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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5 05:49:02

루돌프-크리스토프 폰 게르스도르프


파일:나치 독일 국장(화이트).svg 독일 국방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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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6><colcolor=#fff> 루돌프-크리스토프 폰 게르스도르프 남작
Rudolf-Christoph Freiherr von Gersdorff
파일:루돌프-크리스토프 폰 게르스도르프.jpg
이름 Rudolf-Christoph Freiherr von Gersdorff 
루돌프-크리스토프 폰 게르스도르프 남작
출생 1905년 3월 27일
독일 제국 슐레지엔
사망 1980년 1월 27일 (향년 75세)
독일연방공화국 뮌헨
복무 독일 국가방위군
독일 국방군
최종 계급 파일:Si_6a.png 육군 소장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주요 보직 제7군 참모장
주요 서훈 기사십자 철십자장
독일연방공화국 공로장

1. 개요2. 전간기3. 제2차 세계 대전과 자살 테러 시도4. 서부 전선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5.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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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돌프-크리스토프 폰 게르스도르프는 나치 독일 국방군의 소장이자, 서독의 자선 운동가였다. 최종 군사 계급은 육군 소장. 히틀러 암살 시도에 두번 참가하였었다.

2. 전간기

1905년 슐레지엔에서 남작가 출신의 독일제국군 대위 에른스트 폰 게르스도르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훗날 소장까지 진급하게 된다. 뤼벤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923년 사관생도로 국가방위군에 입대한다. 우연의 일치로, 그가 훈련을 받았던 브레슬라우는 그의 선조들이 대대로 복무하였던 곳이었다. 1926년에는 소위로 임관하고, 1938년 대위로 진급한다. 1938년부터 1939년까지는 베를린의 전쟁 대학에서 참모 교육을 받는다.

3. 제2차 세계 대전과 자살 테러 시도

폴란드 침공 당시, 게르스도르프는 제14군의 참모였다. 폴란드 전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그는 프랑스 전선에서 아르덴을 돌파하는 역할을 맡은 제12군의 제86보병사단 지휘부로 이동한다.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 1941년 5월, 그는 훗날 중부집단군으로 명명되는 B집단군으로 아프베어 장교로 이동하게 된다. 중부집단군에서, 그는 여러 잔학 행위를 목도하며 헤닝 폰 트레슈코프 등 반나치 세력과 접촉하게 되고, 히틀러를 향한 자살 폭탄 테러도 모의한다. 그러다가 1943년 3월 21일, 히틀러가 베를린에서 소련군 노획 무기들을 전시하도록 하였을 때 그는 전시회의 설명자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때 그는 영국제 폭탄을 코트 주머니 속에 넣어놓고 히틀러를 포함한 괴링, 힘러, 카이텔, 되니츠 등 수뇌부와 함께 폭사할 심산이었는데, 뇌관을 점화하자마자 하필 히틀러가 2분만에 건물을 떠나버렸다. 폭탄의 폭발은 10분 후에야 이루어지기 때문에 암살은 실패했다. 머지 않아 폭발할 폭탄을 끄기 위해 그는 부리나케(...) 화장실로 달려가서 폭탄을 껐는데, 터지기 몇초 전에서야 간신히 끌 수 있었다고 한다. 작전 실패 이후 그는 다시 동부 전선으로 복귀한다.

4. 서부 전선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1944년 2월 1일, 그는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을 격퇴하는 임무를 맡은 제82군단의 참모로 이동한다. 이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모의 당시 그는 동료인 베셀 프라이타크 폰 로링호벤 대령과 함께 아프베어의 영국군 노획 무기고에서 영국제 폭탄을 다시 빼돌리는데 성공했고상습범, 이 폭탄은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사용하게 된다. 사건 실패 이후, 천만다행히도 그의 동료들 중 아무도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아주었기 때문에 그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1944년 7월 28일에는 팔레즈 포위전에서 제7군의 총참모장으로 임명되고, 이때 탈출 작전을 입안하여 7군의 탈출에 기여한 공로로 8월 26일에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여받는다. 1945년 3월에는 소장으로 진급하고, 종전 6주 전에는 함멜부르크로 진입하려는 미군 기갑대대를 격퇴시키기도 했다.

5. 전후

종전 이후 프란츠 할더 등과 함께 미군 군사학자들과 협력하여 2차 대전사를 정리하였다. 이 기간 동안 소련군이 저질렀던 카틴 학살의 유해발굴을 감독했던 고위 장교로서 이를 미군에게 증언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소련의 반발이 예상되어서인지, 이 증언은 뉘른베르크 군사재판에서는 채택되지 않았다. 새로 창설된 독일연방군에 참여하기를 원했으나 거부당했는데, 그는 이후 서독군 및 정부의 인사들이 이전의 반역자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랬을 거라고 회고하였다.[1] 거절당한 뒤로는 자선 운동에 전념하였는데, 구호기사단의 독일 개신교계 분파인 성 요한 기사단을 지원하였다. 그는 이후 성 요한 기사단 산하의 성 요한 자선기구를 설립하여 1952년부터 1963년까지 의장으로 있기도 하였다. 1979년, 여러 사회 공로가 인정되어 서독 정부로부터 독일연방공화국 공로장을 수여받았고, 1년 뒤인 1980년 뮌헨에서 사망한다. 회고록을 남기기도 하였는데, 국방군 무오설에 힘을 실어주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1] 전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는 아직 나치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독일 요지에 나치 출신들이 산재했기 때문에 충분히 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