8](2010년대 후반) |
경관이 수려하고 아름다우며, 물이 좋은 도시로 유명하다. 강계 하면 강계미인을 가장 먼저 떠올릴 정도로 미인이 많은 도시로 유명한데 흰 피부와 고운 선 등으로 인해 과거 평양, 진주와 함께 가장 기생이 많이 나오는 곳이었다고 한다. 물이 좋은 도시답게 술도 유명하며 특히 도시 빌딩 한폭판에 있는 '인풍루'라는 조선시대 누각이 유명하다고 한다. 지금은 주민들의 쉼터로 개방 중이다.
함경북도 회령과 함께[9] 미인의 고장으로 유명하며, 조선 시대에는 인삼이 특산물이었는데 공물 부담을 견디지 못 한 나머지 떠도는 강계 사람들이 늘어나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포수의 고장으로 유명했고, 1866년 병인양요] 때 양헌수가 강계 포수 500여 명을 이끌고 정족산성에서 프랑스 군을 격퇴한 일이 유명하다.
자강도가 북한 다른 지역보다 배, 포도 등 과일을 많이 재배하는 만큼 이를 사용해 과실주와 리큐르를 제조하는 공장이 있는데 바로 강계포도술공장이다. 강계포도술공장에서 제조하는 리큐르로는 인풍술과 백로술이 유명하다. 인풍술은 포도 리큐르이고, 백로술은 배 리큐르이다. 인풍술과 백로술은 남북관계가 상대적으로 나았던 시절에 한국에도 수입되어 팔렸다.
산업에 있어 강계수력발전소, 시중광산 덕에 전력과 광물이 풍부하다. 금, 흑연, 무연탄 등의 지하 자원과 임산 자원 역시 많고 인삼과 작약 등의 약재도 유명하다. 향토 음식으로는 느릅나무 껍질과 가루로 만드는 느릅쟁이국수, 즉 강계국수가 있다. 느릅가루에 옥수수 전분으로 반죽한 면에 동치미와 돼지고기로 육수를 내며 동치미 무, 고기, 오이채, 양념장, 달걀을 고명으로 얹는다.
17세기 모습을 간직한 인풍루
최근에 복원된 강계아사
명승고적으로 관서팔경의 하나인 북천강이 독로강에 합류하는 지점에 세워져 있는 인풍루 (仁風樓)가 유명한데, 강계읍성의 서북 장대이자 연병장이다. 읍성의 남쪽 장대인 망미정 (望美亭), 역시 유명하다. 읍성 일원을 비롯해 강계역사박물관이 있는 옛 관아인 강계아사 (江界衙舍), 활쏘기 연습장이었던 거연정(巨然亭) 등이 현존한다. 강계아사 내에는 동헌, 내헌, 육모정 등이 복원되어 있다.
기후는 전형적인 냉대기후를 띄는데 최한월인 1월의 평균 기온은 -12.7℃로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들 중 하나이다. 비공식적으로 1927년 1월 23일 -42.4℃를 기록해 한반도 역대 최저 기온 2위로 남게 되었다. 참고로 1위는 1933년 1월 13일 중강군의 -43.6℃. 그런데 위도는 생각보다 낮아서 북위 41도에 불과하다. 이탈리아의 나폴리보다 약간 더 높고 튀르키예의 이스탄불과 같은 위도 상에 있지만 이스탄불의 1월 평균 기온은 5.7℃로 제주시, 도쿄, 상하이, 런던, 애틀랜타의 1월 평균 기온과 같다.[10] 나폴리는 그보다 더해서 1월 평균 기온이 8.1℃로 서귀포시의 1월 평균 기온보다 더 높다![11] 강계시가 동위도 상에 있는 나폴리, 이스탄불보다 훨씬 더 추운 이유는 내륙 깊숙한 곳에 있어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대륙 동안이라 북서풍의 영향을 많이 받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자신이 일으킨 6.25 전쟁으로 인한 피난길에서 임시수도로 삼았던 것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의외로 북한의 지도자들이 은근히 관심을 보여준 도시이기도 하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강계시 사람들이 '강계정신'으로 기근을 극복해나간 것에[12] 김정일이 '감명'을 받고 [13][14] 경제 프로파간다 구호로 '강계정신'을 내세웠을 정도였으며, 김정일의 아들인 김정은도 2012년에 조선노동당 창건 67주년을 맞아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강계시에 김일성과 김정일의 동상을 나란히 건립한 데다가 전술한 것처럼 평양 밖 도시 중 공식적으로 야경 사진을 공개한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가 바로 강계시일 정도로 강계시에 남다른 애착을 보이고 있다. 과거에는 사진들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북한 도시들 중에서도 매우 열악한 수준이었지만, 김정은 시기 들어와서 나름대로 최신(?) 모습으로 개발되어가고 있다.
전술한 것처럼 수도 평양시 외부에 있는 북한 지방 도시 중 야경이 공개된 몇 안 되는 도시 중 하나다. 김정은 시기 북한은 외부에 선전 목적으로 야경 사진을 자주 공개하고 있으나, 대부분은 평양 중심부 일대가 차지하고 지방 도시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은데, 강계시를 제외하면 김정은 시기 북한이 야경을 공개한 곳은 김정은의 아버지 김정일의 거짓된 고향 삼지연시[15]와 김정은 본인의 고향 원산시 정도밖에 없다. 문서 상단의 2016년 사진 외에도 북한 측이 공개한 강계의 야경 사진은 적어도 4종이 있다. 2017년 이전 2018년 2021년 2022년 강계의 야경 연출을 보면 네온사인과 LED가 과하게 사용된 나머지 부자연스럽다 못해 유치해 보일 정도인데, 어떻게든 선전용으로 연출한 것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당연히 실질적인 전력으로 불을 밝힌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야간 위성사진을 보면 강계시의 불빛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3. 역사
1930년대의 강계 읍내
청동기 시대의 민무늬토기, 반달돌칼 유물과 철기시대 초엽의 명도전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기원전부터 마을이 있었다. 이후 고구려, 발해를 거쳐 여진족 영토가 되었다가 1361년 공민왕의 북벌 당시 점령되어 고려의 북쪽 변경을 이루었다. 점령 직후에는 독로강만호 (禿魯江萬戶)를 두었다가 1369년에 현 지명의 유래가 되는 강계만호부 (江界萬戶府)로 개칭되었고 산하에 진변 (鎭邊)·진성 (鎭成)·진안 (鎭安)·진녕 (鎭寧)의 4군(軍)이 설치되었다. 그러다 조선 초기인 1401년에 석주 (石州)가 설치되었고, 1403년에는 강계부 (江界府)로 승격되어 병마사가 배치되었다. 1413년에는 강계도호부 (江界都護府)로 승격되었고, 1432년 세종대왕의 4군6진 개척 당시 최윤덕 장군이 강계에서 출정하여 4군을 조선의 영토로 삼았다. 이후로도 강계는 의주부와 함께 조선의 서북면 변방 방어 거점으로써 중시 되었고, 1442년 ~ 1446년과 1450년 ~ 1453년간 영변을 대신해 도절제영이 위치했다. 인구도 점차 4천 이상으로 늘며 1433년에 판관, 1449년에 문반토관이 임명되었다.
1459년 4군을 폐했을 당시 자성군 및 우애군 백성들이 강계로 이주되었다. 1555년에는 부사 박수린 (朴秀麟)이 읍성을 축조했고, 임진왜란 시기 광해군이 본래 강계로 향하려 했으나 왜군이 함경도로 향했다는 소식에 이천군으로 남하했다. 왜란 시기에도 피해릏 입지 않은 강계에는 1692년 도호부사 겸 청북우방어사가 배치되었고, 강계진병마첨절제사로도 불렸다. 당시 강계 산하에는 만포진, 벌등진, 고산진, 신광진, 평남진이 있어 변경을 방어했다. 1759년 당시 여지도서에 의하면 강계 인구는 8만을 넘겨 조선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고, 미녀와 포수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평안도의 주요 도시 답게 서북 지방의 양반 문화가 발진한 곳이기도 했다. 1895년 부군제 실시로 강계부는 강계, 자성, 위원, 초산, 희천, 후창군을 관정했다. 다만 이듬해 13도제 실시로 강계는 평안북도 산하 군으로 격하되었다. 1900년 무렵 강계는 선천군과 함께 평안북도의 주요 기독교 도시였다.
1903년에는 명신학교 (明信學校), 광신여학교 (光信女學校)가 설치되었다. 3.1 운동 당시 김경하 (金京河), 한경하 (韓炅夏), 정준 (鄭儁) 등을 주도로 5만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1920년 ~ 1925년간에만 58회의 독립군 활동이 있을 정도로 강계는 만주로 망명한 독립군의 주요 타격 지점이었다. 강계 출신으로 순국한 독립투사는 강계영림서를 습격한 이응서 (李應瑞), 김용규 (金用奎) 등이 있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후에 만주 진출의 교두보로써 강계를 주목, 강계면을 읍으로 승격시키고 순천 ~ 만포간 철도인 만포선을 건설해 1939년에 완공헸다. 이로써 강계는 평안북도 내륙의 중심 도시가 되었고, 인구도 1943년 기준 21만을 돌파했다. 해방 후 강계읍은 다시 면으로 격하되었으나, 1949년 북한이 평안북도 동부를 분할해 자강도를 설치하자 그 도청소재지로써 강계시가 설치되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UN군이 북진하자, 북한 정권은 평양을 포기하고 한동안 강계를 임시수도로 삼았다가 55일 만인 12월 6일에 탈환한 평양으로 환도하였다. 이때 방송으로는 정부를 신의주로 옮겼다고 했다. 이러한 이력 때문인지 현재도 휴전선 후방 깊숙히 있으면서도 상당수의 북한군 전력이 집중된 곳이다. 유사시에는 임시수도 겸 북한 지도층의 피난처 겸 중국군 개입 루트의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추정된다. 강계 주변에는 굴뚝만 산 정상에 돌출된 지하공장(대부분 군수공업 시설로 추정)과 비밀철도도 많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북한에서 14번째로 큰 도시이자 희천시와 함께 자강도의 주요 공업 도시 중 하나이다.
4. 행정구역
2008년 기준. 2021년 보도에는 읍성동이라는 동도 언급되었다. #- 동: 총 34동
강서동, 고영1동, 고영2동, 공귀동, 공인동, 남문동, 남산동, 남천동, 내룡동, 독산동, 동문동, 동부동, 대응동, 로동자동, 류동, 만수동, 부창동, 북문동, 서산동, 석조동, 석현동, 수침동, 신문동, 장자동, 충성동, 향로동, 흥주동, 야학동, 연석동, 연주동, 연풍동, 은정동, 의진동, 외룡동
- 리: 총 2리
신흥리, 두흥리
5.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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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4223F><colcolor=#ffffff> 군청 소재지 | 강계읍 강서동 | ||
상위 행정구역 | 평안북도 | ||
하위 행정구역 | 2읍 15면 | ||
면적 | 263.67km² | ||
인구 | 251,971명(2008년) | ||
인구밀도 | 956/㎢(2008년) | ||
명예 군수 | 공석 (제22대) | ||
명예 읍면장 | 17석 | ||
홈페이지 | 이북5도위원회 강계군 소개 |
해방 당시에 강계군이었으며 2읍(강계·만포) 15면을 관할하는 면적 5,403.63㎢에 달하는 함경북도 무산군 다음으로 한반도에서 두 번째로 넓은 군이었으나, 중심지던 강계읍이 강계시로, 만포읍이 만포군으로 분리된 후 만포시로 승격되고 나머지 지역은 군을 신설하면서 이리저리 찢어졌다. 북한 행정구역으로 7개 시군으로 쪼개진 것이다. 1944년 광복 직전의 강계군 인구는 21만여 명이었으며 2008년 기준으로 쪼개진 7개 시군의 인구를 합치면 모두 69만 7천명(!)이 된다.
- 강계읍(江界邑)
- 관할 동: 본(本), 고당(古堂), 궁하(宮下), 금(錦), 남산(南山), 대화(大和), 동부(東部), 북천(北川), 성산(城山), 소화(昭和), 수(壽), 영(榮), 유(柳), 일출(日出), 천석(千石), 학견(鶴見), 행(幸), 화천(和泉), 황금(黃金)
- 조선 후기인 1839년에 성안방(城安坊)에서 읍동방(邑東坊)과 읍서방(邑西坊)으로 분리되었다가 1914년에 강계면으로 통합되었다. 1931년에 강계면과 공서면(公西面) 고당동, 회룡동(回龍洞)이 병합돼 읍으로 승격되었고, 이후에 동부동 일부, 서부동(西部洞), 고당동 일부, 회룡동을 정, 정목으로 분할했다. 일제강점기 때 크게 발달돼, 동명에 일본식 지명이 많다. 1946년에 일본식 동명을 청산했다.
- 만포선 철도가 이곳을 지나가며 관내에 강계역이 있다. 협궤철도인 강계선 철도가 이곳에서 시종착하며 관내에 신강계역, 남문역, 동부역이 있다.
- 동쪽에서 흘러오는 남천강, 북천강이 강계읍내에서 독로강에 합류, 고산진 방면으로 흘러 압록강에 합류한다. 고적으로 강계읍성, 인풍루, 거연정, 망미정 등이 있다.
- 만포읍(滿浦邑)
- 간북면(干北面)
- 관할 동: 남(南), 북(北)
- 고산면(高山面)
- 관할 동: 포상(浦上), 남상(南上), 미타(美他), 연상(延上), 연하(延下), 춘산(春山)
- 압록강변에 있는 면으로 독로강이 여기서 압록강에 합류한다.
- 곡하면(曲河面)
- 공북면(公北面)
- 성간면(城干面)
- 시중면(時中面)
- 어뢰면(漁雷面)[18]
- 관할 동: 풍룡(豊龍), 종인(從仁), 천성(天城), 풍청(豊淸)
- 외귀면(外貴面)
- 용림면(龍林面)
- 관할 동: 신창(新昌), 광성(廣城), 남흥(南興), 용림(龍林), 용운(龍雲), 후지(厚地)
- 강계군의 최남단 3면(화경면·입관면·용림면) 중 하나. 군 남동쪽에 있으며 희천군 쪽으로 파고들어가 있는 광성동은 강계군의 최남단이다. 1895년 광성, 남상, 남하, 운상, 운하 5개 동으로 광성면을 분리했으나 1914년 다시 편입되었다. 1913년 운상동과 운하동을 합병해 용운동을 신설하였고, 1930년대에 남상동과 남하동을 합병해 남흥동을 신설하였다.
- 북한 행정구역상 옛 룡림군 소재지로 면소재지인 신창동 일대는 희천발전소 건설의 일환인 룡림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었다.
- 이서면(吏西面)
- 관할 동: 송학(松鶴), 등공(登公), 송하(松下), 함부(咸富)
- 군 북쪽에 있는 면.
- 입관면(立館面)
- 전천면(前川面)
- 종서면(從西面)
- 관할 동: 신성(新城), 종포(從浦), 황청(黃淸)
- 군 북쪽에 있는 면.
- 화경면(化京面)
6. 출신 인물
냉면 전문점 모란각 창업주로 유명한 가수 김용과 고려대총장을 역임한 광복군 김준엽이 강계 출신이다.
7. 여담
- 강계라는 지명은 장자강 (독로강), 북천강 등 여러 강이 만나는 강들의 경계란 뜻이다.
-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과 UN군이 단 한 번도 점령해 보지 못한 땅이라는 점에서 조선인민군이 단 한 번도 점령해 보지 못한 땅인 부산광역시의 대척점이라 할 수 있다. 만약 6.25 전쟁이 남한이 평양을 수복한 채 휴전으로 끝났다면, 이곳이 계속 북한의 수도로 남아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 1991년 11월 30일, 이 곳의 대표적인 군수공장인 강계 뜨락또르 종합공장(26호 공장)[19] 야적장에서 대형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이곳은 각종 화기의 탄약, 미사일 등을 제조하는 생산기지여서 야적장에는 생산된 다량의 폭발물이 쌓여 있었고, 엄청난 연쇄폭발로 이어졌다. # 이 사고로 인한 화재 진압 과정에서 생산시설로 불이 번지는 걸 막기 위해 결사대가 지하공장 출입구를 폐쇄했고, 그 안에 갇힌 야간작업조 300여 명 전원이 질식사했다고 한다. 지상에서의 사망자도 1,000명이 넘는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정확히 1개월 전에 있던 평강역 폭발사고와 마찬가지로 자세한 내막은 북한 당국에 의해 철저히 은폐되어 정확한 사망자 숫자는 알 수 없다.[20] #
- 강계포도술(와인)을 제조한다고 한다.
[1] 2022년[2] 2022년[3]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 소속으로 추정되는 대외 선전매체인 조선의 오늘에서 2016년 7월 18일에 공개한 모습으로, 건물 외벽에 LED, 네온사인을 붙여 선전용으로 연출한 것이다. 출처[4] 사진에 있는 한옥처럼 생긴 건물은 인풍원으로,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장자강 강변에 건설하고 2015년 1월 8일 문을 연 종합문화복지시설이다. 외형상으로는 3층 건물이지만 2층까지 운영되는 것으로 보이며, 1층에는 지열냉난방 설비를 갖춘 수영장과 목욕탕, 세탁실, 미용실, 안마실, 이발실, 운동실, 탁구장이 있고 2층에는 식당이 있다고 한다. 북한의 말로는 개업 후 2년 동안 10만 명이 방문했다고 한다. 그런데 수영장 내부 사진을 보면 선전용 사진에서도 수질이 매우 좋지 않은 게 확연히 보여(수영장 물이 거의 녹물 수준으로 탁하며, 어린이수영장 물은 아예 시커멓다) 북한의 수도(水道) 실태가 열악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거랑 다를 게 없게 되었다. # 다만 이는 북한이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수도를 아직도 사용하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평양도 김정은 집권 이후로 중심부는 수도를 싹 다 교체해서 사정이 나아졌지만 외곽 지역은 수도 실태가 열악하다고 하는데 평양보다 인프라가 훨씬 열악한 지방 도시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같은 기간 동안 남한에서는 수도를 새로 만드는 등 낡은 인프라들을 모두 교체하여 일제강점기에 만든 시설물들은 지금은 하나도 없다. 물론 후에 보도된 자료들을 보면 인풍원도 수도 보수 공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5] 특히 춘천과 강계 모두 물을 뜻하는 천과 강의 한자가 들어가 있다. 춘천의 소양강댐, 충주의 충주댐처럼 강계에도 댐과 수력발전소가 있다[6] '외룡상점', '외룡고급중학교'라는 간판이 있다.[7] 썸네일처럼 연인끼리 손을 잡는 것은 2010년대 후반 기준으로 북한에서 좀 깬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다.[8] 동상 위치, 춤추는 곳[9] 북한은 김정숙의 고향이라며 선전했지만 조선시대에도 나오던 말이었다. # 일제강점기 작가 이효석의 《모던걸 멜론》이라는 작품에서도 등장한다.[10] 참고로 제주시의 위도는 북위 33도 30분이다. 이스탄불보다 위도가 7.5도나 더 낮은 곳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북위 41도에 있는 이스탄불이 북위 33도에 있는 제주시와 같은 기온이다.[11] 참고로 서귀포시의 위도는 북위 33도 15분이다. 북위 41도에 있는 나폴리가 북위 33도에 있는 서귀포보다 더 따뜻하다는 뜻이다.[12] 참고로 강계시가 속한 자강도는 척박한 자연환경 때문에 고난의 행군 시기에 주민들이 가장 고생을 했던 곳이었다고 한다.[13] 참고로 그 '강계정신'이란 것의 내용이
▲자기 수령만을 믿고 받드는 수령숭배의 정신
▲당의 구상과 의도를 무조건 실현하기 위해 투쟁하는 결사관철의 정신
▲자신의 힘을 믿고 자기 단위의 살림살이를 자체로 꾸려나가는 자력갱생·간고분투의 혁명정신
▲사회주의 미래에 대한 신심과 희망을 잃지 않는 혁명적 낙관주의 정신
이라고 한다. #[14] 그러나 고난의 행군 시기에 김정일은 '쪽잠에 줴기밥(주먹밥)'은 커녕 외국산/특제 최고급 식재료들로 만든 최고급 요리들을 한 끼마다 20~30개씩 먹었다.[15] 실제로는 러시아의 우수리스크 출신이다.[16] 중국어 표기법에 의하면 메이지선이지만 明治線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어 한국 한자음으로 적음.[17] 공귀리는 1949년 북한이 공인동의 일부를 분리하여 설정한 행정구역이다.[18] 해군 무기 어뢰(魚雷)와는 무관하다.[19] 북한에선 트랙터를 러시아식 발음으로 뜨락또르라고 부른다.[20] 물론 2000년대에는 통신매체의 발달로 인해 북한도 더 이상 대규모 사건사고를 완전히 숨길 수 없게 되어 룡천역 폭발사고와 평양 아파트 붕괴 사고 같은 사건사고들이 해외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자기 수령만을 믿고 받드는 수령숭배의 정신
▲당의 구상과 의도를 무조건 실현하기 위해 투쟁하는 결사관철의 정신
▲자신의 힘을 믿고 자기 단위의 살림살이를 자체로 꾸려나가는 자력갱생·간고분투의 혁명정신
▲사회주의 미래에 대한 신심과 희망을 잃지 않는 혁명적 낙관주의 정신
이라고 한다. #[14] 그러나 고난의 행군 시기에 김정일은 '쪽잠에 줴기밥(주먹밥)'은 커녕 외국산/특제 최고급 식재료들로 만든 최고급 요리들을 한 끼마다 20~30개씩 먹었다.[15] 실제로는 러시아의 우수리스크 출신이다.[16] 중국어 표기법에 의하면 메이지선이지만 明治線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어 한국 한자음으로 적음.[17] 공귀리는 1949년 북한이 공인동의 일부를 분리하여 설정한 행정구역이다.[18] 해군 무기 어뢰(魚雷)와는 무관하다.[19] 북한에선 트랙터를 러시아식 발음으로 뜨락또르라고 부른다.[20] 물론 2000년대에는 통신매체의 발달로 인해 북한도 더 이상 대규모 사건사고를 완전히 숨길 수 없게 되어 룡천역 폭발사고와 평양 아파트 붕괴 사고 같은 사건사고들이 해외에도 알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