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Fritz Erich Fellgiebel 프리츠 에리히 펠기벨 |
출생 | 1886. 10. 4. 독일국 브레슬라우 부근 푀펠비츠 (현 폴란드 돌노실롱스키에 주 브로츠와프 군 포포비체) |
사망 | 1944. 9. 4. 독일국 베를린 |
복무 |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 암호국 |
최종계급 | 육군 통신대장 |
주요참전 | 발키리 작전 |
서훈 | 철십자 훈장 1·2등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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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 암호국장을 맡았던 독일 국방군에서 둘 뿐인 육군 통신대장(General der Nachrichtentruppe)[1]. 에니그마(기계)를 도입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모든 작전에 에니그마를 사용할 것을 피력하였으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하인리히 힘러, 헤르만 괴링 등의 고위 나치 인사들을 설득시키지는 못했다.2. 생애
히틀러는 펠기벨이 너무 독립적인 사고를 가진 점으로 인해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실력과 경험이 필요했기 때문에 중용하였었다. 군의 에니그마 도입 필요성을 처음으로 이해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편 펠기벨은 히틀러에게 보고되는 모든 통신 업무의 관리를 담당하였기 때문에 베르너 폰 브라운의 V2 개발과 같은 극비의 사실도 모두 알고 있었다.펠기벨은 면식이 있었던 루드비히 베크 육군 상급대장과 그의 후임이었던 프란츠 할더 육군 상급대장과의 친분으로 반 나치 운동에 참여하였었다. 1938년, 히틀러가 주데텐란트의 영유권을 주장함으로 말미암아 전쟁의 전초가 보이자 전쟁을 우려하여 쿠데타를 계획하였던 베크와 할더 장군, 발터 폰 브라우히치 육군 원수, 빌헬름 카나리스 해군 대장, 에르빈 폰 비츨레벤 육군 중장과 한스 오스터 육군 소장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쿠데타 세력이 베를린을 점령할 때 모든 통신 체계를 차단하여 협조하는 방식으로 준비하였으나 영국의 소극적인 태도로 뮌헨 협정으로 마무리되면서 쿠데타는 일어나지 않았다.
펠기벨의 쿠데타 동참 방식은 같은 방식으로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육군 대령이 주도하였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서도 적용되었다. 슈타우펜베르크의 폭탄 암살시도는 실패하였지만 펠기벨은 일단 늑대굴의 통신망을 모두 차단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요제프 괴벨스의 별도 SS 전용 회선은 차단되지 않았기 때문에 완벽한 통신망이 차단되지는 못했고 히틀러의 생존이 전해지면서 발키리 작전은 완전히 실패한다. 더욱이 히틀러 암살 자체도 실패하였었고 이 사실을 모르고 발키리 작전을 시행하고 있었던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등의 쿠데타 수뇌부에 히틀러의 생존 사실을 전달해준다.
"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히틀러가 살아 있다!"
펠기벨은 늑대굴에 남겨져 있었기 때문에 바로 잡혔고 3주간 협조자들을 추궁하는 고문을 당하게 되는데 펠기벨은 협력자들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 펠기벨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인민재판(Volksgerichtshof)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944년 9월 4일에 처형된다.
아들 발터페어 펠기벨(Walther-Peer Fellgiebel) 또한 육군 포병 장교로 임관, 사건 당시 대위였으며, 기사 철십자장까지 수훈했다. 당시 독일에는 연좌제가 있었기에 펠기벨 대위 등 가족들도 그해 08월 01일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펠기벨 장군이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과 친분이 있었던 덕분에 11월 09일에 석방되어 소령으로 진급, 종전시까지 살아남아 전후 기사십자 수훈자 협회 운영에 주요 멤버로 참여한다.
독일 정부는 그의 희생을 기려 독일 연방군의 육군 참모 대학 신호정보학부의 명칭을 그의 이름을 따 General-Fellgiebel-Kaserne로 명명했다.
작전명 발키리에서는 영국인 배우 겸 코미디언 에디 이자드[2]가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