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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상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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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어원1.2. 결성1.3. 주장1.4. 영향
2. 인물3. 같이보기

1. 개요

중상학파()는 조선 후기에 상공업을 중시한 실학자들을 일컫는 말이며, 이용후생학파()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실학자는 유수원,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가 있다. 이들은 조선 후기 상공업의 발달, 서양과 청나라의 선진 문물에 영향을 받았고, 농업에 기초한 유교적 이상국가론을 벗어나 상공업 진흥, 기술 혁신, 대외 무역 중시를 통한 부국강병을 주장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후의 개화파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대표적으로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중농학파와 대비된다. 큰 줄기에서는 비슷하지만.

사람들의 통넘과는 달리, 학문적으로 중상학파의 다수는 노론 시파, 혹은 낙론에 속한다[1]. 유수원이 그나마 소론이긴 한데 이외에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등 우리가 아는 굵직한 북학파 구성원 다수는 죄다 노론 시파-낙론 계열에서 학문을 배우고 정치적 입장을 가지던 사람들이다. 이는 노론 낙론 계열 성리학자들 중 일부가 송시열의 여러 경세론이나 사회개혁론에 관심을 가지고 그쪽에 치우쳤던 것이 그들에게 전수되고, 이것이 북경에서 신문물을 접하는 등의 경험을 통해 북학을 주장하게 되었기 때문이라 풀이된다. 송시열이 흔히 개혁을 부정한 수구 꼴통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애초에 송시열은 개혁보다 도통 확립을 우선시했을 뿐 개혁 자체에는 오히려 허목이나 허적 같은 당대 남인들보다도 더 급진적이었다. 벽파-호론 계열도 이를 계승해 호포제를 줄기차게 외쳐댔다.

1.1. 어원

북학파에서 북학은 『맹자(孟子)』의「등문공장구(騰文公章句)」에서 유래되었다. 여기서 남쪽에 위치한 초나라 사람인 진량(陳良)이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도를 흠모해, 북으로 중국에 유학해서 용화변이(用華變夷)를 꾀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즉 중국 문명의 선진성을 인정하고 그를 본받으라는 것인데, 당시 중국은 그렇게 조선에서 오랑캐로 멸시하던 만주족청나라였다. 즉 북학파는 청나라의 발전된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조선 사회를 바꿔야 한다는 입장을 지닌 사람들을 이르게 되는 것이다.

1.2. 결성

북학파라 불릴만한 시초는 박지원이 아니라 그와 친분관계가 두터웠던 홍대용이다. 홍대용은 1765년 북경에 다녀온 이후 서양과학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서양문물을 직접 들여오게 된다. 그리고 박지원이 1768년 백탑으로 이사하고 이 주변에 이덕무, 이서구, 서상수, 유금, 유득공 등이 모여 살았고, 박제가, 이희경 등도 출입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연암모임이 결성이 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북학파가 형성이 되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그 이전 1720년에 이이명의 아들 이기지가 부친의 청나라 사신행을 따라가서 북경에서 천주교 선교사와 교류하고 성모자상과 서양 서적, 카스테라 레시피 등 각종 기물들을 얻어오는 등 북학파의 시초가 될 뻔 했으나 경종을 몰아내려는 부친의 음모(신임사화)에 동참했다가 역모죄로 죽임을 당하고 그가 가져온 서양 학문들도 묻히고 말았던 사례가 있다. 그나마가 그가 북경에서 경험한 내용들을 쓴 책인 '일암연기'가 후세 선비들에게 전해진 덕분에 그 계보가 이어질 수 있었다.

1.3. 주장

이들은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개혁하자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상공업을 중심으로 개혁을 하자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는데, 특히 상업의 발전과 소비를 강조했다.

1.4. 영향

이들의 사상은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에 의해 개화파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2. 인물

2.1. 유수원

위의 상공업 진흥이나 기술 혁신 같은 주장이 그에게서 처음 나왔다. 그의 사상은 그의 저서인 '우서(迂書)' 에 집대성되어 있는데, 이 책의 중심내용은 나라가 발전하려면 백성이 각자 맡은 일을 열심히 해야하는데 신분제의 고착화로 그게 잘 안되고 있음. 그러니까 사농공상의 구분을 신분이 아닌 평등한 직업으로 대하고 전문화해라! 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 '우서' 는 문답형식으로, 매우 논리적으로 서술되어 있어서 당시 왕이었던 영조가 읽기도 했다! 영조 曰 ‘대체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저술은 선대 유학자의 말을 뽑아 모아서 기교만 부리는데, 이 사람은 자기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만을 기술하였으니, 참으로 귀하다’ 라고 할 정도니... 그밖의 주장으로 상인들이 연합하여 대자본을 형성해 규모를 늘리고, 생산과 판매를 직접 담당함으로서 상공업을 진흥시키자, 대상인이 학교와 교량, 방위시설 등을 건설해 지역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자 등이 있다.

관리가 되어서 영의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잘못보여 파직되었다. 다행히 복직되었지만 이미 세상은 노론의 세상...[2] 고위직으로 못 올라가고 작은 고을 수령으로 떠돌다가 심한 귓병까지 얻어 귀머거리가 되었다. '우서' 집필로 뜨긴 했지만... 후에 나주 괘서 사건때 역적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당하고 만다.

2.2. 홍대용

청년기 때 박지원, 박제가 같은 북학파들과 교류하였고, 35세 때 청으로 가 선진 문물을 접했다. 청으로 가서 연구한 것을 토대로 의산문답(醫山問答) 이라는 저서를 통해 중국 중심 세계관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지구가 하루에 한 바퀴를 돈다는 지전설(地轉說)과 우주는'무한하다는 우주무한론(宇宙無限論)을 주장했다. 지금 보면 별거 아닌 거지만 이 주장은 당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엄청난 주장이다. 이게 뭔 소리인가하니, 지구가 한 곳에 멈추고 있지 않고 계속 움직이니 중심은 계속 바뀌는 것이고, 우주는 무한한데 그 중심이 지구라고 할 수 있냐? 따라서 중심 그런거 없다 라는 것. 물론 이것 가지고 홍대용이 중상학파인 것은 아니다. 홍대용은 과거의 철폐와 공거제[3]를 통한 인재 등용, 신분 관계 없이 8세 이상 아동을 전부 교육 시켜야한다 등 과감한 개혁을 주장했다.

'의산문답' 외에도 여러 저서를 남겼는데 그 저서는 담헌서[4], 사서문의, 건정필담, 주해수용[5], 계방일기[6], 임하경륜[7], 을병연행록[8]이다.

2.3. 박지원

허생전과 양반전을 집필했으며 수레와 선박의 이용을 강조했다. 또 화폐의 유통도 강조하였다.

2.4. 박제가

북학의를 집필했으며 청과의 통상 확대를 통한 문물 수용을 주장하였다. 소비의 중요성을 우물에 비유하여 강조하였다.[9]

2.5. 주요 인물

3.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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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거의 다수의 노론 시파는 곧 낙론에 속하기에 구분의 의미가 거의 없기는 하지만[2] 유수원은 소론[3] 인재를 추천하는 방식으로 등용시키는 제도.[4] 담헌서의 사론에는 주로 위진 남북조 시대 인물들의 평이 실려 있는데 촉한의 인물인 강유제갈첨 등의 인물평도 실려있다.[5] 수학책. 홍대용은 담헌서에서 수학을 찬미한 바 있다.[6]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가 서연(書筵)을 드나들 시기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계방桂坊이라고도 한다.) 직책으로 강론에 참여한 경험을 대화체로 기록한 것이다.[7] 일정 연령에 도달한 남성에게 토지 2결을 지급하라는 균전론을 주장하였다.[8] 을병연행록은 박지원열하일기,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와 함께 조선 후기의 3대 중국 견문록으로 꼽힌다.[9] 그래서 우물론이라고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