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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5:33:21

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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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한국사
2.1. 고려 시대2.2. 조선 시대
3. 중국사4. 대중매체

1. 개요

[1]

임금을 곁에서 모시는 직위. 일종의 비서로 원래는 임금의 근처에서 경호나 잡일을 해 주는 역할이었다.

내시는 실권자의 옆에서 부리는 시종 의미를 가졌으며, 중국에서는 이 의미가 확장되어 내시라고 하면 정식으로 관직을 받았거나 황제의 명을 직접적으로 받드는 중신이 아니라 실권자의 심복 정도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2]

그 특성상 높은 품계를 받긴 어려웠으나 실권자와 친밀하여 권력이 강할 수도 있었고, 내시 생활을 끝내며 중신으로 옮겨오는 사례도 많았다.

후술되어있듯 환관과는 다르다. 하지만 중화권에선 환관이 내시를 맡는 경우가 제법 흔한 편이었고, 한국에서도 조선시대의 영향으로 '환관=내시'로 통하기도 한다.

2. 한국사


2.1. 고려 시대

오늘날 한국의 현대인들이 '내시'라고 하면 왕이 들어오기 전에 "주상전하 납씨오~", "전하~ 수라를 들이겠사옵니다."라고 소리치는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것과 달리, 고려 시대에는 내시를 명문가 출신으로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문관들 중에서 선발했다. 즉, 현대인들이 "내시 = 환관"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고려시대는 환관이 아닌 "내시=현대의 비서실" 개념이였다.

고려의 내시는 여러 관청기관을 원래 소속으로 하고 국왕에 의해 선발되어 '내시원(內侍院)'에 근무했다. 내시원 근무 신하는 본래 관직명 앞에 '내시(內侍)'를 붙였다. 고려 내시들은 왕의 행차에 동행하는가 하면, 왕명의 초안 작성, 유교 경전의 강의, 왕실재정 관리 전반을 담당했으며, 때로는 국왕을 대신하여 궐 밖의 민정을 살피기도 했다. 현대로 보면 청와대의 행정관에 대응된다. 내시는 권설직(權設職)[3]이며 특별 봉급으로 별사미를 받았다. 때문에 고려 내시 관료는 선망 대상이었으며, 내시 출신 중 재상에 오른 자가 무려 22명이었다. 과거 합격자가 아니더라도 실무 능력을 인정받아 내시가 되기도 하고, 의술, 점술, 잡기 등으로 내시에 발탁되기도 했으며, 무신정권 시대에는 무신이 내시가 되기도 했다.[4] 왕을 보좌하는 직업이기에 무술시험도 봤다. 이후 공민왕 대에 내시부가 만들어진 후에는 관료들이 담당하던 내시원은 군 복무 대신으로 하는 궁궐 숙위 성중관(成衆官)으로 역할이 위축되었으며, 조선세조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궁궐 숙위의 기능만을 담당했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환관이 곧 내시부를 담당했던 조선 시대의 영향 때문에 환관과 내시를 너무 쉽게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고려시대의 내시직은 엄연히 당대의 고위가문 자제들만이나 들어갈 수 있는 엘리트직인데도, 이를 환관으로 착각하곤 한다. 예컨대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내시 한뢰정중부에게 "개도 안 물어갈 환관 놈"이라고 욕을 먹는 이상한 장면이 나오고[5], 오히려 진짜 환관이었던 왕광취는 멀쩡히 수염 달린 관료로 묘사되어 고증오류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후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이를 신경쓰려다가 진짜 환관이었던 최만생조차 수염을 기른 관료로 묘사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2.2. 조선 시대

조선 시대에 들어서 환관들이 내시부를 맡게 되면서 '내시=환관'이라는 이미지가 생겼다. 그리고 환관들은 고자였기 때문에 내시라는 말에 고자라는 의미를 포함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태조 시대에 당시 세자 의안대군의 아내 현빈 유씨가 내시 이만간통한 사건으로 인해 이만은 처형되고 세자빈은 폐출된 것에서 시작되어, 이후부터는 거세한 사람들만 내시가 되게 함으로서 내시와 환관의 차이가 없어졌다.

흔히 내시는 죽을 때까지 궁 안에서 사는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어느 쪽이든 고령이 되면 진상품 관리 등의 파견명목으로 궁 밖에 나가 말년을 보냈다. 경상북도 청도군 임당리에 있는 7동짜리 한옥이 그중 하나로 내시들의 양로원 같은 역할을 하던 장소다. 집안이 부유하거나 돌봐줄 수 있는 가족이 있으면 귀가해서 살 수도 있었다. 이는 궁녀도 마찬가지다. 이는 오로지 왕과 왕족만이 궁궐 안에서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도 내시의 체력이 중시되었으며 기록엔 두 내시를 밧줄로 묶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 뛰게 했다는 내용이 있다.

내시들은 환관이 되기 위해 잘라낸 자신의 고환을 잘 말린 후 '양물단지'에 보관했다. 죽은 후 고환을 다시 몸에 접합시켜 관에 넣어야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속설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시들은 자신의 고환이 담긴 양물단지를 보물처럼 아꼈다. 서울특별시 노원구 월계동의 초안산에 분묘군이 있는데, 여기 묻힌 사람들의 상당수가 내시다.
파일:93369_73519_2727.jpg 파일:image_readtop_2017_216431_14908566652829567.jpg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조선시대 내시 임진왜란 공신이었던 내시부 상선 김새신 영정

일부 사극에서 묘사되는 조선시대 내시들은 뿔이 없는 사모를 쓰고 흉배가 없는 녹색 단령을 입는 것으로 나오는데, 고증 오류이다. 조선시대 때 그려진 내시들의 초상화를 보면 일반 관료들처럼 뿔이 있는 사모를 쓰고 품계에 따른 흉배가 달린 관복을 입었다.[6]

조선시대 내시들이 뿔이 없는 사모를 쓰고 사극 드라마에 나오는 이유는, 과거 흑백 TV 때문이다. 상복 색으로 품계와 직책을 구분하던 조선 사회이다 보니 흑백 TV에서 사극을 방영할 때 지위고하를 시청자들이 인지할 수 없었고 드라마 제작측에서 내시를 다른 문신들과 구분하기 위해서 사모 뿔을 일부러 잘라낸 채 연출을 하였다. 그 때 자리잡은 이미지가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것이다.

내시라고 하면 보통 거세한 남자들 특유의 유약한 이미지가 지배적인데, 내시들은 왕의 최측근인 동시에 비상시 경호의 역할도 맡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무예를 익혔고, 생각보다 강인한 집단이었다. 무협지에서도 내시들이 힘을 숨기거나 하는데, 실제에 의거한 것이다.

3. 중국사

내시 직종의 원조인 중국 왕조들의 경우 아주 오래 전인 춘추전국시대부터 내시가 곧 환관인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인구의 차이 및 내명부로 대표되는 궁궐 내 분위기의 차이 등으로 보인다. 춘추전국시대 제환공의 말년을 끝장낸 수초가 환관인 내시였다.

역사서 사기의 저자 사마천을 환관 내시로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히는 처음에는 일반적인 관직 생활을 했으나 죄인으로 몰려 궁형을 당한 것이고, 궁형을 당한 후에야 사실상 환관[7]으로서 일했다.

4. 대중매체


[1] 여기서 시(侍)는 일본의 사무라이(侍(さむらい、サムライ))와도 의미가 통하는데, 한자가 같다.[2] 삼국지에서 허저가 조조의 신임을 얻게 된 사건이 있었는데, 조조가 자고 있을 때 하후돈이 막사에 들어가려 하자 그걸 제지하면서 '공은 인척에 떳떳한 중신이고 이 사람은 한낱 내시에 지나지 않으나, 일국의 승상이 잠을 청하는데 누군가가 들어가는 것을 내버려둘 수 없다'라는 말을 한 사건이다. 또한 장송이 양수에게 '중신이 되어야 할 이가 승상부의 내시를 하고 있다'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이와 같은 사례는 무수히 많다.[3] 임시 관직. 경국대전에는 대군사부, 왕자사부, 왕손교관 등으로 정이되어 있다.[4] 무신정변의 주역인 이의방의 동생이자 이성계의 6대조인 이린이 무신정변 이후 내시집주로 재직하였다.[5] 그런데 정작 환관이라면서 한뢰가 멀쩡히 수염을 달고 있어 작가가 고자의 고증도 완벽히 실패했다.[6] 여말선초가 배경인 사극이자 고증 반영면에서는 뛰어난 용의 눈물이나 왕과 비, 대왕 세종에서는 내시들도 사모와 단령을 착용하고 다닌다. 또한 영화 남한산성에서도 인조 옆에 붙어다니는 상선 역시 맞는 복식을 하고 나온다.[7] 사마천이 후일 받은 관직 중서령은 보통 환관들이 맡는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