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Theodor Busse 테오도어 부세 |
출생 | 1897년 12월 15일 독일 제국 브란덴부르크주 프랑크푸르트안데어오데르 |
사망 | 1986년 10월 21일 서독 바이에른주 발러슈타인 |
최종 계급 | 육군 보병 대장 |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주요 서훈 | 기사십자 철십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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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독일 국방군의 군인.2. 제1차 세계 대전
부세는 1915년, 사관 후보생으로 임관했으며, 그리고 1917년 실전에 배치됐다. 이후, 전투에서의 공적으로 호엔촐레른가 기사 훈장을 수여받았다. 세계 대전 종전후, 그는 국가방위군의 엘리트 장교중 한명으로 선발되었다.3. 제2차 세계 대전
3.1. 전쟁 초기
전쟁 초기에는 주로 후방 업무 및 참모로서 일했다. 이후, 1939년 8월, 참모총장이 승인한, 1939년 10월 1일부터 1940년까지의 대규모 육군 기동 훈련을 지도하였다.3.2. 만슈타인의 작전 참모
1940년 ~ 1942년에선 동부전선 11군에 소속되어 당시 장군이였던 만슈타인의 작전 참모였다. 그는 만슈타인의 돈 집단군 1943년까지 작전 참모로서 만슈타인을 보좌했다.[1]
이후 1943년, 부세는 남부 집단군 참모장으로 임명됐다. 그후, 1944년 1월 30일,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여받았다. 그후, 부세는 제1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3.3. 베를린 공방전
1945년 1월 21일, 9군으로 임명되어야 했지만, 부세의 임명은 확정되지 않았다, 이유는 당시 독일국에선 참모가 군을 지휘하려면 의무적으로 6개월간 견습 및 적응 기간이 필요한데,[2]
소련군이 베를린으로 계속 진격하자, 사령부는 부세에게 위치 사수를 명령했다. 9군은 베를린 전투 당시 소련군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지만, 실패하였고,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장군은 가망없는 짓이라며, 포기하라고 설득을 시도했지만, 부세는 총통으로부터 명령이 오기 전까지 움직이거나, 빠져나오지 않겠다고 못박았다.[3] 결국 부세의 9군은 소련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고, 그리고 할베 전투에서 사실상 9군은 괴멸 직전까지 갔다. 그 후 남은 병력은 발터 벵크의 12군과 합류하여 소련군으로부터 엘베강을 방어했다.
이후, 5월 4일에서 7일 부세의 9군은 완전히 무장해제와 동시에 미군에게 항복하였다.
4. 이후
이후에는 서독 민방위 총감이 되고,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자신의 경험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 1986년 바이에른주 발러슈타인(Wallerstein)에서 8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1] 1943년, 히틀러에게 성채 작전에 대해 설명하는 만슈타인과 부세. (만슈타인 왼쪽이 부세다.)[2] 히틀러가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부세다. 사진은 1945년 3월 3일, 비스툴라 집단군 사령부에서 회의하는 아돌프 히틀러, 테오도어 부세,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빌헬름 베를린 포병 대장,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 상급 대장[4], 프란츠 로이스 소장, 잡 오데브레셰트 방공 대장[3] 영화 다운폴에도 묘사되어있는데, 사실 이미 빌헬름 카이텔 원수는 부세의 9군이 후퇴해야 한다고 히틀러에게 보고했지만 그의 전선유지 고집으로 결국 9군은 포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