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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블루멘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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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귄터 블루멘트리트.jpg
이름 Günther Blumentritt
귄터 블루멘트리트
출생 1892년 2월 10일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뮌헨
사망 1967년 10월 12일(향년 75세)
서독 바이에른 뮌헨
복무 독일 제국군
독일 국방군
주요 보직 제4군 참모장
서부전선 최고사령부 참모장
제25군 사령관
최종계급 파일:Si_4b.png 육군 보병대장
주요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서훈 곡엽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귄터 블루멘트리트는 독일 제3제국의 군인으로, 룬트슈테트 원수의 참모로 오랜 기간 활약한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블루멘트리트는 뮌헨시 추밀원 의원이자 도시 계획가인 동명의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1년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했고, 1912년 1월 5일부터 9월 28일까지 단치히 전쟁학교를 다녔다. 이후 11월 29일 소위로 임관했고, 1차세계 대전 기간 동안 1914년에는 대대 부관, 1918년에는 연대 부관, 종전 직전에는 여단 부관 등을 역임했다. 그는 1차 대전 기간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 장병들의 활약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자유군단에서 활동했다가, 국가방위군 중위로 진급한다. 1926년에는 대위로 진급하여 6사단 작전참모로 갔다가, 1930년부터 1933년까지는 19보병연대 중대장으로 있었다. 1933년 가을에 사관학교 교관이 됨과 동시에 소령으로 진급했고,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제7군단 참모로 있다가 중령 진급 후 전쟁 전까지는 19보병연대 대대장으로 있었다.

1939년 9월 2일, 블루멘트리트는 대령 진급과 동시에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상급대장 휘하의 남부 집단군 참모본부로 전속되었고, 그와 함께 폴란드 침공에 참여했다. 이때부터 블루멘트리트와 룬트슈테트는 길고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 1939년 10월 23일, 그는 3일 후에 A 집단군으로 이름이 바뀐 남부 집단군 참모본부의 작전 장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 헤닝 폰 트레슈코프 등과 함께 낫질 작전을 수립했다. 프랑스 침공 이후, 그는 1940년 10월 25일에 제4군 참모장이 되었고, 1942년 1월 17일 소장으로 진급하며 육군 참모본부의 병참참모가 되었다.

1941년. 귄터 폰 클루게 휘하 제4군의 참모장으로 임명된 뒤 소장에 진급한 그는 처음에는 바르바로사 작전에 반대했지만 머지 않아 찬성하게 된다. 그는 대숙청으로 인해 약화된 소련군 지휘체계, 특히 중견 간부들의 질적 약체화로 인해 승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1942년 9월, 블루멘트리트는 다시 서부전선 최고사령관 룬트슈테트의 참모장을 맡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스탈린그라드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건의했고 프란츠 할더 또한 이를 지지했으나 히틀러가 들어줄 택이 없었다. 1943년 1월 3일, 그는 철도 사고로 중상을 입어 일시적으로 쉬어야 했다. 1944년 4월 1일 보병대장으로 진급한 블루멘트리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룬트슈테트의 후임자인 귄터 폰 클루게 밑에서 참모장을 지낸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상관인 클루게에게 쿠데타에 가담할 것을 종용한다. 하지만 클루게는 암살이 성공했는지 확신하지 못하여 이를 거절했다. 쿠데타 실패 이후, 발키리 작전 기간 동안 체포되었던 카를 오베르크헬무트 크노헨 등 프랑스 지역 SS 지휘관들을 만나 잘 구슬리는 역할을 맡았고, 덕분에 많은 국방군 가담자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클루게는 끝내 히틀러에 의해 연루 의혹을 받아 자살했으며 블루멘트리트는 해임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파리 지역 SS 지휘관들이 넘어가준다한들 히틀러의 눈마저 피할 수는 없었기에 블루멘트리트도 목숨이 위험했으나, 히틀러가 그가 연루되지 않았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오히려 계속 복무할 수 있었다.[1]

1944년 가을, 클루게의 후임 발터 모델과 그 이후 다시 돌아온 룬트슈테트 원수 휘하에서 블루멘트리트는 여러 제대의 지휘를 맡았는데, 주로 부재 중인 장군의 대체 복무였다. 1945년 1월, 그는 네덜란드의 사수를 명받으며 네덜란드 내 모든 육해공 지상 전력을 긁어모은 제25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룬트슈테트에게 연합군이 마켓 가든 작전 실패 이후 네덜란드를 우회하여 라인강을 건널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며 25군의 철수를 건의했으나 히틀러는 이를 거절했다. 실제로 연합군은 그의 예상대로 네덜란드를 지나쳐 그냥 독일 본토로 갔고 블루멘트리트의 25군은 완벽히 고립되고 말았다. 이 시기, 그는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훈받는다. 3월 말, 알프레트 슐렘 장군이 부상을 입자 제1공수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 4월, 그는 독일 북해와 발트해 연안에 주둔한 여러 국방군 부대의 지휘권을 맡아 블루멘트리트 군단을 편성하여 지휘했고, 독일 난민들이 소련군을 피해 피난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히틀러가 자살한 뒤 연합군에 대한 저항을 중단할 것을 명령하였고, 북서부 독일군의 항복을 위해 몽고메리에게 특사로 파견되었다.

블루멘트리트는 1945년 6월 1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1945년 6월 1일부터 12월 1일까지 영국군 포로로 있었고, 그 후 1948년 1월 1일까지 미군 포로로 있었다. 1950년대에 블루멘트리트는 서독군의 창설에 관여했고, 군사 역사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출판했다. 1962년작 영화 지상 최대의 작전의 제작에 군사고문으로 참여하기도 했던 그는 1967년 75세의 나이로 고향 뮌헨에서 사망한다.

3. 여담

블루멘트리트가 참모장으로서 오랜 기간 케미를 맞춘 룬트슈테트가 프로이센 출신의 키큰 전형적인 개신교도 북독일인이었던 것과 달리 블루멘트리트는 바이에른 출신의 키작은 전형적인 가톨릭교도 남독일인인 것이 재밌는 대조점이다.

성격은 친절하고, 화법에 능숙했으며, 수다스러운, 매우 사교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괜히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프랑스 SS 지휘관들을 구슬릴 수 있었던 게 아닌 듯.
[1] 왜 히틀러가 그렇게 믿었는지는 미상이지만 블루멘트리트는 남독일-바이에른 비귀족 출신이라는 점에서 히틀러의 개인적인 호감을 샀었을 수는 있다. 히틀러는 전쟁 발발 이전부터 이후까지 기존 독일 군부를 장악하고 있던 북독일-프로이센 융커 귀족 출신 장성들을 경계했고 견제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예컨데 1937년 대령에 불과했던 남독일 평민 출신 에르빈 롬멜을 5년만에 원수로 밀어준 것도 그 일환이었다. 게다가 히틀러 본인부터가 당시 기준으로 남독일에 속하는 오스트리아 출신 평민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