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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23:26:44

에스페란스 곶 해전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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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해전의 경과
2.1. 발단2.2. 규모2.3. 전개2.4. 전투2.5. 피해2.6. 일본군 패배의 원인2.7. 고토 아리토모
3. 해전 이후4. 관련 링크

1. 개요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과 일본군 사이의 해전.

2. 해전의 경과

2.1. 발단

과달카날 전투 당시, 미군이 제공권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군측은 비행기가 뜨지 못하는 야간전 위주의 작전을 행하고 있었다. 아오바를 포함한 제6전대는 밤을 틈타 미군의 헨더슨 비행장을 기습포격함으로서 적의 시선을 끌어 동시에 진행되는 일본의 물자수송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고 헨더슨 비행장을 향해 출발. 하지만 선행하고 있던 수송함대가 미군 정찰기에게 발견되고, 이 수송함대를 저지하기 위해 미 해군의 제64기동부대를 출동하면서, 1942년 10월 11일, 에스페란스 곶 해전이 벌어진다.

2.2. 규모

양측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일본 해군 미국 해군
제6전대
아오바급 중순양함 아오바
아오바급 중순양함 키누가사
후루타카급 중순양함 후루타카
후부키급 구축함 후부키
후부키급 구축함 하츠유키

수송함대
수상기모함 닛신
치토세급 수상기모함 치토세
아사시오급 구축함 아사구모
아키즈키급 구축함 아키즈키
후부키급 구축함 무라쿠모
아사시오급 구축함 나츠쿠모
후부키급 구축함 시라유키
아사시오급 구축함 야마구모
TF 64
뉴올리언스급 중순양함 샌프란시스코
펜사콜라급 중순양함 솔트레이크 시티
세인트루이스급 경순양함 헬레나
브루클린급 경순양함 보이시
글리브스급 구축함 던컨
벤슨급 구축함 래피
글리브스급 구축함 맥칼라
글리브스급 구축함 뷰케넌
벤슨급 구축함 파렌홀트

2.3. 전개

증원부대는 제6전대와 분리되어 목적지로 향했고, 일본군은 수송함대를 위협하는 핸더슨 비행장에 폭격을 가하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다. 이윽고 미군 정찰기가 14시 45분에 일본군 수송함대를 발견했고, 제64기동부대가 이들을 잡기 위해 출동한다. 제64기동부대의 지휘관인 노먼 스콧 소장은 신형 레이더를 장비한 경순양함 헬레나 대신 구식 레이더를 장비한 중순양함 샌프란시스코를 기함으로 삼았는데, 이것은 나중에 문제를 일으킨다.

21시 30분 무렵에 제64기동부대의 순양함에서 정찰기 3대를 발진시키는데, 그 중 한 대가 조명탄 발화 사고로 추락한다. 이걸 본 고토 소장은 과달카날에 있는 아군이라고 착각해서 발광신호를 보내지만, 거리가 멀어서 응답은 없었다. 일부 장교가 적일지도 모른다고 진언했지만, 사보섬 해전에서 영혼까지 털린 미 해군이 밤에 나타날 리가 없다고 오판한 고토 소장은 그 의견을 무시했다. 다만 영문위키에서는 정찰기 한 대가 추락했다는 말은 있어도 고토 소장이 이걸 봤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어쨌든 미군 정찰기들은 일본군의 수송함대를 포착해서 스코트 소장에게 보고했고, 스콧 소장은 일본함대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수색을 계속했다라고 쓰여 있었으나 이는 말이 안되는데 미군이 이 작전을 펼친 이유는 일본군 수송함대를 저지하는 것이다. 근데 그런 수송함대를 놔두고 다른 함대를 찾는다는건 이치에 맞지 않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스코드 제독의 기동부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수송함대는 과달콰날 해안에 도착을 한 상태였고 기다려도 수송함대가 보이지 않자 다시 정찰기를 띄우는데 일본군이 이미 해안에 도착해 하역중이란 정찰보고에 미군 측이 당황했다는 기록이 있다. 결국 미군은 증원부대인 6전대의 존재 자체를 몰랐던 것이다. 한편 미군 함대를 만나지 못한 일본군의 수송함대 지휘관인 조지마 소장은 "이 근처에 미군이 없다"는 보고를 고토 소장에게 보내는데, 직후에 미군이 재차 띄운 정찰기가 지나갔다. 조지마 소장은 급히 미군 발견의 보고를 보내지만, 이 보고는 고토 소장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23시 32분, 경순양함 헬레나의 신형 레이더가 제6전대를 발견했고 곧 보이시와 던컨의 레이더도 아오바를 포착했다. 애초에 이쪽은 명확한 요격임무를 위해 출격하여 해당 해역에 자신들 외에는 모두 적이라는 것을 알고있는 상태였던지라 보다 대응이 빨랐다. 게다가 마침 상황도 일본군이 미군의 옆구리로 들어오는 T자 형태로 유리한 상황.

당시 미 함대는 선두의 구축함 3대를 필두로 1자 대열로 항해중이였는데 [1] 스콧 제독이 함대 변침명령을 내리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스콧 제독이 내린 명령은 함대가 형태를 유지하며 변침을 하는 것이였는데[2] 무전기의 이상으로 선두에 있던 구축함 세 척이 바로 변침을 하여 함대에서 떨어져나가 낙오해버린 것. 결국 미군측도 사라진 이 구축함들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아군을 오사하는 사태를 우려해 뻔히 일본측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서도 사격을 개시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는 동안 아오바의 초계병이 7km 전방에서 미군의 제64기동부대를 발견. 하지만 해당 해역은 6전대 앞에서 일본의 물자수송을 위해 선행하는 수송함대가 있는 상황이었고, 사전 정찰정보로 '해당 해역에는 적함대가 없다'는 보고를 받았던 제6전대의 사령관 고토 소장은 이를 아군의 수송함대로 오인하고 만다.

전투개시전까지 아오바에 탑승하고 있던 제6전대 사령관 고토 소장이 꽤나 조심스러운 움직임을 취했던 것은 대부분의 기록이 일치한다. 미함대를 아군이라 생각하면서도 만약을 대비한 최소한의 대처는 했다는 소리. 다만 미군 측에서는 완벽한 기습이라고 단언하고 있으며, 일본군 수뇌부도 제6전대의 경계실패를 비판한 게 사실이다.

도입부에서의 영문 위키와 일본어 위키의 서술방향이 상당히 다르다. 영문 위키에서는 조지마 소장의 삽질과 미군 SG레이더의 강력함으로 일본군 제 6전대를 먼저 포착하고 접근하는 방향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고토 소장이 미 함대의 접근을 눈치챘다는 이야기는 일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어 위키 쪽에서는 조지마 소장의 실패가 빠져 있고, 고토 소장의 실수 쪽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2.4. 전투

끝내 일본측이 육안으로 확인이 되는 4500m 거리까지 다가오자 조바심이 난 경순양함 헬레나에서 기함 샌프란시스코에게 '사격허가를 바란다'는 통신을 보내고, 이에 샌프란시스코는 '통신을 수신했다'는 뜻으로 'Roger'라는 답변을 보냈는데, 헬레나가 이것을 '사격을 허가한다'로 잘못 알아먹은 통에 헬레나가 포문을 열었고, 이에 이끌리듯 다른 미군함들도 포격을 시작하면서 전투가 개시. 결과적으로 레이더도 아니고 전력차도 아니고 사전정보도 아닌 이 오해에 의한 선제공격이 전황을 미군에게 유리하게끔 만들어주게 되었다. 스코트 제독은 평소 훈련에서 "야간전에서 함장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발포해라"라고 강조했으므로 잘못한 건 아니었다.

이때 미확인물체를 살피던 아오바의 항해장이 적의 정체를 파악하고 "저건 적입니다!"라고 보고하자 비상이 걸렸다. 아오바의 함장이 황급히 총원전투배치를 명령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서 헬레나의 포탄이 아오바의 함교에 직격하고, 불발탄이었는지라 포탄이 터지진 않았는데 대신 함교의 벽 내부를 이리저리 튕겨다니며 아오바의 함교를 박살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전투개시와 동시에 제6전대의 지휘계통은 괴멸되었으며, 아오바는 함교 외에도 2번 포탑과 사격 방위반과 통신장비를 파괴당해 전투능력을 상실했다.

여기서 일본과 미국의 주장이 갈리는데, 일본측 주장은 아오바가 경계를 위해 우선회를 시작하다가 포격에 맞았다는 것이고, 미국 측 주장은 제6전대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가 미군의 기습포격을 당했으며 이후에 고토 소장이 우선회를 명령했고, 그 후에 아오바의 함교에 포탄이 명중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의 주장이 사실이든간에 결과는 어차피 똑같았고, 일본군은 1분동안 아무 것도 못하고 처맞았다. 이때 아오바가 적함을 아군으로 착각하고 와레 아오바라는 발광신호를 보냈다는 주장이 있는데, 결론만 말하자면 와레 아오바 이야기는 신빙성이 없다.

여기서 미군이 그냥 포격을 계속했다면 일본군은 괴멸되었겠지만, 전투가 벌어지고 난 뒤로도 스코트 제독은 사라진 아군 구축함을 포격하는게 아닌가하여 다급하게 사격중지 명령을 내리고, 4분 동안 포격을 멈춘 뒤 구축함 2척의 소재를 확인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실제로 이때 낙오한 미 구축함 던컨과 파렌홀트는 아군과 적군 사이에 끼어 양쪽으로부터 집중포격을 얻어맞고 있는 상황이었다. 경순양함 헬레나의 신형 SG레이더를 제대로 활용했다면 포격을 멈출 필요도 없이 제6전대를 괴멸시켰을 것이다.

미군의 공격이 멈춘 틈을 타 태세를 정비한 일본군은 후퇴를 결정. 재빨리 선회한 후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오바는 우선회를 거의 끝냈지만 그 뒤에 있던 후루타카는 그렇지 못해서 우선회 도중 집중포화를 맞게 된다. 여기서도 일본 측에서는 기함 아오바를 구하기 위해 후루타카가 몸을 던져 방패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미국 측에서는 후루타카가 아오바의 뒤에 있어서 우선회가 상대적으로 늦었기에 얻어터졌다고 주장하지만 어차피 두 배 모두 대파된건 똑같았다. 이 와중에 아오바의 3번 포탑에 포탄이 명중하면서 약실 안에 있던 포탄과 장약이 폭발, 아오바는 탄약고 유폭의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3번 포탑의 탄약고에 바닷물을 주수하면서 아오바는 유폭을 모면한다.

한편 좌선회를 실시한 구축함 하츠유키와, 그 뒤를 따라간 아오바급 중순양함 2번함 키누가사는 반격을 가하면서 전속력으로 전장을 이탈했다. 이 과정에서 키누가사는 경순양함 보이스의 탄약고 부근에 포탄을 명중시켜 화재를 일으킴으로서 107명을 전사시켰지만, 키누가사의 포탄이 만든 구멍으로 바닷물이 들어가서 불이 꺼지는 바람에 탄약고 유폭은 없었다.

후부키는 전투 개시 후 7분 만에 침몰해버렸고, 한참을 얻어맞던 아오바와 후루타카는 가까스로 항해능력을 유지한채 전장을 벗어날 수 있었지만, 90발 이상의 포탄을 얻어맞은 데다 산소어뢰 유폭까지 일어난 후루타카는 도저히 재기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던지라 결국 바다에 버려져 그대로 침몰했다.

2.5. 피해

양측의 피해는 다음과 같다.

앞서 가고 있던 일본군의 수송함대는 무사히 과달카날에 도착해서 결과적으로 수송함대 호위는 성공시켰지만 헨더슨 비행장 포격은 실패했고, 제6전대의 상황을 전달받은 수송함대 조지마 소장의 명령으로 이를 도우러 합류한 구축함 무라쿠모가 후루타카의 승무원을 구조한 뒤 후퇴하던 도중 미군의 공습을 받아 항해불능에 빠지고, 또 이 무라쿠모를 구조하던 구축함 나츠구모 역시 공습을 받아 격침된다. 결국 구축함 하츠유키가 3척분의 생존자들을 구조하고, 무라쿠모는 자침처분했다.

이 해전은 야간전에서 무적을 자랑했던 일본 해군이 패배한 첫 야간전이었다. 당연히 미군은 크게 고무되었지만, 미군의 기습이 성공하면서 일본군이 산소어뢰를 제대로 쏘지 못한 탓에 그 위험성을 경시하는 실수를 했다. 타사파롱가 해전에서 얻어맞은 것이 그 때문이다.

다만 이 해전은 전국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일본군은 중순양함 한 척을 잃고 한 척이 대파되었지만, 수송함대가 과달카날에 무사히 도착했으므로 최악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미군 역시 핸더슨 비행장으로 들어오는 수송함대를 지킬 수 있었고, 일본 해군에게 패배를 안겨줌으로서 아군의 사기를 끌어올렸으며, 핸더슨 비행장 포격도 좌절시켰다. 양쪽 모두 치명상은 피한 셈이다.

미군은 아오바가 격침된 줄 알았지만, 아오바는 이 전투에서 40발 이상의 포탄을 맞아 2번 포탑이 손상되고 통신장비, 사격 방위반, 3번 포탑이 파괴되고 함교가 파괴됐는데도 어떻게든 일본으로 돌아가는 데 성공했다. 그 후에도 아오바는 계속되는 미군의 공격에도 살아남아서 최종전인 구레 군항 공습에서 침몰한다.

구축함 후부키의 승무원 중 8명은 일본군과 합류하는데 성공했으나, 함장은 전사했다. 이후 109명이 미군에게 구조되어 포로가 되었다.

미군 구축함 맥칼라는 구축함 던컨의 생존자 195명을 구출한 후 혹시라도 더 있을지 모르는 생존자를 찾아 바다를 뒤지다가 200명에 가까운 후부키의 생존자를 발견했지만 그들은 구조를 거부했다. 그런데 하루 후에 미군 기뢰부설함 호비, 트레버가 이들을 발견하자 순순히 구조를 받아들였다. 상어에게 하룻밤을 시달리고 난 후 마음을 고쳐먹은 것으로 보인다. 200여명이 109명으로 줄어든 이유는 상어로 인해 생존자들의 일부가 잡아 먹혔기 때문이다.

2.6. 일본군 패배의 원인

일본군엔 레이더가 없었다는 것이 에스페란스 곶 해전에서 일본군이 패배한 진짜 원인이다. 미군은 레이더를 통한 전탐으로 일본군을 먼저 발견했다. 일본군이 상황을 알아차렸을 때엔 이미 포탄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렇게 유리한 조건인데도 완승을 거두지 못했으니, 미군이 SG레이더를 좀 더 효과적으로 활용했어야 했다고 땅을 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물론 일본군의 견시는 야간감시능력이 탁월했고, 타사파롱가 해전에서도 레이더 이상의 실력을 보여준 바가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인간의 눈은 레이더를 당해낼 수 없으며, 미군의 레이더가 점점 발전하면서 일본군은 야간전에서도 맥을 못추게 된다. 벨라만 해전에서 일본 구축함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게 그런 이유다[3]. 일본에서는 제6전대의 경계실패를 패배의 원인으로 꼽고 있지만, 그걸 인정하더라도 미군이 일본군을 먼저 발견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본의 주장대로 제6전대의 경계실패가 패인이라면, 패배의 책임은 후부키급 구축함 1번함 후부키에게 돌아간다. 해전이 시작될 당시에 제6전대는 기함 아오바 - 후루타카 - 키누가사 순으로 단종진을 형성했는데, 후부키는 아오바의 오른쪽 앞에 있었고 구축함 하츠유키는 아오바의 좌측 앞에 있었다. 당연히 미군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는데, 후부키는 경계임무에 실패했다! 게다가 해전에서도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고 해전 시작 후 7분만에 가라앉았다. 미군이 중간에 포격을 중단한 4분을 빼면 교전시간은 딱 3분이다. 경계와 전투에 모두 실패했으니 변명할 말도 없다. 미군의 레이더가 패배원인이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전설의 구축함 아라시처럼 민폐함으로 낙인이 찍혔을 것이다.

경순양함 헬레나의 선제공격도 중요한 이유이다. 레이더 덕분에 일본군을 먼저 발견하고도 미군 지휘관인 스코트 제독이 머뭇거리는 바람에 기회를 놓칠 뻔했지만, 헬레나가 성급하게 발포하는 바람에 미군은 기습공격에 성공했고, 이게 먹히면서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미군이 더 머뭇거렸으면 일본군도 미군에게 반격했을 것이고, 산소어뢰로 미 함대를 날려버렸을 수도 있다. 이후 벌어진 타사파롱가 해전에서 미군이 공격기회를 잡고도 4분동안 머뭇거리다가 산소어뢰에 맞고 참패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산소어뢰를 발사할 기회를 아예 주지 않은 것도 승리의 커다란 요인이었다.

굳이 일본군 측에서 원인을 찾자면 수송함대의 조지마 소장이 "이 근처에 미군은 없다"라는 무전 이후 다시 미군의 존재를 알리는 정정문을 수신하지 못하여 미군이 없다고 오판 한 점, 일본군이 레이더의 중요성을 망각해서 제6전대에 레이더를 달아주지 않은 점, 미군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후부키급 구축함 후부키가 경계에 실패한 점 등이 있긴 하다. 아오바와 고토 아리토모만 탓하기에는 사고 친 사람이 너무 많다.

2.7. 고토 아리토모

일본 쪽에서는 제 6전대 지휘관인 고토 아리토모가 실수를 했다고 몰아가는 경향이 있으나 생각해보면 그럴 수가 없다. 고토 아리토모는 제 1차 괌전투부터 동부 솔로몬 해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투를 치러온 지휘관이다. 미군의 힘을 최전방에서 보고 느낀 제독이라는 뜻이다.

고토 아리토모가 지휘관으로서 최소한 써먹을 수준은 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본군이니까 과소평가할 수도 있으나, 이 사람은 사보섬 해전에서 미 해군에게 역사상 최악의 참패를 안긴 인물이기도 하다. 고토 아리토모가 유능하다는 증거다. 보통 사보섬 해전이라면 제 8함대 사령관인 미카와 군이치를 떠올리겠지만, 제 8함대의 실질적인 주력인 제 6전대를 이끄는 인물은 엄연히 고토 아리토모였다. 상관인 미카와가 아무리 똑똑하더라도, 부하인 고토가 멍청했다면 승리가 불가능했다. 그랬다면 미카와의 명령을 이행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토 아리토모가 방심했다는 주장에도 문제가 있다. 그는 이미 산호해 해전과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미군의 공습과 일본 주력함대의 삽질로 임무에 실패한 바 있다. 동부 솔로몬 해전이 벌어진 지 두 달도 안 되어서 에스페란스 곶 해전이 일어났으니, 쓰라린 경험을 잊을 만큼 긴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다. 고토 아리토모와 제 6전대의 방심과 경계실패가 패인이라는 주장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게 이 때문이다. 주력함대가 방심해서 피를 본 당사자들이 방심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해도 패배했으니 책임은 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지휘관의 임무이기도 하다. 중순양함 1척을 잃고 1척이 대파되었으니 욕을 먹어야 할 것이다. 구식이라고 해도 엄연히 중순양함이니까. 그래서 전사했다. 책임을 진 것이다. 그가 죽은 후에도 제 6전대는 끝까지 싸운 끝에 수송함대 호위 임무를 성공시켰다. 사령부의 명령은 이행된 것이다.

이런 옹호가 가능한 것은 일본군 수뇌부가 패배의 책임을 상습적으로 일선 지휘관들에게 덮어씌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토 소장이 무슨 수로 레이더를 만들어서 휘하 중순양함들에게 달아준단 말인가[4]. 같이 가라고 보내준 구축함 후부키도 경계에 실패했고, 조지마 소장은 대놓고 엿을 먹이는 판이었다. 적인 미군은 막강한 SG레이더로 제 6전대의 위치와 규모, 방향을 모두 꿰뚫고 있었다. 이런 것까지 고토 아리토모가 전부 책임을 질 수는 없다.

3. 해전 이후

해전 도중에 전사한 제6전대 사령관 고토 아리토모는 중장으로 추서되었다. 패배하긴 했어도 수송함대 호위임무는 완수했고, 그동안 세운 수훈이 워낙 많았으니 납득이 가는 조치이긴 하다. 위에서 보듯 패배의 원인은 제6전대에 레이더가 없어서였는데, 그건 고토 아리토모의 잘못이 아니었다.

제8함대 사령관 미카와 군이치는 이 패배에 빡돌아서 해전이 끝나자마자 제6전대 참모 키시마 중좌를 해임했다. 안 그래도 사보섬 해전(1번 항목)에서 승리의 기회를 날려버린 멍청이라고 비난을 받고 있는데, 휘하인 제6전대가 하라는 경계는 안하고 어리버리하게 미군에게 승리를 갖다바쳤으니 그럴 만도 했다. 지금 시점에서는 미군의 SG레이더 탓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있지만, 일본에서는 제6전대가 경계에 실패했다고 주장했고 고토 소장은 전사했으니 참모장이 화살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키시마 중좌는 패배의 원인이 레이더 탓이라고 진술했다.

이 패배만이 원인인 건 아니지만, 이후 미카와 제독은 과달카날 전투가 종료된 후 1943년 4월 1일자로 해임되어 한직을 맴돌게 된다.

해전의 승리를 이끌었던 스콧 제독은 이후 해전 한달 후에 사령관 자리를 다니엘 캘러헌 제독에게 이임하고도 부사령관으로 재직했지만, 과달카날 해전에서 대니얼 J. 캘러헌 제독의 기함인 샌프란시스코의 아군 오사로 전사했다.

연합함대의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는 이 해전의 보고를 받고 제6전대의 방심과 자만심, 경계실패를 크게 질책하며 "제대로 싸운 거 키누가사뿐이잖아"라고 평가했다. 전후사정을 잘 안다면 애꿎은 제6전대를 질책하기 전에 레이더 도입부터 서둘러야겠지만 그게 되면 일본군이 아니다. 미드웨이 해전을 대비해서 행해진 모의전에서 아카기가 폭탄 9발을 맞고 침몰한다는 결과가 나오자 "9발 명중은 너무 많다"며 억지로 아카기를 되살린 인간이 우가키다. 이 사람에게 뭔가를 기대하지 말자. 사실 일본군이 제정신인 집단이라면 최대한 빨리 군함에 레이더를 달았을 것이지만, 자국의 일본인이 만든 야기-우다 안테나도 채용하지 않는 자들이 그럴 리가 없다. 일본군/무기체계 항목에서 일본군의 레이더에 대한 몰지각함을 까는 게 다 이유가 있다. 이런 무식함의 대가로, 일본군은 레이더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야간전에서 미군에게 점점 밀리게 된다.

대파된 아오바를 둘러본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미군의 불발탄이 많은 것을 보고서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다'라며 아오바를 격려했다. 불발탄이 나오지 않았다면 100% 격침됐을 것이라는게 당시 수리담당자의 말. 야마모토에게는 불행하게도, 나머지 일본군 군함들은 아오바가 아니었다.

아오바의 자매함인 키누가사는 과달카날 해전에서 격침될 때까지 레이더를 달지 못했지만, 아오바는 과달카날 전역 이후 레이더를 달게 된다.

미군은 사보섬 해전에서 불발탄이 속출했기에 포탄의 개량을 실시하고 있었지만, 에스페란스 곶 해전에서는 별 효과를 못 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사보섬 해전에서 1년 가량 지난 후에는 불발탄 발생률을 크게 줄이게 된다.

여담으로 에스페란스 곶 해전에서 두 척의 일본군 군함에게 막타를 친 배는 해전에 참가한 미군 군함 중에서는 최고 노령함이었던 펜사콜라급 중순양함 솔트레이크시티라고 한다. 당연히 일본군 제 6전대 중순양함들은 펜사콜라급보다 더 낡았다.

이 해전 이후 일본군은 공고급 순양전함을 핸더슨 비행장 야간포격 임무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그 외 에스페란스 곶 해전에 대한 추가적인 내용은 항목 참조. #

4. 관련 링크

영문위키 에스페란스 곶 해전
일본어 위키 에스페란스 곶 해전. 일본어 위키에서는 이 해전을 사보섬 해전이라 부른다.


[1] 쉽게 학익진을 생각하면 된다. 미군이 1열로 옆으로 나란히 서 있을 때 모든 함의 전후 밎 측면 포들을 전부 사용 할 수 있지만 T자 형태로 전진하며 미군의 옆구리로 들어오는 일본 6전대는 선두함들의 전면의 포 밖에 사용치 못해 절대적인 화력 열세에 놓이게 된다.[2] 선두함이 변침을 하면 뒤에 있던 배들이 그 궤적을 따라 차례로 변침을 하여 함형을 유지하려 했다. 기차가 코너에서 회전을 하면 그 뒤로 연결된 차량들이 줄줄이 따라 오는 형태를 생각하면 된다.[3] 당장 멀리 갈 것도 없이 이후 일어난 과달카날 해전에서 아베 제독의 함대는 뛰어난 견시를 보유했음에도 달빛 한 점 없는 칠흙같은 밤에서 미해군 순양함 전대의 존재를 제대로 탐지하지 못했다. 이에 비해서 미군은, 결과적으로는 제대로 우위를 살리지 못했지만, 레이더로 일본 함대를 먼저 발견하였다.[4] 같은 책임 덮어 씌우기는 이후 해전에 참전한 아베 히로아키 제독 역시 당하게 된다. 당시 아베 제독의 함대에는 변변한 레이더가 없었고 칠흙같은 밤에 견시 활용이 불가했음에도 아베 제독은 경계를 게을리 했다는 부당한 비판을 받았다. 또한 해당 작전이 애당초 비행장 포격 및 상륙 함대 엄호이기에 작계대로 지상 작전용 삼식탄을 장전하고 가는 것이 상식임에도 아베 제독은 미 함대를 계산에서 배제했다는 부당한 비판을 받는다. 더 하여 작전 후 삼식탄을 모두 소진하여 비행장 포격이 불가능 해 철수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작전을 속행하지 않았다고 또 부당한 비판을 받는다. 즉 작전 대로 하고 합리적인 결정을 해도 결과가 안좋으면 막무가내로 책임을 뒤집어 쓰고 욕을 먹는 것. 이는 일본 제국에서는 장성급 장교도 결국 장기 말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여주며 실제로 아베 제독은 평범한 능력에 시키는대로 했음에도 이후 졸장으로 낙인 찍혀 쫓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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