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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23:47:03

소련인

1. 개요2. 인구 구성3. 비러시아인 민족 대우4. 소련 붕괴 이후5. 관련 항목

1. 개요

한자:
러시아어: Советский народ (싸볫스키 나로드)
우크라이나어: Радянський народ(라댠스키 나로드)
벨라루스어: Савецкі народ(사베츠키 나로트)
카자흐어: Совет халқы / Sovet xalqı (소베트 할크)
아제리어: Sovet xalqı(소베트 할그)[1]
조지아어: საბჭოთა ხალხი(사브초타 할히)
아르메니아어: Խորհրդային մարդիկ(호르흐르다인 마르티크)
타지크어: Одамони советй(오다모니 소베티)

소련에 살았던 제민족들을 통칭하여 일컫는 말.

소련의 민족구성은 매우 복잡하여 인구의 51%를 차지하는 러시아인 외에도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라트비아인, 우즈베크인, 아르메니아인, 타지크인, 조지아인, 볼가 타타르인들처럼 자기의 공화국이나 자치공화국을 가진 주요 소수민족, 그리고 자기의 자치단위를 갖지 못한 기타 소수민족 등 100개 이상의 크고 작은 민족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혼혈이었다.

소련의 역대 최고지도자 중에도 소수민족 출신이 많다. 블라디미르 레닌아버지볼가강 서안에 거주하던 튀르크추바시인이었고 할머니칼미크인이었으며 어머니 알렉산드라는 기독교로 개종한 아슈케나짐 유대인이므로 가계의 1/4은 튀르크족, 또 1/4은 몽골족, 1/2는 유대인이였다. 레프 트로츠키우크라이나 유대인 출신이고 이오시프 스탈린러시아어조차 조지아어 억양으로 어색하게 말하는 조지아인이었으며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우크라이나계였다. 물론 소련의 정치와 주류사회는 다수민족인 러시아계 정체성을 중심적으로 흘러가기는 했다.

소련인이라는 개념은 민족이 아니라 일종의 국가정체성으로서, 미국인, 중국인이라는 개념과 비슷하다. 소련은 민족주의를 매우 경계하였는데 첫번째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따르면 자본가들은 민족(nation) 개념을 통해 노동자가 공동체의 구성원이라고 인식하게 만들어 실제로는 자본가가 주축을 이루고 있는 정치체제를 유지하며 노동자들을 값싸게 징병 등을 하려는 수단으로 자본가가 노동자노예로 만드는 이데올로기로 봤고 두번째는 소련은 러시아계가 51%, 비러시아계가 49%를 차지한 다민족국가라 "특정 민족"을 내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2] 개별 공화국에서는 그 공화국 이름과 일치하는 민족이 다수 민족을 차지했다.[3] 그리고 그 민족은 다른 공화국에서는 소수 민족이 됐다.

2. 인구 구성

큰 틀에서 소련인의 70%는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등 동슬라브 계통이었고 12%는 우즈베크인, 카자흐인 등 튀르크계 민족이었다.

1989년 통계에서 민족별 인구 순서는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우즈베크인, 벨라루스인, 카자흐인, 아제르바이잔인, 타타르, 아르메니아인, 타지크인, 조지아인, 몰도바인, 리투아니아인, 투르크멘, 키르기스, 독일계 러시아인, 추바시인, 유대인, 모르드바인, 폴란드인, 에스토니아인 순이었다.

소련 붕괴 이후에는 독일인, 유대인, 폴란드인 인구는 대부분 구소련 지역을 떠나 해외로 이주하였고 슬라브계나 우랄계 인구는 소련 붕괴 이후 저출산 문제가 심각해지고 해외로 이주하는 경우가 흔해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튀르크계나 캅카스 지역 주민 등등 무슬림 민족들은 대개 출산율이 인구대체수준 이상을 유지하여서[4] 소련 붕괴 이후에도 인구가 감소하기는커녕 오히려 증가한 편이었다.

3. 비러시아인 민족 대우

소련을 건국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평소 러시아 제국의 러시아 우월주의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삼는 것을 반대할 만큼 적어도 건국 초창기에는 민족자결노선을 지지했다.

이에 따라 건국 초창기 소련 전역에서는 러시아인이 아닌 민족에게 현지화(коренизация, 코레니자치야)를 통해 민족어 교육이나 민족문화 육성을 장려하는 한편 장차 사회주의 건설에 동원하기 위해 학자들을 중심으로 문맹 타파를 목적으로 한 문맹퇴치운동(ликбез)을 벌여 소련 내 민족들에게 라틴 문자를 보급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소련 내 문해율은 1913년 27%에서 1939년 90%에 가까울 정도로 큰 성과를 보였는데 다른 식민제국들과 비교하면 프랑스포르투갈 식민지들은 20세기 중반까지도 식민지 인구 절대다수가 문맹이었다. 소련 붕괴 이후 독립한 중앙아시아 5개국과 영국, 프랑스 식민 지배를 겪었던 아랍 국가들의 문맹률이나 고등교육 이수율 같은 요소를 비교할 수 있다. 소련은 광대한 영토에 수백여 가지 민족이 공존하던 다민족국가였고 이런 국가에서 문맹을 퇴치한 성과는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924년 집권한 이오시프 스탈린은 원래 러시아인이 아니라 소수민족조지아인임에도, 레닌으로부터 소수민족 문제에 있어 대러시아 민족주의자라는 평을 들을 만큼 러시아 패권주의적인 성향을 보유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1930년대 들어 현지화 정책을 루스화(русификация, russification) 정책으로 수정하기 시작했다. 연방 내 공화국과 자치주들에서 민족주의 성향 엘리트를 숙청하는 한편 소련 중앙정부의 시각에서 볼 때 적대적인 민족은 가차없이 제거되거나 강제이주되었다. 레닌 시기 집행됐던 소수민족 언어의 라틴 문자 보급 정책도 폐기되어 키릴 문자로 대체되었다.

특히 스탈린의 농업집산화 정책 추진 시대에는 소련 각지에서 엄청난 인명피해와 기근이 반복되었는데 러시아인 중에서도 희생자가 많았지만 비러시아인 인구 손실은 그보다 더 큰 경우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1932년부터 33년 사이 농업집산화에 반대하던 우크라이나카자흐스탄 일대에 대기근이 유명하다. 자세한 내용은 우크라이나 대기근 문서 참조. 비슷한 사례로 1921~22년 볼가 강 하류 일대의 식량 배급을 끊어서 타타르인독일계 러시아인 인구 수십만여 명이 기아로 사망했던 역사 역시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 정책으로 해석 가능하다.

스탈린의 비러시아계 인구 탄압은 1930년대1940년대에 들어 절정을 이뤘는데 당시 소련 전역에서는 고려인을 비롯해서 폴란드인, 에스토니아인, 라트비아인, 리투아니아인, 볼가 독일인, 칼미크인, 체첸인, 인구시인, 크림 타타르인 등이 원래 살던 곳을 떠나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같은 오지로 이주당했다. 이는 원래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에 노동력을 투입시켜 개발하는 한편 이주 과정에서 현지 인구를 러시아인으로 대체하고 독립이나 분리주의를 뿌리뽑으려는 의도였다.

스탈린 집권 시기부터는 서서히 소수민족 언어에 클레임이 들어오더니[5] 러시아어가 강제되어서 레닌 시절과는 다르게 자신들의 언어를 배울 기회가 크게 줄었다. 문맹이 줄었지만 러시아어 사용자만 늘고 자국어 구사자는 줄어들었는데 이는 현재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같은 일부 구 소련 구성국에서 언어 교정 및 민족언어 회복에 장애가 되고 있다.

특히 타 공화국으로 이주한 러시아인들은 러시아어가 사실상 전국 단위 공용어였기때문에 현지어에 서툴러도 일하거나 의사소통하는 데 별 다른 지장이 없었다. 따라서 러시아인들은 현지어 공부에 열성적이지 않아 현지어 구사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소련 당대에야 소련이 붕괴될 것이라는 생각을 못 했으니 별 생각이 없었겠지만 소련 붕괴 후에 이것이 상당한 골칫덩어리가 되었고 특히 라트비아에스토니아에서 자국어 시험에 합격을 못 하면 아예 시민권을 주지 않는 정책을 폈기 때문에 많은 수의 러시아인들이 무국적자가 되면서 사회불안 요소가 되기도 했다.

스탈린 사후 소련 후기에는 인종차별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비러시아인들에게는 유리 천장과 비슷한 사회적 제약이 존재했다. 가령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건국 이후 국외 이민을 우려해 특히 공공기관이나 연구소, 교육기관에서 고위직으로 진급하는데 제약이 있었다. 정치적으로 핵심보직이나 군에서 전략미사일군이나 원자력 잠수함같은 주요 보직에는 러시아인들을 비롯한 슬라브인 출신들이 우선적으로 배치된다든지, 과거 강제이주 당한 민족은 거주 이전[6]에 불이익이 있다던지 하는 보이지 않은 영역에서 은근한 차별이 많이 있었다.

특히 소련 시민이라면 의무적으로 발급되는 시민여권[7]에는 민족명이 기재되었고 모든 소련인은 이를 바탕으로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좋든 싫든 출신민족을 의식할 일이 많았다. 소련인들은 이 항목을 일컬어 "제5항(пятая графа)"#라고 불렀고 이런 현상은 소련이 무너진 후 러시아에도 어느 정도 남아 있다.[8]

4. 소련 붕괴 이후

소련 붕괴 이후 소련인들은 각 독립 공화국의 국민으로 개별화되었으나 소련에 대한 향수가 강한 러시아 등지에서는 소련인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 2010년 러시아 인구 센서스에서는 27,000명이 자신들을 소련인이라고 자칭했다.#[9]

러시아뿐만 아니라 그 외 구소련 출신 14개국에도 2014년에 발발한 돈바스 전쟁에 친러시아 분리주의 세력에 자발적 의용군으로[10] 가담한 아르메니아인, 중앙아시아 각국 출신들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여전히 소련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예를 들면 이 아저씨.

20세기 중반 서구 열강의 식민제국이 무너진 후에도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식민모국을 우호적으로 바라본 사람들이 있었듯이 중장년 이상 계층에서는 자신을 소련인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드물게 발견된다. 이들은 대부분 러시아어가 더 친숙한 러시아계거나 소련 때 다른 소련 자치 공화국에서 이주해 온 경우가 많았다. 중앙아시아 국가나 캅카스 등지에 거주하는 중장년 세대는 소련인이라는 인식까지는 아니어도 열악한 경제사정으로 인해 소련 시대를 그나마 경제적으로 나았을때라면서 향수를 느끼는 경우도 있다.[11] 러시아에서는 소련 시절을 경험한 세대들은 일자리는 물론이고 아파트와 별장도 주어지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현재까지 불평하는 경우는 많이 있기는 하다.[12] 다만 소련이 무너진 지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러시아계 또는 러시아인을 제외한 다른 독립국가연합에 거주하는 젊은 세대들은 중장년 세대만큼 소련에 소속감을 느끼지 않는다. 애초에 이들은 출생할 때부터 "소련인"이 아니었던 만큼 과거에 존재했던 국가보다 현재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 온 나라에 소속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소련 시절 중앙정부로부터 탄압을 경험한 적이 있던 발트 3국이나 캅카스에서는 대체로 소련 시절을 점령기로써 여기고 소련을 싫어한다. 러시아에서도 소수민족 자치 공화국이나 젊은 세대들도 소련을 싫어하거나 혐오하기도 한다. 한편 러시아계 인구가 많은 편인[13] 라트비아에스토니아에서는 독립 이후 소련 점령 이전 국적법에 따라 소련 시절 이주해왔던 사람 중 현지어를 못 하는 경우 무국적자로 처리되었다. 이들 중에는 고향인 러시아나 다른 국가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이 나빠서 그대로 발트 3국에 정착하거나 현지인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다만 소련 붕괴 이후 출생한 젊은 세대들은 대체로 현지에서 자라면서 현지어를 접하거나 현지어로 교육받을 기회가 많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14] 오늘날에는 대체로 현지에서 잘 적응한 편이다. 무국적자도 꾸준히 감소하여 라트비아에서는 1991년 71만명에서 2022년 19만명으로 상당히 줄어들었다.

5. 관련 항목



[1] 러시아어에서 온 단어들은 여전히 원어식으로 발음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러시아식으로 "사볘트 할그" 식으로 발음된다.[2] 다만 스탈린 집권 후부터 러시아인을 타 연방 국가로 대거 이주시키거나 러시아어를 강제하기는 했다.[3] 예외는 소련 중기까지의 카자흐 SSR로 한때 러시아인이 다수민족이었다. 물론 소련 초기에는 카자흐인이 다수민족이었지만 1930년대 전반기의 대기근으로 카자흐인들의 1/3이 아사하고 남은 카자흐인들 가운데서도 굶주림을 피하고자 튀르키예, 위구르, 페르시아 등 해외로 떠나는 사람이 많아 인구가 급감했다. 이에 모자라는 인구를 채우려는 목적에서 러시아인이나 우크라이나인들처럼 이주에 혜택을 내보내던지 고려인, 크림 타타르인, 체첸인처럼 강제로 이주시키는 방식으로 인구를 채우는 과정에서 카자흐인과 러시아인 간의 인구가 비슷해졌고 1950년대 흐루쇼프처녀지 개간 운동으로 우랄시베리아카자흐스탄의 처녀지를 개간하는 과정에서 인력확충을 위해 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들을 대거 카자흐스탄에 파견보내며 한때는 러시아인이 43%인데 카자흐인은 29%에 불과한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다.[4] 물론 나라나 지역별로 케바케라서 타타르스탄의 타타르인들은 저출산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사례가 있고, 아제르바이잔도 2010년대 중반에 석유붐이 끝나고 나서 베이비붐도 같이 끝나, 출산율이 1.5명대까지 하락하여 저출산 국가가 되었지만, 동유럽권 민족들보다 사정이 대체로 나은 편이다.[5] 가령 로마자를 쓰는 언어의 표기를 키릴 문자로 바꾸거나 성을 본래 쓰지 않는 지역에 성을 쓰게 한다든지.[6] 소련은 원칙적으로 토지나 주택이 국가 소유였기 때문에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려면 반드시 관청의 거주 이전 허락을 얻어야 했다.[7] 한국의 주민등록증에 해당한다.[8] 현 러시아의 국방장관인 세르게이 쇼이구(투바+슬라브 혼혈) 같은 경우는 푸틴과의 친분 때문에 승진한 것이다.[9] 비슷하게 구 유고슬라비아 국가들에서는 자신들을 '유고슬라브인'이라 칭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 주로 유고계 미국인들이지만 세르비아에 2만, 그 외 구유고 국가들에서 수백~수천명 정도. #[10] 러시아군 정규군이 투입된 것도 확실하지만 자발적 의용군도 존재한다.[11] 특히 고등교육을 받고 소련 당국 밑에서 소련군, 교사, 공무원 등의 일을 하며 소련 체제에 잘 적응하던 사람일수록 그 경향이 강하다.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로부터의 지원이 끊기자 해고되어 빈민으로 전락해 버린 경우가 많은데 이들은 아직도 자신의 조국을 소련이라고 생각하거나 소련 시절이 살기 좋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12] 한국에서도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산업화와 군사독재를 경험한 세대가 박정희군사독재 시절을 미화하는 현상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차이점이라면 러시아는 민주화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경제가 박살났다는 것 정도.[13] 대부분 러시아 접경 지역인 동부 및 수도에 집중적으로 거주한다. 대개 인구의 25% 수준이고 리투아니아는 비율이 좀 낮아 10% 정도.[14] 발트 3국은 현지에서 사용하는 모국어를 배우고자 할 경우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제도가 잘 갖추어져 있어서 현지어 교육의 접근성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15] 소련 붕괴 이후 출생하여 소련인 정체성을 갖고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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