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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3-19 21:36:35

소용 임씨

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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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식 후궁 첩지가 있거나 문서가 등재된 사람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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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광해군의 후궁
소용 임씨 | 昭容 任氏
출생 1595년[출처][2]
사망 1628년 1월 20일 (향년 33세)
조선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능묘 미상
재위기간 조선 소용
1610년 ~ 1623년 4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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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풍천 임씨
애영(愛英)
부모 부친 임몽정(任蒙正)
모친 임몽정의 첩
배우자 광해군
봉작 소용(昭容)
}}}}}}}}} ||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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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광해군후궁. 당대에 가장 총애받은 후궁으로,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이 끝까지 사랑하여 함께 거처한 자는 임씨(任氏)·정씨(鄭氏) 두 소용(昭容)이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 임씨가 그녀를 가리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임국로(任國老), 아버지는 대사성을 지낸 임몽정(任蒙正)이고, 어머니는 임몽정의 첩이다. 1628년(인조 6) 역모에 연루되어 처형된 임취정(任就正)의 조카이기도 하다.

2. 생애

소용 임씨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서 자랐는데, 1610년(광해군 2년)에 외할머니가 연줄을 타서 궁중에 바쳤다고 한다.[3] 소용 임씨는 용모가 뛰어나고 머리가 약은 데다가 아첨을 잘 부려서 총애를 얻었다.
임 소용(任昭容)은 부제학 몽정(蒙正)의 첩의 딸이며, 판서 취정(就正)의 질녀이다. 일찍 부모를 잃고 그녀의 외가에서 자라 임씨 집안과는 인연이 끊어져서 서로 알지 못하였는데, 경술년 나이 열세 살에 그 외조모가 연줄을 타서 궁중에 바쳤다. 취정(就正)이 막 원주목사(原州牧使)가 되었다가 말을 듣고 매우 놀라 글을 보내 중지시켰으나, 이미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취정이 광해군에게 미움을 받고 여러 해 벼슬자리를 옮기지 못하였고, 얼마 후에 조금 승진되었으나 가문이 화를 입었다.
연려실기술》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정사와 상반된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임취정이 자기 형인 임몽정의 첩의 딸을 후궁으로 들여보냈으며, 나날이 총애가 높아가 이이첨과 비슷한 권세를 누렸다고 나온다. 실제로 임취정은 형조 참의, 좌승지, 이조 참판, 예조 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광해군 시기에 승승장구하였다.

하지만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소용 임씨와 임취정은 몰락하였다. 이때 광해군의 또다른 후궁인 귀인 윤씨는 처형되고, 다른 후궁들은 유배를 갔는데 소용 임씨만은 운 좋게 살아남아 강화도로 가서 광해군을 모시게 되었다. 모두 소용 임씨가 이귀김자점의 뇌물을 받고 광해군 앞에서 비호해준 덕분이었다.
임씨는 일찍이 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이 고변당할 당시 두둔해 준 공이 꽤 있었기 때문에 용서받아 죽지 않았으므로 위리(圍籬)에서 폐주를 모시게 되었다.
인조실록》 인조 1년 9월 14일

1628년(인조 6) 류효립 등 대북 세력이 광해군을 상왕으로 삼고 인성군을 추대하려는 모반을 꾀한 것이 사전에 발각되었다. 특히 류효립의 종이 강화도까지 와서 광해군의 내관, 궁녀 등과 내통하였다는 고발이 있었기 때문에 인조는 임씨를 잡아오게 하였다.[4][5]
임금이 안팎이 엄하지 않았다 하여 지킨 자를 처벌하고, 또 한 방에 있던 임 소용(任昭容)을 잡아와서 대궐 뜰에서 국문하였으나, 끝내 그 편지가 누구에게서 나온 것임을 몰랐다. 신흠(申欽)이 국청의 여러 재상에게 말하기를, "내가 옛 임금의 총희(寵姬)가 형벌을 받는 것을 보고도 막지 못하고, 또 그 형을 받는 것을 내려다보고 지휘하였으니 후세의 의논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연려실기술》 인조조 고사본말

《속잡록》에서는 임씨는 이때 잡혀와서 국문을 받다가 처형 당한 것으로 나오지만, 《승정원일기》에서는 국문을 받던 도중에 죽은 것으로 나온다.[6]

[출처] 서치상. (2020). 광해·인조 연간의 해인사 수다라장과 법보전 상량문 연구. 건축역사연구, 29(1), 65-76.[2] 《공사견문록》에 따르면 1598년생이고 위 논문에 나오는 《해인사 수다라장 상량문》에 따르면 1595년생인데, 전자는 100여 년 뒤에 집필된 야사집이고 후자는 당대에 쓰인 기록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1595년생이라고 보는 게 더 신빙성이 높을 것이다.[3] 생모의 이름이나 외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4] 인조실록 18권, 인조 6년 1월 3일 을축 6번째기사. #[5] 당시 광해군의 다른 나인은 작은 칼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고, 임씨도 스스로 찔렀으나 죽지 않아서 잡혀가게 된 것이다.[6] 승정원일기 20책 (탈초본 1책) 인조 6년 1월 20일 임오 2/9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