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바급 중순양함 | ||||
아오바 | 키누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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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青葉(아오바, 푸른 잎)일본 해군이 건조한 아오바급 중순양함의 1번함. 동형함으로는 2번함인 키누가사가 있다. 1924년에 기공되었으며 1번함인 아오바는 1945년 7월 28일 구레 군항 공습때 격침된 후 동년 11월에 해체되었고, 2번함 키누가사는 1942년 11월 13일에 격침되었다.
이름의 유래는 교토와 후쿠이 현 경계에 있는 아오바 산이다.
2. 함생
와레 아오바 때문에 민폐함으로도 알려져 있으나, 종전까지 악착같이 살아남은 일본군의 수훈함.일본에서 최고 수훈함으로 여겨지는 아카기와 카가, 미국에서 일본 최고의 수훈함으로 평가하는 쇼카쿠와 즈이카쿠, 일본 전함 중 최고 수훈함인 공고급 순양전함 4척, 그리고 세계 최대의 전함인 야마토급 전함들에 비하면 무명이지만 태평양 전쟁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군함이다. 전장의 주역이었던 전함도, 태평양 전쟁에서 새로운 주역으로 떠오른 항공모함도 아닌 구식 중순양함임에도 다른 행운함들과 다르게 제대로 활약할 기회를 얻었으며 전쟁 말기 구레에서 방공포대로 사용되다 격침되었다.
해군조약 이전에 건조된 구닥다리 함임에도 여러차례 대파를 당하여 침몰 직전까지 가는 와중에 기적적으로 침몰만은 면한 경력이 있고, 전쟁 내내 인상 깊은 행적을 남겼기에 솔로몬의 늑대, 불침중순(不沈重巡) 등의 별명을 얻었다.
2.1. 전쟁 초기
중일전쟁에서는 상하이 상륙 작전 등에 참가했으며, 1937년부터 1940년에 걸쳐 개수작업을 받고 20.3cm 2연장포 3기로 주포를 교체하고 어뢰발사기도 현측 고정식에서 갑판 위에 장착하는 선회식으로 교체했으며, 대공기관총도 증설했다.태평양 전쟁 발발 무렵에는 아오바급 중순양함 2척과 후루타카급 중순양함 2척으로 이루어진 제6전대의 기함을 맡았으며, 제6전대의 사령관은 고토 아리토모.
진주만 공습으로 전쟁이 시작되자, 아오바는 제6전대 기함으로서 남방작전의 일환인 괌 공격(일본 이름은 G작전)에 참가한다. 당시 일본군은 괌의 미군을 과대평가하고 있었지만, 미군은 전쟁이 일어날 경우 괌을 수비할 수 없다고 판단, 별다른 대책을 준비하지 않았다. 어쨌든 일본군은 제6전대와 수상기 모함 키요카와마루 등을 동원하는 강수를 두었고 개전하자마자 수상기로 괌을 대대적으로 폭격했으며, 10일 새벽에 상륙작전을 감행한다. 그러나 이 작전은 아침 6시에 막을 내렸는데, 미군이 재빨리 항복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자신들이 너무 많은 전력을 동원했음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전사자 1명에 부상자 6명이라는 가벼운 피해로 괌을 접수했으므로 작전은 대성공을 거둔 셈이다. 양륙작업이 끝난 것은 전투가 끝나고도 한참 지난 오후 3시였다고. 나무위키에는 제1차 괌 전투로 수록되어 있다.
일본군이 괌을 점령한 후, 아오바는 라바울 공격에 참가할 예정이었지만 1차 웨이크섬 전투에서 일본군의 침공군 기함인 유바리가 대파되고 구축함 2척이 침몰하고 300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는 동안 미군 전사자가 0명이라는 굴욕적인 기록을 남기며 패주했기에 2차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제6전대는 위험을 무릅쓰고 해안 가까이까지 접근해서 화력지원을 실시하는 등의 활약으로 승리에 일조했고, 이 전투는 남방작전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기록된다. 이후에는 라바울 공략전(일본 이름은 R작전)에 참가했으며, 라바울은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1942년 2월 11일에 일본군의 종군기자이자 일본 SF의 시조 중 한 사람인 우미노 쥬조가 승선하였다. 우미노 쥬조는 3월 28일까지 아오바에 머물렀으며, 배의 거주성은 안 좋았지만 승조원들의 근무태도는 인상적이었다고 기록했다. 우미노 쥬조가 아오바에서의 취재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책이 적도남하(赤道南下)이다. 서적정보
2.2. 산호해 해전
투라기 침공에서는 제6전대를 이끌고 무츠키급 구축함 우즈키, 유바리와 함께 경항공모함 쇼호의 호위를 맡았으며 투라기 침공부대를 성공적으로 엄호했다. 이후 이들은 포트 모르즈비 침공부대와 합류했으나, 미군이 이들을 요격하기 위해 렉싱턴과 요크타운을 파견하고 일본군도 이에 맞서 쇼카쿠와 즈이카쿠를 핵심으로 한 기동부대(제5항공전대. 일명 5항전)를 보내면서 산호해 해전이 벌어진다.5월 7일의 1차전에서 일본군은 정찰기를 내보냈고, 쇼카쿠의 정찰기가 미군 항모전단을 발견한다. 일본군은 쇼카쿠와 즈이카쿠의 공격대를 대거 발진시켜 이 목표물을 공격하는데, 제6전대의 후루타카가 다른 위치에서 미군 항모전단을 발견했다고 보고하고, 키누가사의 정찰기가 이를 재확인한다. 문제는 미군도 포트 모르즈비 공격부대의 위치를 확인했다는 점으로, 미군은 포트 모르츠비 침공부대를 5항전으로 착각해서 전력을 다해 쇼호를 공격했다. 제6전대는 쇼호를 보호하려고 했지만 미군기가 93대나 되었기에 항모 호위임무에 실패했고, 쇼호는 13발의 폭탄과 5발의 어뢰를 맞고 불바다가 된다. 5항전의 공격대도 미군 항모를 격침시키기는 했지만 그것은 급유함 네오쇼(AO-23)와 그 호위인 구축함 심즈(DD-409)였다! 그제서야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은 5항전은 급히 유조선 공격을 취소했으나, 쇼호는 그대로 침몰한다.
5월 7일 오후 쇼카쿠와 즈이카쿠의 공격대는 다시 발진했지만, 쇼카쿠의 정찰기가 엉뚱한 곳을 적 함대로 지목하는 바람에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귀환한다. 날이 어두워졌기에 안전을 위해 폭탄을 모두 버리고 쇼카쿠(?)에 착함하는데, 그것은 미군 항모였다! 미군과 일본군 모두 크게 놀랐고, 일본군 공격대는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하고 도주했다. 미군은 이때 귀함하는 함재기에 의도치 않은 팀킬을 해버렸다. 다행히 기체 손상만 되었고 사망자는 없었다.
5월 8일, 5항전은 제6전대의 후루타카와 키누가사를 차출해서 자기들 기동부대에 합류시킨다. 아오바와 카코는 그대로 포트 모르즈비 침공부대와 함께 하게 되었고, 대파된 쇼카쿠는 후루타카, 키누가사, 구축함 2척의 호위를 받으며 일본으로 돌아간다. 미군 역시 그대로 퇴각했지만, 포트 모르즈비의 연합군 비행대는 멀쩡했고 미국-호주 연합함대도 있었기에
이 해전에서 5항전이 5월 7일에 저지른 실수는 엄청난 나비 효과를 일으켰다. 유조선을 공격하느라 미 항모전단을 방기한 대가로 5항전은 미 항모전단을 공습할 기회를 날려먹은 것이다. 이로 인해 5항전은 손쉬운 승리의 기회를 날리고 5월 8일의 전투를 벌여야 했으며, 그 결과로 쇼카쿠가 대파되고 함재기들이 대거 손실되었고, 포트 모르즈비 공략도 실패로 돌아갔다. 게다가 쇼카쿠가 대파되는 바람에 수리를 위해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고, 이로 인해 5항전은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하지 못했으며 이것이 운명의 5분을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다. 5항전이 나구모 함대에 동행했을 경우 항모 숫자가 6:3이 되어 미군이 압도적으로 불리해졌을 것이 분명하니만큼, 이 해전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1942년 7월 14일부로 아오바와 제6전대는 제18전대와 유바리, 그리고 몇 개의 구축대와 함께 제8함대에 편입되어 과달카날 전역에 투입된다.
2.3. 미 해군 역사상 최악의 해전
"You son of a bitch, if you do that you are yellow!!"
"이 개새끼야, 그럼 넌 겁쟁이라고!!"
ㅡ리치몬드 켈리 터너 제독, 사보섬 해전 이후 플레처에게 한 말.
"이 개새끼야, 그럼 넌 겁쟁이라고!!"
ㅡ리치몬드 켈리 터너 제독, 사보섬 해전 이후 플레처에게 한 말.
2.3.1. 해전 경과
사보섬 해전에서는 제8함대의 일원으로 작전에 참가했으나, 제 8함대는 기함 초카이를 제외하면 믿을만한 전력이 없었으므로 아오바의 제 6전대가 전력의 핵심이 되었다. 굳이 따지자면 경순양함 텐류와 유바리, 구축함 유나기가 있었지만 이 세 척은 기함 초카이와의 무선통신도 안 되는 데다가, 유바리는 추진기 고장으로 속도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18전대 참모라는 자가 어거지를 쓰는 바람에 제 8함대에 들어왔고, 이들은 미카와 제독에게는 대단한 골칫거리였다. 야간전에 무전기가 안 통하면 어디에 써먹겠는가.아무튼 제 8함대는 정찰기가 남아있는 모든 순양함에서 정찰기를 띄웠는데, 그 중 하나는 한밤중에 불을 켜고 날아다니는 기행을 벌였다. 양측 함대의 전력에서 연합군이 더 우세했음을 감안했을 때, 미드웨이에서 아군 위치를 알려준 아라시처럼 아군을 대패시킬 수 있었던 위험한 행동이었고 미군도 이 정찰기를 발견했지만 "적이라면 한밤중에 불을 켜고 우리 머리 위를 날아다닐 리가 없다"는 이유로 아군기라고 판단했다. 이 정찰기를 목격한 초급장교들은 엔진소리가 아군기와 다르다며 격추할 것을 주장했지만 피곤에 찌든 함장급 지휘관들은 이를 무시했다(...) 사보섬 해전 참패에는 지휘관들이 지나치게 피곤한 상태였던 것도 원인이 있다.
과달카날 전역을 다룬 '핸더슨 비행장'이라는 책에서는 일본 정찰기가 무려 한 시간이 넘게 미 함대 머리 위를 날아다녔고, 미카와 제독에게 무전기로 정찰결과를 보고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과달카날의 미 해군과 미 해병대, 호주 해군은 넋놓고 가만히 있었다. 정찰기들은 이후 조명탄으로 연합군 함대의 위치를 밝혀주었고, 제8함대는 기함 초카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게 된다.
일본군은 지휘관이 최선두에 서서 돌격하는 것이 전통이었기에, 8함대 기함 초카이가 선두로, 그 뒤는 제6전대 기함 아오바가 휘하 중순양함들을 이끌고 돌격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외곽을 경계하던 미군 구축함들은 제 8함대가 근처를 지나가는데도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으며, 제 8함대는 순조롭게 미 함대와 만나게 되었다. 제 8함대는 첫 번째로 조우한 미 해군 남부부대를 6분만에 박살내버렸고, 5분동안 질주한 제 8함대는 미 해군 북부부대를 만나 이번에도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기가 막히게도, 제 8함대가 미 해군 남부부대를 격파하고 이동한 후 북부부대를 풍비박산내는 데에는 30분도 안 걸렸다.
특히 북부부대와의 전투는 걸작이었다. 북부부대의 중순양함 중에는 아오바보다 203mm 포 숫자가 3문이나 많은 아스토리아급 중순양함이 3척이나 있었지만, 그들 모두 제 8함대를 상대로 힘도 못 써보고 무너져버렸다. 아오바가 압도적으로 강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싱겁게 박살나버렸다. 미군에게는 그야말로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아스토리아급 중순양함 퀸시는 그나마 제8함대를 상대로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아오바의 포격이 퀸시의 정찰기를 박살내면서 화재가 발생하자 눈에 띄는 표적이 되었고, 곧 일본군의 집중포화와 어뢰를 맞고 대파되었다. 퀸시는 마지막 수단으로 제8함대 기함 초카이에게 돌격을 시도했지만, 아오바의 어뢰에 맞고 침몰하고 말았다.
이 해전에서 아오바는 적탄에 어뢰발사관을 피격당했지만, 산소어뢰에 불이 붙기 전에 화재를 진압했으므로 소파에 그쳤다. 일본어 위키 제1차 솔로몬 해전에 따르면 기관총탄에 산소어뢰가 피격되어 화재가 발생했지만, 스기우라 일등 수병의 결사적인 소화작업 덕분에 진화에 성공했다고 한다. 산소어뢰 폭발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터져나간 일본 수상함들과 비교하면 이때부터 강운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설계상의 결함을 노련한 수병과 행운 덕분에 극복한 사례.
그러나 미카와 제독은 미군의 수송선단까지 공격하기는 무리라고 판단하고 귀환을 결정했다. 확실히 기함과의 무선통신도 안 되는 텐류, 유바리, 유나기 같은 짐덩어리들을 데리고 더 이상 야간전을 벌이는 건 무리이긴 했다. 이후 초카이와 제 6전대는 미군의 세력권을 벗어났고, 함대 기함 아오바에 좌승한 제 6전대 사령관 고토 아리토모는 이제 안전하다고 판단하고 잠수함 회피 운동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 판단은 실수였고, 후루타카급 중순양함 카코가 미군 잠수함 S-44에게 어뢰 3방을 얻어맞아 격침되고 말았다. 아오바의 수상정찰기가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S-44를 막지는 못했다.
다만 카코의 함장은 '적이 너무 멀리서부터 쫓아온거니 어쩔 수 없었다'라며 딱히 아오바의 판단을 책망하지는 않았다. 고토 소장은 나중에 자신의 실수에 대해 사과했다고.
사보섬 해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 #
2.3.2. 태평양 전쟁의 흐름이 바뀌다
연합군 측 피해 | 일본군 측 피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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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군과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특히 북부부대에는 203mm 포 9문을 탑재한 아스토리아급 중순양함 아스토리아, 빈센스, 퀸시 3척이 포진하고 있었는데, 이들 모두 203mm 포 6문밖에 없었던 아오바와 제 6전대 중순양함들에게 일방적으로 박살나버렸다. 오스트레일리아군의 중순양함 캔버라도 가라앉았다. 게다가 미 해군의 노스햄프턴급 중순양함 4번함 시카고는 남부부대의 지휘를 맡았으면서도 경계와 전투에 모두 실패하고, 일본군에게 얻어터진 데다 북부부대에 경보도 보내지 않는 한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시 시카고의 함장이었던 하워드 보데는 사보섬 해전의 비공개 보고서에서 자신에 대해 가혹한 평가를 내린 것을 안 후 1943년 4월에 권총으로 자살했다. 시카고 역시 수리를 마치고 전선에 복귀했으나 명예를 회복하지도 못하고 1943년 1월 29일에 렌델 섬 해전에서 침몰했다.
사실 제 8함대의 전력은 농담으로라도 대단치 않았다. 제 8함대에서 그나마 최신형 군함은 기함 초카이 하나 뿐이고, 제 6전대를 제외한 나머지는 없는 게 나은 녀석들이었다. 기함과 무전기도 안 통하고 성능도 형편없는 데다 승조원들의 기량도 영 좋지 않은 텐류, 유바리, 유나기는 함대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일 뿐이었다. 이런 데도 일방적으로 패배했으니 미군으로서는 낭패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진짜로 치욕적인 사태는 그게 아니었다. 과달카날에는 프랭크 플레처 제독이 지휘하는 61임무부대라는 막강한 함대가 있었다. 여기에는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1번함 노스캐롤라이나도 있었고, 항공모함 새러토가와 와스프도 있었으며, 그 유명한 전설의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도 있었다. 농담이 아니고, 제 8함대 따위는 한 주먹으로 박살낼 수 있는 막강한 전력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싸우지도 않고 퇴각해버렸다. 야간에 항공모함 3척을 위험한 해역에 방치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판단한 플레처 제독이 함대를 뒤로 뺀 것이다. 이 사태에 해병대는 "주력 함대가 아군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비난을 퍼부었고, 해전 이후 캘리 제독은 플레처에게 겁쟁이라고 욕했다. 이 문단 맨 위의 대사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플레처가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에는 충분히 타당성이 있었다. 위에서 봤듯이 과달카날을 지키던 중순양함들은 제 8함대에게 일방적으로 유린당했고, 혼자 싸우던 퀸시는 아오바에게 박살났다. 게다가 미 항모들은 아직 야간작전능력이 없었다. 불을 켜고 함재기를 이함시킬 수도 있지만 그러다가 혹시나 존재할 일본 잠수함에게 발각될 위험 또한 무시할 수는 없었다. 사보섬 해전에서 미 해군이 보여준 추태와 대전 중 격침된 미 항모의 대부분이 무력화 후 산소어뢰로 격침되었음을 생각해봤을 때, 항모 3척이 날아가는 대참사가 벌어지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 시기에는 아직 일본 육군 항공대가 미 해군을 상대로 공격을 가하던 시기였고, 불과 하루 전과 해전 당일인 8일까지 라바울 기지의 항공대에 괴달카날 주변의 미 함대와 전투기들이 공격을 받았다. 그 미드웨이에서 항공전과 뇌격으로 격침된 요크타운을 지휘한 플레처인만큼 사실상 미 해군의 유일한 전력이 사라지면 태평양의 제해권이 비록 일시적이더라도 어떻게 될 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됐든 이 가공전기를 방불케하는 패배에 대해 미 해군은 역사상 최악의 해전이라는 평가를 내렸고, 일본군은 미군의 공습을 우려하여 철수하지만 제8함대 사령관 미카와 중장은 미군 수송선단까지 격파하지 않고 철수했다는 이유로 일본군 수뇌부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패배로 미군은 제해권과 제공권을 빼앗겼고, 미 해병대는 과달카날에 고립되어 물자부족에 시달렸으며, 밤마다 찾아오는 일본 함대의 포격에 고통받게 되었다. 이후 미국과 일본의 함대결전이자 전쟁의 전환점인 과달카날 전역이 시작됨으로써, 아오바는 태평양 전쟁의 흐름을 바꾼 군함 중 하나에 포함되었다. 첨언하자면 비행기가 전쟁에 쓰인 이래, 미군이 제공권을 빼앗긴 건 이 해전이 유일하다.
2.4. 동부 솔로몬 해전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아오바는 제8함대 기함 초카이와 함께, (이제 3척으로 줄어든) 제6전대를 이끌고 다나카 라이조가 이끄는 제2수뢰전대(기함 진츠와 구축함 5척)와 함께 수송선단을 호위하게 된다. 일본군의 편성은 아래와 같다.- 주력부대
- 제3함대(주력)
항공모함 쇼카쿠
항공모함 즈이카쿠
구축함 6척 - 제3함대(전위)
전함 히에이
전함 기리시마
순양함 3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6척 - 제2함대(전위)
전함 무츠
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 유라
수상기모함 치토세
구축함 6척 - 미끼부대
항공모함 류조
중순양함 토네
구축함 2척
- 수송부대
- 수송함대
수송함 3척
순찰정 4척 - 제2함대(제2수뢰전대)
경순양함 진츠
구축함 8척 - 제8함대
중순양함 초카이
중순양함 아오바
중순양함 키누가사
중순양함 후루타카
미 해군은 항공모함 사라토가와 엔터프라이즈, 전함 노스케롤라이나, 중순양함 3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1척으로 이뤄져 있었다.
동부 솔로몬 해전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일본군의 수상함 전력은 압도적이었지만 어이없는 이유로 다수가 전역에서 이탈하였으며, 아오바가 포함된 8함대를 비롯한 수송함대는 수송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구축함으로 헨더슨 비행장을 야간포격하고, 정찰기로 폭격을 시도하는 등 사실상 최대한의 노력을 했지만 주력함대의 부재로 제공권이 상실된 상황에서 미군 주력함대와 끊임없이 폭격기가 날아오는 헨더슨 비행장을 상대할 수는 없었기에 결국 철수하고 만다.
2.5. 와레 아오바
1942년 10월 11일 에스페란스 곶 해전에서 제6전대는 수송함대의 호위를 맡았으나 미군의 기습을 당하면서도 수송함대 호위임무를 완수했다. 이 당시 아오바는 미군 중순양함들에게 40발 이상의 포탄을 맞아 포탑 2개가 날아가고 함교가 박살나고 탄약고가 유폭 직전까지 가는 등의 큰 피해를 입었지만, 탄약고를 재빠르게 침수시켜 유폭을 막아낸 데다 명중탄 상당수가 불발되는 행운까지 겹친 덕분에 항해능력을 상실하지 않고 탈출할 수 있었다. 수리담당자의 말에 따르면 불발탄이 안 나왔다면 100% 격침되었을 거라고 한다.미군이 기습할 당시 적을 아군으로 착각해서 와레 아오바(나는 아오바다)라는 발광신호를 보내다가 미군에게 처맞았고, 얻어터지는 와중에도 '와레 아오바'라는 발광신호를 계속 보냈다는 게 그 유명한 와레 아오바 전설이다. 선제공격에서 큰 부상을 입은 고토 소장[1]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상대를 아군이라 믿고 '와레 아오바(나는 아오바다)'라는 발광신호를 계속 보내도록 명령했으며, 죽을 때까지도 아군의 오인사격을 당한 줄로만 알고 (포격을 가한 미군을 원망하며) "바보 같은 놈들"이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설이 있다.
전투개시 이후의 아오바와 고토 소장에 대해서도 다소 견해가 갈린다. '와레 아오바'는 통신시설이 날아가 지휘계통이 무너진 상태에서 기함의 건재를 알리기위해 아군에게 보냈던 발광신호라는 설도 있다.[2] 또한 당시 6전대의 참모였던 키시마 중좌는 고토 소장에게 '연막을 피워서 태세를 정비한 다음 반격하겠다'는 허가를 받아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다만 미군은 이 발광신호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혼란상황에서 치러진 야간전이었고, 일본측은 지휘부가 순식간에 괴멸당해 생존자 증언이 적은데다 전투기록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지라 결국 당시 일본측 상황이 어떠했지는 불명. 사실 '고토 소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적을 아군이라 믿고 있었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일본에서 발간된 태평양전쟁사 관련서적들 중 딱 한 권뿐이다.
미군 측에서는 와레 아오바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완벽한 기습에는 성공했지만, 헬레나의 SG레이더를 좀 더 활용했다면 완벽하게 제6전대를 괴멸시킬 수 있었을 거라고 아쉬워하는 게 미군 측 시각이며, 발광신호 이야기도 없다.
따라서 와레 아오바 이야기는 신빙성이 없다. 단지 '와레 아오바'의 임팩트가 워낙 강한데다 한사람의 삽질탓으로 돌려버리면 속이 편한지라(…) 정설처럼 떠돌고 있는 것.
이러한 낭설은 전후 잘 되면 내 탓 말아먹으면 남탓으로 돌리던 연합함대 생존 수뇌부의 주장을 무비판적이게 수용하여 퍼뜨린 현재 극우 일본 밀리터리계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쉽게 말해 태평양 전쟁 패전의 속죄양이 필요했던 셈. 많은 평범 또는 유능한 일본 해군 제독들이 자신의 잘못만이 아님에도 패전의 한 단면을 제시했다는 이유로 모든 죄를 뒤집어 쓰고 속죄양이 됐다. 이러한 속죄양이 된 일본 제독들은 패전의 죄를 모두 뒤집어 쓰고 일본 극우 밀리터리계에서 일본 제국 멸망의 원흉이자 역적 취급을 받고 있는 현실이다.
2.6. 키누가사의 운명
아오바가 수리를 위해 일본으로 귀환한 후, 키누가사는 6전대의 기함을 맡아 10월 15일 새벽에 제8함대 기함 초카이와 함께 헨더슨 비행장에 752발의 8인치 포탄을 퍼부었다. 이미 10월 14일 새벽에 공고와 하루나의 포격을 받고 큰 타격을 입은 헨더슨 비행장에게 있어 이는 치명적이었고, 핸더슨 비행장은 거의 모든 비행기를 상실하고 연료도 전부 불타버렸다. 이 포격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와 #를 참조.이후 키누가사는 제8함대의 일원으로 기함 초카이와 함께 과달카날 해전에 참가, 1942년 11월 14일 새벽에 핸더슨 비행장을 포격한 제7전대를 엄호한다. 그러나 14일 아침이 되자마자 핸더슨 비행장의 미 해병대는 돈틀리스를 발진시켜 일본군을 폭격했고, 키누가사는 어뢰 4발을 맞지만 탈출한다. 그러나 엔터프라이즈에서 보낸 뇌격기와 급강하 폭격기의 집중공격이 일본 함대를 덮쳤고, 키누가사는 폭탄을 함교에 맞고 함장이 전사한다. 그래도 살아남은 키누가사였지만 엔터프라이즈의 함재기들이 다시 공격을 가해왔고, 다시 폭탄을 맞아 엔진과 방향타가 날아가면서 침수, 511명의 전사자를 내며 침몰했다. 그래도 제8함대는 포격임무라도 수행했지만, 다른 일본 함대는
1번함 아오바의 지독한 생명력과 비교하면 약해 보이지만, 항공어뢰 4발을 맞고도 도망간 키누가사의 맷집은 결코 약한 게 아니다. 단적인 예로 이탈리아군이 자랑하는 리토리오급 전함 리토리오는 타란토 공습에서 소드피시의 항공어뢰 3발을 맞고 착저했다. 미군 어뢰가 그리 좋은 물건이 아니라고는 해도, 아오바급이 구식 중순양함이고 리토리오급이 이탈리아의 최신 전함임을 감안하면(...)
키누가사 침몰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영문 위키 과달카날 해전, 일본어 위키 제3차 솔로몬 해전을 참조하고, 한글로 된 이야기는 #를 참조.
키누가사의 격침으로 제6전대는 아오바 하나만 남았기에, 제6전대는 해산되고 아오바는 제8함대 직속이 된다.
2.7. 이호 작전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 수리를 받는 과정에서 파괴된 3번 포탑 자리에 96식 25mm 대공기관포를 장비. 1943년 2월 24일에 트럭으로 돌아온다. 일본군은 라에-살라모에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기무라 마사토미 제독이 지휘하는 구축함 8척과 육군수송선 8척에 7000명의 증원병력과 보급물자를 싣고 100여대의 호위기를 붙여서 출동시켰지만, 1943년 3월 1일에서 3월 5일까지 벌어진 비스마르크해 해전에서 미 육군 제5항공군의 집중공격을 받고 구축함 4척을 제외한 모든 배가 침몰했다.일본은 이에 대한 복수 겸, 라바울을 지키기 위해 미군의 전진기지들을 대거 공습하기로 한다. 이것이 1943년 4월 1일부터 16일까지 실시된 이호작전이다. 이 작전을 위해 제 11항공함대가 투입되었으며, 항공모함 즈이카쿠, 즈이호, 히요, 준요의 함재기들까지 뜯어와서 배치했다. 오자와 지사부로는 이 결정에 반대했지만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이것은 명백한 야마모토의 오판이었는데, 항공모함의 함재기 조종사들을 키우는 것은 매우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 항모 이착함부터 시작해서, 바다 위에서 길 찾기 등 배울 게 많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차출로 인해 일본군은 항모의 항공전력을 효과적으로 보충하지 못했고, 이는 필리핀 해 해전에서 치명상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호작전에 대한 자세한 내역은 영문 위키 오퍼레이션 아이고(이호 작전), #1, #2 참조.
1943년 4월 3일 새벽 3시에 아오바는 파푸아뉴기니의 카비엥에 정박했다가 미 제 5공군(제 5항공대) 소속 B-17의 공습을 받는다. 일본군 수송선단의 수송선 1척이 격침되었고, 아오바도 기관총 사격(?)으로 산소어뢰 2발이 유폭, 재기한지 2달 만에 또다시 대파된다. 당시 침몰할 수준의 피해를 입었으나, 가까스로 해안가로 돌진해 좌초함으로서 살아남았다. 영문 위키와 일본어 위키의 내용을 보면 기관총 사격에 의해 산소어뢰가 유폭한 게 아닌지 의심된다.
아무튼 아오바는 미군의 제공권 안에 떡하니 고립된 상황이었음에도 배 전체를 섬으로 위장하고 버텼으며, 제 3수뢰전대 기함인 경순양함 센다이가 견인을 시도했지만 아오바의 침수가 심해지면서 실패. 4월 5일에 특설공작함 야마히코마루(山彦丸)가 파견되어 아오바의 물을 빼냈고, 경순양함 센다이가 4월 20일에 카비엥으로 진입, 4월 21일에 드디어 아오바를 끌고 탈출에 성공했다. 아오바 승조원들은 섬으로 위장된 아오바를 '아오바 섬'이라고 불렀는데, 놀랍게도 이 위장은 먹힌 것으로 보인다. 아오바가 한 달 가까이 미군 세력권 안에 있는데도 단 한 번도 아오바를 공격해오지 않았던 것이다.
첨언하자면 이호 작전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라바울에 왔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전선 시찰을 나왔다가 미군의 공격으로 그가 탔던 비행기가 격추되면서 전사했다.
2.8. 16전대 기함
아오바는 8월 1일에 수리를 위해 구레 군항으로 귀항한 후, 3번 포탑을 새로 끼우고 대공레이더와 대공화기를 보강한다. 항공순양함이나 급유함으로 개장하는 것도 검토되었지만 무산. 그러나 엔진에 손상을 입어 최고속도가 28노트로 떨어졌다.근성으로 침몰위기를 면한 헝그리 정신 덕분인지, 이 두번째 대파 이후로는 일본군 내에서는 솔로몬의 늑대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 별명 탓인지, 제 6전대는 '솔로몬의 늑대 전대'라고 불리기도 했다.
1943년 12월, 아오바는 16전대로 배속되어 기함을 맡게 된다. 이때 16전대에 소속된 군함은 묘코급 중순양함 아시가라, 쿠마급 경순양함 1번함 쿠마, 3번함 키타카미, 4번함 오이, 나가라급 경순양함 5번함 키누, 19구축대 소속인 후부키급 구축함 10번함 우라나미와 12번함(아야나미급 2번함) 시키나미가 소속되어 있었다.[3] 아시가라가 기함이던 1942년에는 '집보기 부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한가한 전대였다.
그러나 아오바가 기함이 된 후, 쿠마는 1944년 1월 11일에 대잠훈련을 하던 중 연합군 잠수함의 공격으로 격침되었고, 키타카미는 1944년 1월 말에 미군 잠수함의 공격으로 어뢰 2발을 맞은 후 6월까지 수리를 했으나 완전히 회복되지 못해서 7월에 사세보로 귀환하게 된다. 집보기 부대의 좋은 시절이 끝났다는 증거였다.
1944년 2월 25일, 아시가라는 16전대를 떠나 일본으로 돌아간다.
2.9. 베허호 사건
1944년 2월 말에, 남서방면 함대사령관 다카츠 시로 대장은 16전대에 인도양 방면의 연합군 선박을 습격할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아시가라가 일본으로 돌아갔으므로,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16전대는 7전대 소속의 중순양함 2척을 지원받게 된다. 16전대는 2월 27일에 기함 아오바, 경순양함 키누와 오이, 구축함 5척, 그리고 7전대 소속인 토네급 중순양함 토네와 치쿠마를 이끌고 출격하지만 토네의 삽질로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3월 15일에 인도네시아의 탄중 프리옥 항구에 입항함으로서 작전은 종결된다. 이후 토네는 작전 과정에서 생포한 영국 상선 베허호의 포로 일부를 아오바에 넘겼으며, 아오바에 보내진 포로들은 포로수용소로 보내져서 강제노동에 종사하다가 전후에 석방된다. 이들의 숫자는 참고문헌에 따라 다른데, 15명이란 설도 있고 36명이란 설도 있다.임무가 끝났으므로 토네는 16전대의 관할에서 벗어났으며, 3월 18일 밤에 토네 승조원들은 남은 포로들의 목을 벴다. 포로 살해 현장에는 토네의 함장 마유즈미 하루오도 동석했다. 살해된 포로의 숫자도 명백하지 않은데, 65명이란 설부터 80명까지 다양하다. 처음부터 베허호에서 구조된 선원의 수가 104명이란 설도 있고 108명이란 설도 있다.
이것이 통칭 베허호 사건으로, 당시 16전대 사령관 사콘조 나오마사는 전후 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다. 그러나 사콘조가 학살책임자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며, 증인들의 증언도 서로 엇갈렸다. 확실한 것은 중순양함 토네에서 3월 18일 밤에 포로들을 학살한 후 시체를 바다에 버렸고, 그 짓을 한 자는 토네 승조원들이며 마유즈미 하루오도 동석했다는 것이다. 특히 마유즈미 하루오는 베허호를 습격할 때 성조기를 토네에 게양해서 국제법을 어겼고, 토네 승조원들의 포로 학대를 방조했으며, 학살이 벌어질 때 토네의 함상에서 모든 것을 지켜봤다. 사형을 면할 수 없는 중범죄다.
그러나 포로학대와 학살을 저지른 토네 승조원들은 제대로 된 처벌도 받지 않고 석방되었으며, 토네 함장 마유즈미 하루오도 '소극적 가담자'라는 이유로 노동형 7년이라는 가벼운 벌을 받았고, 고작 4년만 복역하고 석방된 후 잘 먹고 잘 살다가 1992년에 편안하게 죽었다.
자세한 내용은 베허호 사건을 참조.
2.10. 혼작전(곤작전)
1944년 6월, 일본군은 뉴기니섬 서부[4] 북쪽 근방에 있는 비야크(Biak) 섬을 지원하기 위해 2500여명의 병력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 섬은 5월말부터 맥아더가 이끄는 미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이 당시 일본 해군은 미 해군의 주력이 뉴기니 북쪽의 팔라우와 그 서쪽의 민다나우 일대로 공격해 오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비야크에는 뉴기니, 팔라우, 민다나우 일대에서 일본군을 지원할 수 있는 비행장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 해군은 이 섬을 최대한 오래 유지하고 싶어했고, 아오바는 이 작전에 동원된다.1차 혼작전에 동원된 일본군의 규모는 아래와 같다.
수송부대 | 호위대 |
16전대(본대) 중순양함 아오바 경순양함 키누 구축함 시키나미 구축함 우라나미 구축함 시구레 | 지원대 부설함쓰가루 부설함 이츠쿠시마 수송함 127호 구잠정 2척 |
경계부대 | 간접호위대 |
중순양함 묘코 중순양함 하구로 구축함 3척 | 후소급 전함 후소 구축함 2척 |
16전대 소속인 오이는 이질환자가 발생했기에 작전에서 제외되었다.
일본 함대는 다바오에서 분산했고, 경계부대인 묘코급 중순양함 묘코와 하구로는 구축함 3척과 함께 다른 곳에 병력을 상륙시킨다. 아오바의 16전대와 후소는 비야크 섬으로 향했으나 미군 잠수함과 정찰기에게 발각된다. 덤으로 일본군 정찰기가 미군 항모전단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올렸고, 일본군은 혼작전을 취소한다. 아오바의 16전대는 소롱에 일본군 병력을 내려놓은 후 귀환했지만, 미군 항모전단은 근처에 없었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1차 '혼작전(渾作戦)'이 정찰기의 오보로 실패한 후, 일본군은 소롱에 내려둔 병력을 비야크 섬으로 보내기 위해 2차 혼작전을 실시한다. 16전대 사령관 사콘조는 시키나미를 기함으로 삼았고, 아오바와 키누는 후방에서 지원을 위해 대기하게 된다. 16전대의 시키나미와 우라나미, 구축함 시구레, 그리고 구축함 하루사메, 사미다레, 시라츠유는 사콘조의 통솔 아래 소롱의 병력을 싣고 비야크 섬으로 향하지만 미군의 공습을 당해 하루사메가 침몰한다. 16전대는 비야크 섬에 도착하여 병력을 내리기 시작했지만, 호주군의 중순양함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군 경순양함 보이스[5], 미군 경순양함 피닉스가 이끄는 14척의 구축함과 조우한다. 16전대는 급히 달아났기에 살아남았지만, 극히 일부의 병력만이 비야크 섬에 상륙할 수 있었다.
2차 혼작전도 실패하자, 일본군은 비야크 섬 주변의 미군 함대를 몰아내기 위해 3차 혼작전을 기획한다. 아오바의 16전대와 중순양함 묘코, 하구로 외에도 야마토급 전함 야마토와 무사시, 경순양함 노시로와 구축함들이 추가로 동원되었다. 그러나, 미 해군의 주력 항모기동부대인 제58기동부대는 일본 해군의 예상을 깨고 훨씬 북동쪽의, 그리고, 일본 본토에 훨씬 더 가까운 마리아나 제도로 쳐들어왔다. 이를 파악한 일본군은 3차 혼작전을 취소한 후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대거 출동시켜 필리핀 해 해전이 벌어진다. 그러나 이 해전은 위대한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일본군의 참패로 끝났다. 당연히 비야크 섬은 고립.
자세한 정보는 #1과 #2, #3, 그리고 일본위키 혼작전을 참조.
혼 작전이 실패하면서 외부 지원을 받지 못하고 고립된 비야크 섬 일본군의 운명에 대해서는 비야크 섬 전투를 참조.
2.11. 혼 작전 이후
1944년 7월에는 16전대 소속 경순양함 오이가 격침되었다. 구축함 시키나미는 오이를 견인하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함장을 포함한 368명의 승조원은 시키나미에 의해 구조되었지만 153명이 전사했다.1944년 9월 12일, 시키나미는 미군 잠수함에 격침되어 승무원 전원이 전사했다. 추가증원이 없었으므로, 16전대에 남은 배는 구축함 우라나미와 경순양함 키누, 그리고 아오바뿐이었다.
1944년 10월 11일, 경순양함 키누와 충돌 사고가 났지만 피해는 미미했다.
2.12. 오르목 만 전투(다호작전)
레이테 섬 서쪽에 있는 오르목 만에 일본군 증원부대를 보내기 위해 시행된 작전.2.12.1. 16전대 최후의 작전
10월 18일, 아오바는 구리다 함대와 함께 브루나이에서 출항한다. 원래는 구리다 함대에 배속되어 레이테 만 해전에 참가할 예정이었지만, 편성이 바뀌면서 제2유격부대(통칭 시마 함대)에 소속되었다. 편성표에 대해서는 일본어 위키 레이테 만 해전을 참조하자. 여기서 아오바가 수행한 작전이 바로 다호작전으로, 영어로는 오르목 만 전투이다.여기서 아오바가 맡은 임무는 레이테 섬 오르목 만에 증원될 일본군 병력을 실은 수송선을 호위하는 것이었다. 레이테 섬에 미군이 상륙하고 있으니만큼 이 임무는 매우 위험했지만, 레이테 섬의 미군을 몰아내려면 아오바의 16전대가 성공적으로 증원병력을 올려보내야 했다. 세계 최대의 전함 야마토를 필두로 한 구리다 함대가 레이테 섬의 미군 상륙부대를 박살낼 계획이었고, 이들을 위해 오자와의 항모전단이 미끼가 되어 홀시의 제3함대를 꾀어낼 예정이었으므로 나름대로 승산은 있다고 일본군은 생각했다.
1차 작전은 아오바의 16전대(아오바, 키누, 우라나미)와 수송선 5척으로 구성되었으며, 10월 21일에 링가 정박지를 출발하여 마닐라로 향한다. 그러나 아오바는 1944년 10월 23일에 미군의 가토급 잠수함 브림의 어뢰에 2번 기관실이 직격당해 다시 빈사 상태에 빠진다. 경순양함 키누가 연인해줘서 마닐라로 귀환했고, 16전대 사령관 사콘죠는 키누를 기함으로 삼지만 미군의 공습으로 키누에서 47명, 우라나미에서 25명의 전사자를 낸다. 그래도 전진을 계속한 16전대와 수송선들은 10월 25일에 카가얀에 도착, 병력을 양륙시킨다. 그러나 귀환하던 16전대는 10월 26일에 미군의 공습을 당했고, 우라나미와 키누 모두 침몰했다. 사콘조 제독은 수송함을 기함으로 삼아 10월 27일에 마닐라로 귀환했고, 수송선 2척이 본대와 갈라져 추가적인 수송작전에 임하지만, 한 척은 중간에 격침되었고 다른 한 척은 양륙 중에 격침되었다.
16전대가 괴멸되긴 했지만 일본군은 1차 다호 작전이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레이테 섬에 돌입해서 병력을 양륙시킨다는 작전 목적을 완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6전대는 오자와의 항모전단과 함께, 레이테 만 해전에서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유이한 부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헛수고로 돌아갔는데, 구리다 함대가 사마르 해전에서 미 해군의 태피 3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도망쳤기 때문이다. 태피 3이 호위항모와 구축함, 그리고 호위 구축함으로 이뤄진 걸 감안하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세계 최강의 전함 야마토와 일본의 자랑 나가토가 미군 구축함 USS 히어만에게 쫓겨서 도망가는 등의 졸전을 벌인 결과였다.[6] 게다가 미 해군 함재기 전력 중 일부가 16전대를 공격하느라 바빴던 덕분에 구리다 함대는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다.
마닐라로 귀환한 후, 아오바는 응급수리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10월 29일에 윌리엄 홀시 휘하의 38 기동함대(Task force 38)의 공습을 당한다. 수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이대로는 너무 위험했기에 아오바는 모가미급 중순양함 쿠마노와 수송선단과 동행,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같은 곳에 있던 묘코급 중순양함 나치는 피해가 너무 심했기에 동행하지 못했고, 나중에 미군의 공습으로 침몰한다.
그러나 일본군 연합함대는 레이테 만 해전에서 미군 정규항공모함 7척을 격침시켰다고 발표했고, 희소식을 들은 일본군 육군은 이 기회에 레이테 섬에 병력을 증원해서 미군을 몰아내자고 결정한다. 그래서 다호작전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지만, 미군의 실제 피해는 경항공모함 1척, 호위항공모함 2척, 구축함 2척, 호위구축함 1척이었으므로 이는 대단히 잘못된 결정이었다.
2.12.2. 예인 능력 없음. 먼저 실례
一方で、お互いの乗組員が帽子を振り、「元気で頑張れ」「青葉頑張れ」と声を交わして別れたという証言も残っている(「軍艦青葉は沈まず」「撃沈戦記」)。
서로(아오바와 쿠마노)의 승무원이 모자를 흔들며 "건강하게 힘내라", "아오바 힘내라"라고 덕담을 나누며 헤어졌다는 증언도 남아있다.
ㅡ「군함 아오바는 가라앉지 않는다」「격침전기」
서로(아오바와 쿠마노)의 승무원이 모자를 흔들며 "건강하게 힘내라", "아오바 힘내라"라고 덕담을 나누며 헤어졌다는 증언도 남아있다.
ㅡ「군함 아오바는 가라앉지 않는다」「격침전기」
1944년 11월 5일, 수리가 아직 다 끝나지 않은 아오바는 마닐라 항을 출항해서 루손의 산타크루즈항에 들렀다가 11월 6일에 출발해서 필리핀 볼리나오 근처에 도달했는데 미군 잠수함편대가 선단을 덮쳐서 옆에 있던 중순양함 쿠마노가 (아오바를 전에 공격했던 가토급 잠수함 브림도 낀) 미군 잠수함들의 어뢰 2발을 맞아 항행불능이 되었다. 이 때 23발의 어뢰가 발사되었지만 아오바는 기적적으로 안 맞았다. 일본의 주장에 따르면 7발의 어뢰가 아오바를 노렸지만 다 피했다고.
이후 아오바는 예인 능력 없음. 먼저 실례라는 전문을 남기고 살아남은 수송선단의 대다수와 함께 내뺀다. 이 전문은 아오바에서 기록한 통신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아서 진위여부가 한때 논란이 되었는데, 비교적 생존자가 많았던 쿠마노의 승조원들이 이 말을 들었다고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아오바의 '먼저 실례'는 사실인가? 링크에 나온 바에 따르면, 쿠마노의 함교에 있던 항해사가 아오바가 보낸 "예인 능력 없음. 먼저 실례"라는 발광신호를 봤다고 한다(...) 쿠마노가 피격되자, 뒤에서 따라오던 아오바가 그런 발광신호를 보낸 후 내뺐다고.
전후에 살아남은 쿠마노 승무원들은 아오바의 발광신호를 계속 화제로 삼았다고 한다. 다만 당시 아오바의 승무원들은 갑판으로 올라와 쿠마노에게 거수경례를 했고, 쿠마노의 승무원들은 아오바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힘내라 아오바!'라고 소리를 지르며 배웅했다는 기록도 있는 등, 나름 훈훈한(…) 분위기였던 모양.
사실 아오바가 정말로 예인 능력이 없던 건 맞다. 이 때도 최고 속력이 시속 6노트 정도였기에 인양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무전을 가급적 짧게 보내라는 지시도 있었고, 미군 잠수함들이 출몰하고 있으니 그런 명령을 내리는 것도 당연하다. 실례라는 전문 자체도 토네급 중순양함 등의 다른 배가 써먹은 적이 있다. 다만 현대인의 관점에선 그 상황에서 실례라는 단어를 쓰는 게 매우 웃겨서 문제일 뿐이다.
이후 아오바는 가오슝에 도착해서 연료 보급을 요청했지만, "후퇴하는 배에게 줄 연료는 없다"며 보급을 거절당한다. "우리 아오바를 버릴 셈이냐"며 승무원들은 분노했고, 함장의 설득으로 겨우 보급을 얻어내고, 망가진 엔진을 수리해서 12노트의 속도를 회복하는 우여곡절 끝에 12월 12일, 구레 항에 입항했다. 입항할 때 승무원들은 "아오바 만세!"를 외치며 기뻐했다고. 일본군 중순양함 중 살아서 일본에 돌아온 건 아오바와 토네 뿐이었지만, 토네는 일본군의 공식 기록에서는 경순양함으로 분류되었으므로 살아서 일본에 돌아온 중순양함은 아오바 뿐이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레이테 만 해전에서 아오바가 세운 전공이란 건 대단할 게 없다. 16전대가 레이테 섬에 돌입하는 데 성공했기에 '작전 성공에 도움이 되었다'는 타이틀을 운좋게 거머쥔 것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야마토가 도망가는 바람에 사실상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몇 안되는 이득을 정리해 보자면 잠수함에게 엔진이 고장나는 치명타를 당하고 수리를 위해 6노트로 기어가던 16전대의 기함을 격침시킬 기회를 놓쳤으며, 이 때문에 구레로 돌아가 대공포대로 개조되는 걸 막지 못했다는 것 정도다.
아오바를 완전히 격침시키기 위해 미 해군이 함대전력을 분산시켰다는 평가도 있지만 위에 서술되었듯 미 해군은 처음부터 쿠마노 등 다른 함선들이 포함된 선단을 소탕하러 온 것이기 때문에 이는 다른 행운함들과 같이 일본 해군 잔존함대 소탕 과정에서 아오바만 무사히 빠져나간 것에 불과하다. 레이테 만 해전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전력이 분산되든 말든 이미 태평양 전역은 미 해군의 압도적 우세로 넘어가 있었다. 다만 아오바의 느린 속도를 고려한다면 그 느린 속도로 그 혼란 속에서 살아남은 아오바의 생존력은 인정할 만하다.
2.13. 구레 군항 공습
2.13.1. 구레 항 입항
겨우 구레 항에 입항했지만, 잠수함에 입은 피해가 너무도 컸던지라 당장은 수리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고 예비용이란 명목으로 방치한다. 그 와중에 1945년 3월, 미군의 1차 구레 군항 공습으로 폭탄을 한 발 더 맞는다. 그러나 솔로몬의 늑대가 어디 가진 않는지 격침되지는 않았고, 이후 수심이 얕은 곳으로 옮겨져서 대공포 진지로 개조되었다. 여기서 2연장 25mm 기관포 4기를 추가로 장착함으로서, 아오바는 3연장 25mm 기관포 5기, 2연장 25mm 기관포 10기, 25mm 단장 기관포 15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96식 25mm 고각기총의 합계는 50문.구레 군항에는 이외에도 키타카미가 대공포 진지로 배치되었지만, 대부분의 군함들은 항구 자체를 보호하기 위해 대부분의 대공포가 철거된 상태라 미군의 공습에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주포로 3식 통상탄을 발사할 수는 있었지만 3식탄의 대공성능이 형편없다는 건 상식이었고, 항공모함 카츠라기처럼 대공화기를 유지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 정도로 미국의 대규모 공습을 막는다는건 애초부터 무리였다. 덤으로 토네는 3월 19일의 공습으로 이미 구레 군항 밖으로 이동한 상황이어서, 구레의 중순양함은 아오바 밖에 없었다.
2.13.2. 최후
세 차례 공습을 당하고 침몰한 아오바. |
1945년 7월 24일, 윌리엄 홀시 휘하의 38 기동함대가 2차 구레 군항 공습을 감행했고 아오바는 또 다시 폭탄 한 발을 먹고 착저한다. 보통은 이것으로 격침이지만, 처음부터 수심이 얕은 곳에 정박했기에 살아남는다.
그러나 미군은 의외로 다수의 대형함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네놈들을 묻어버리겠다며 7월 28일에 다시 공격을 감행했고, 아오바는 이세급 전함 이세, 공고급 순양전함 하루나와 함께 집중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세와 하루나의 대공포가 철거되었기에 대공포 사격이 가능한 함선은 아오바가 유일했고 이 때문에 사실상 혼자서 미 해군을 상대해야 했다. 물론 이세와 하루나도 저항했지만, 부포와 대공포가 없는 두 전함이 할 수 있는 것은 주포로 3식 통상탄을 발사하는 것밖에 없었고 이것으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결국 이세는 16발, 하루나는 8발의 폭탄을 먹고 격침되었고 나머지 대형함들(아마기, 오요도, 토네 등)도 모조리 격침되거나 무력화된다. 공습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배로는 호쇼, 류호, 키타카미, 카츠라기등이 있었지만, 이들 모두 오래 전에 군함으로서의 가치를 잃은 상태였다.[7] 아오바 역시 38기동함대의 함재기로부터 4발의 폭탄을 먹었고, 화재까지 발생했기에 죽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미군은 구레 군항의 모든 군함을 없애기 위해 오키나와에 있는 7공군의 B-24 폭격기 79대를 출격시킨다. 그들이 발견한 건 불타는 아오바였고, 아오바가 아직 안 죽었다고 판단한 미군은 집중폭격을 감행한다. 이미 저항하는 것 조차 힘든 만신창이가 된 아오바는 최후까지 싸웠지만, 침몰 직전의 중순양함 1척이 미군의 일방적인 공습을 막는다는건 불가능한 일이었고 결국 B-24 편대에게 4발의 폭탄을 더 먹고 함미가 거의 절단되며 격침되었다.
이 공습에서 미군의 B-24 2대가 격추되고 14대가 손상을 입었지만, 이게 전부 아오바의 전과인지는 불명. 일본에서는 공고급 순양전함 하루나가 B-24 2대를 격추시켰다고 주장하지만, 대공포도 부포도 없이 주포로 저질 대공포탄인 3식 통상탄을 발사하는 게 고작이었던 하루나에게 그게 가능한지는 알아서 판단하자(...)
태평양 전쟁 동안 저승에서 세번이나 살아돌아오면서까지 미국 해군에게 끈질기게 피해를 입히던 솔로몬의 늑대는 결국 구레를 수호하며 최후를 맞이했다. 아오바가 격침되면서 일본 본토의 중순양함은 전멸했고, 연합함대도 괴멸되었다. 살아남은 군함이 없지는 않았지만, 전투가 가능한 건 극소수의 잠수함 뿐이었고 나머지는 미군을 피해 숨거나 도망칠 뿐이었다.
2.14. 전후
격침된 후 그대로 방치되어 전후 스크랩 처리. 아오바의 함수에 붙어있던 국화문양은 현재 해상자위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아오바의 주포 부품은 구레시 해사 역사 과학관(애칭은 야마토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2021년 6월의 일본어 위키피디아 아오바 항목에 따르면, 아오바의 국화문양은 해상자위대제1술과학교에 부착되어 있다고 한다.
아오바가 최후를 맞이한 곳에서는 후루타카 산이 보였는데, 에스페란스 곶 해전 당시에 아오바의 뒤를 따르다가 침몰한 중순양함 후루타카는 이 산의 이름을 딴 것이다. 후루타카에게 도움을 받았던 아오바가 후루타카 산 곁에서 격침된 것도 참 신기한 인연.
3. 평가
실전에서의 활약상과 달리 아오바의 성능은 매우 뒤떨어진 수준이다. 고물이라는 이유로 미군에서 구박받은 펜사콜라급 중순양함보다 더 낡았으니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구축함의 철갑탄이라도 막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얇은 장갑(4인치)을 가진 데다 방뢰구획에서는 매일 물이 샐 정도로 고물이었던 펜사콜라급의 8인치 포가 10문인데, 아오바는 8인치 포가 6문밖에 없었다. 이러니 열세일 수밖에 없다.다른 배와 비교하면 더욱 비참해진다. 아오바급 중순양함 항목을 보면 미군 중순양함들에게 크게 밀리는 스펙이 줄줄이 나오는데, 이 정도면 미군이 그냥 걷어차도 박살날 수준이다. 심지어 미군의 클리블랜드급 경순양함보다도 배수량이 낮다. 경순양함보다도 가벼운 중순양함이니, 이 정도면 전장에서 마구 구르다가 소모되는 게 정상이며, 아오바가 기함을 지낸 제 6전대의 중순양함들도 그런 운명을 맞았다.
그러나 아오바는 솔로몬의 늑대라는 별명처럼 나름대로 인상을 남겼다. 구식 중순양함이 포함된 함대가 엔터프라이즈를 비롯한 미 해군 주력함대가 버티고 있는 해역으로 쳐들어가서 승리를 얻어낸 것은 누구도 예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더불어 아오바와 동행했던 제 8함대의 군함들은 이후의 해전에서 미군에게 얻어터지고 침몰하면서 잊힌 반면에, 아오바는 구레에서 침몰할 때까지 살아남으며 나름대로의 역할을 다했다. 일본군 군함 중에서는 구식 군함 중 하나일 뿐이었지만, 미군의 관점에서는 매우 짜증나는 존재였다. 태평양 해전에서 미 해군에게 유일하게 굴욕적인 대패를 선사했으며, 그 중 가장 오래 살아남은 군함이었기 때문이다.
불침함이라는 영예를 얻은 배이기도 하다. 몇 번이나 침몰 수준의 피해를 입으면서도 놀라운 운빨과 대미지 컨트롤로 전쟁 말기까지 생존했고, 일본군의 공식적인 중순양함 중 유일하게 살아서 일본에 귀환했다. 전후에 미군이 "일본군엔 대미지 컨트롤의 개념이 없다"며 혹평을 내린 걸 생각하면 놀라운 수준이다. 대미지 컨트롤의 모범이라는 자이틀리츠급 순양전함 1번함 자이틀리츠, 아무리 일본군이 공격해도 격침시킬 수 없었던 엔터프라이즈와 맞먹는 생명력이 아닐 수 없다. 일본군의 군함인데도 보수(직별) 항목의 대성공사례에 기재될 정도였다.
그러나 엔터프라이즈처럼 전쟁 결과를 뒤집을 정도로 활약할 수는 없었다. 아군이어야 할 일본군 군함들도 아오바의 발목을 잡는 판이었고, 중순양함이라는 태생적인 한계도 문제였다. 중순양함이 정면대결로 미 항모전단을 이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격침전과가 엄청나지는 않다. 일본 최고의 중순양함이라면 엄청난 격침실적을 올렸을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다만 아오바는 상부의 명령을 묵묵히 수행했을 뿐이고, 그게 쌓여서 수훈함이 된 것이다.
물론 행운과 수훈만 있는 건 아니고, 오래 버텼던 만큼 여러 해전에 참전하면서 온갖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한때는 민폐함이라는 오해를 받았을 정도. 그러나 아오바의 함생이 잘 알려진 후에는 오해도 수그러들었다.
3.1. 일본
『"ソロモンの狼"といわれ"不沈重巡青葉"の名をほしいままにした軍艦青葉、最後まで英姿を残した不死身の青葉』
솔로몬의 늑대. 불침중순 아오바. 최후까지 당당했던 불사신 아오바.
ㅡ아오바 승조원들의 회상. (칸코레 위키 아오바편에서 인용)
솔로몬의 늑대. 불침중순 아오바. 최후까지 당당했던 불사신 아오바.
ㅡ아오바 승조원들의 회상. (칸코레 위키 아오바편에서 인용)
일본에서는 아오바를 "몇 번이나 대파되어도 살아돌아와서 미군을 공포에 떨게 한 군함"이라고 칭찬했으며, 일본군 수뇌부도 아오바를 높이 평가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어려운 임무를 맡기더라도 어떻게든 살아서 임무를 수행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물론 아오바도 임무 완수에 실패한 경우가 많지만, 그 자신의 실수로 작전 전체를 말아먹은 사례는 거의 없다. 전쟁 후기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했으니 아오바가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당연했다. 위에 나온 전공과 끈질긴 생명력을 감안할 때, 주포 부품이 박물관에 전시된 것도 이상한 건 아니다.
아오바의 별명인 '솔로몬의 늑대'를 보면 일본이 아오바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알 수 있다. 늑대 항목에 나오듯이 일본에서는 늑대가 원래 농작물의 신으로 숭상 받았고, 늑대의 발음이 대신(大神)이라는 뜻의 '오오카미'와 발음이 똑같은 오오카미(おおかみ)다.
3.2. 미국
미국에서의 평가도 괜찮은 편이다.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오바의 함생을 미군 관점에서 바라보면 당장 이해가 될 것이다. 겉보기에는 구식 중순양함인데, 아무리 때려도 바퀴벌레 마냥 죽지 않는다. 심지어 아오바가 대파된 후 미군 세력권에 가만히 있어도 못 죽인다. 고작해야 구식 중순양함이니까 피해도 적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미 해군은 그런 배에게 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했다. 주력부대가 아무리 적 항공대의 방해로 묶여있는 상황이었다지만 고물 중순양함한테 과달카날의 제해권을 잠시나마 빼앗기고, 그로 인해 해병대가 쌀밥과 구더기를 씹으며 고통받은 현실을 보면 아오바를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미 해군은 우세가 압도적이던 전역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6노트로 후퇴하던, 잡는게 당연한 걸 놓친 것으로도 체면을 구겼다. 육군 항공대 역시 카비엥에서 코 앞에 대파된 아오바를 두고서도 한 달 가까이 멍청하게 있다가 아오바를 놓치는 수모를 당한 바 있다. 일부러 방치한 게 아니라면 양쪽을 전부 능욕한 희귀한 사례인 셈이다.
3.3. 그 외
국내에선 밀덕외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함대 컬렉션이 인기를 끌고 와레 아오바가 알려지면서 지명도가 높아졌다. 그러나 이 와레 아오바의 임팩트가 너무 컸기에 당시 제6전대 사령관을 맡아 아오바에 승선했던 고토 아리토모는 수많은 전공을 세웠음에도 무능한 인물로 취급받는다. 이건 아오바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 많은 수훈에도 불구하고 미군 중순양함 및 민폐함 이미지가 굳어 버렸고, 이는 일본 칸코레 팬덤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영 좋지 않은 군함으로 취급되고 있다. 한 번 굳은 이미지가 워낙 강한 터라 실제 역사에서 보여준 활약이 알려진 후에도 그런 이미지는 여전히 유지되었지만, 와레 아오바 이야기가 신빙성이 없음이 밝혀진 후에는 이미지가 크게 개선되었다.4. 기타
- 전쟁 중의 전사자는 172명으로, 전체승무원이 657명이고 많은 전투에 참가한 걸 감안하면 상당히 전사자가 적은 편이다.
- 구레의 구 해군 묘지와 공원에는 아오바의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 태평양 전쟁 당시에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일본 해군의 주계과 사관학교인 해군경리학교를 졸업하고 주계과 중위로 임관했는데, 그의 첫 부임지가 바로 아오바였다. 첫 날부터 선임 사관들에게 이유도 없이 귀싸대기를 맞거나, 해군병학교 출신의 병과사관들과 서열싸움을 벌이는 등의 일화를 남긴 걸로 보아 다른 사관들과의 사이는 안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나카소네는 이런 경험을 통해 일본군의 병영부조리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하나, 그의 출신상 그런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해군경리학교가 고등교육을 받은 일반인들을 빠른 속도로 장교로 임관시키는 수단이었고, 일본 해군에서도 주계과 사관들을 대놓고 엘리트로 대접했으니 알력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주계과 장교라는 자들은 후방근무가 일반적이었고, 배가 침몰해도 우선적으로 퇴함할 수 있었다. 나카소네도 자바 해전에서 발락파판 상륙작전에 설영반 반장으로 참가해서 실전경험을 하고 죽을 고비도 넘겼다고 하나, 아오바에 탄 사관들이 전쟁 내내 죽음과 직면했던 것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아무튼 나카소네는 아오바에 잠시 근무 후 해군진수부를 거쳐 다른 임지로 떠났고, 아오바 승조원들이 전쟁 내내 죽을 고생을 하는 동안 구레 진수부 같은 후방에서 편하게 근무했다. 그러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구레에서 근무하다 버섯구름을 목격했다는 것으로 보아, 구레 군항 공습에서도 구레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오바가 최후까지 지켜준 대상 중에 나카소네도 포함된다는 뜻이다. 아오바가 없었으면 미군의 폭탄이 주계 사관 나카소네의 머리 위에 떨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정치인이 된 나카소네는 1985년에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 감사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발언을 하고, 도쿄재판 사관을 자학적이라고 비판하며 "전후는 총결산됐다"고 선언하는 등 물의를 일으켰다. 나카소네가 생각했던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이들'과 아오바를 연결지어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것일까? 자세한 내역은 알 수 없겠지만, 나카소네는 아오바와의 인연을 잊지 않고 2012년에 세워진 세 번째 위령비의 건립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 아오바의 함장을 지낸 인물로는 연합함대 사령관을 역임한 고가 미네이치, 제8함대 사령관을 지낸 미카와 군이치 등이 있다.
- 아오바의 끈질긴 생명력 때문에 쇼카쿠급 항공모함 1번함 쇼카쿠와 비교되기도 하는데, 쇼카쿠는 산호해 해전과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침몰 수준의 피해를 입고도 살아남은 경력이 있어서다. 그러나 쇼카쿠는 필리핀 해 해전에서 미군 잠수함에게 공격당해 격침되었으므로, 생존기간은 아오바가 더 길었다.
- 아오바처럼 세 번이나 대파되고도 살아남은 군함으로는 아키즈키급 구축함 스즈즈키가 있다. 스즈즈키는 세 번째 대파 이후 침몰 직전의 상태로 간신히 항구로 돌아왔고, 아오바처럼 대공포대로 사용되다 전후에 방파제 신세가 되었다.
- 일본에서 늑대라는 수식어가 붙은 배는 묘코급 중순양함 3번함 아시가라가 있다. 별명은 '굶주린 늑대'인데, 1937년에 영국 해군의 관함식에 참석했다가 "나는 오늘 처음으로 진정한 군함을 보았다. 지금까지 본 것은 전부 여객선이었다"는 찬사(?)를 받으며 붙여진 별명이다. 아오바에게 붙은 '솔로몬의 늑대'가 경외의 의미를 담은 것과는 차이가 큰 것이, 일본에서는 늑대가 좋은 의미지만 유럽에서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실제로 저 말은 묘코급 중순양함의 극악한 거주성을 비꼬는 표현이었다.
5. 대중매체
- 애니멘터리 결단 제 13화 제 1차 솔로몬 해전에서 등장한다. "아오바의 정찰기로부터 보고입니다"라는 대사와 함께 미 함대의 정보가 미카와에게 제출된다. 이후에는 해전 장면으로 전환되며, 2연장 포탑 2개를 함교 앞에 갖춘 중순양함들이 포격과 뇌격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제 6전대의 중순양함으로 보이는데, 8함대 기함 초카이는 2연장 포탑이 함교 앞에 3개이기 때문이다. 일본 우익의 사상을 상당히 집요한 방법으로 숨긴 애니라는 평.
- 월드 오브 워쉽/일본 테크 트리에 6티어 순양함으로 등장한다.
- 이 세상의 한구석에라는 작품의 선전용 포스터에 아오바가 등장한다. 링크 관련 영문 위키는 #이며, 드라마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
- 이 세상의 한구석에(애니메이션)에서는 주인공 스즈의 소꿉친구 미즈하라 테츠가 수병으로 근무하는 배로 등장한다. 스즈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므로 구레 군항 공습에서 아오바가 최후까지 싸우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전쟁이 일본의 패망으로 끝난 후 아오바의 잔해 앞에서 테츠가 아오바를 바라보고 있고, 스즈가 그 옆을 지나가며 조카딸 하루미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클로즈업된다. 그 뒤에 나오는 건 하늘로 날아오르는 아오바.
- 함대 컬렉션에서는 민폐 + 기자 속성이 붙어서 출연한다. 관련 만화에서 와레 아오바 사건을 그리는 바람에 민폐함으로 찍혔지만, 그 영향으로 아오바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바람에 일본군의 실체가 발각되는 긍정적인 영향도 있었다. 자세한 건 아오바(함대 컬렉션) 항목 참고.
- 워 썬더에서 일본 대양해군 트리의 4랭크 중순양함으로 나온다.
6. 관련 링크
- 아오바급 중순양함 영문 위키피디아
- 중순양함 아오바 영문 위키피디아
- 중순양함 키누가사 영문 위키피디아
- 영문 위키피디아 에스페란스 곶 해전
- 영문 위키피디아 베허호 사건
- 영문 위키피디아 구레 군항 공습(7월)
- 칸코레 위키 아오바편
- 海上自衛隊第1術科学校(해상자위대제1술과학교)
[1] 양 발이 절단되었으며, 지혈이 제대로 안되는 상황이었다.[2] 하지만 이런 의도였다면 오해받기 딱 좋은 '나는 아오바다'보다 '기함 건재'등의 좀 더 직설적인 신호를 보내는 게 더 타당하다.[3] 19구축대 소속인 4척의 구축함 중, 후부키급 구축함 9번함 이소나미와 11번함 아야나미는 이미 격침된 상태였다. 그리고 19구축대 소속 군함들은 2021년 6월 시점에서 아야나미를 제외하면 개별항목이 개설되어 있지 않다. 이소나미라고 치면 함대 컬렉션의 칸무스인 이소나미로 연결되며, 우라나미라고 치면 본체는 없고 게임 캐릭터와의 연결링크만 나오는 데다, 시키나미는 그것조차 없고 시키나미(함대 컬렉션)이나 시키나미(전함소녀)라고 쳐야 관련정보를 얻을 수 있다.[4] 지금의 인도네시아 파푸아주[5] 에스페란스 곶 해전에서 키누가사에게 피격된 그 보이스다.[6] 물론 구리다에게도 변명거리는 있다. 오자와의 함대가 임무를 성공하면 무전을 날려주기로했으나 공교롭게도 구리다 함대의 어느 누구도 그 무전을 받지못했기에 구리다는 오자와가 실패했는지, 성공했는지 알길이 없었다. 그 상황에서 함대의 후방에 적의 함대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리자 포위당할 위험을 감수하지않고 함대를 보존해야겠다는 판단은 틀린 판단만은 아니었다.[7] 호쇼는 워낙 낡아서 훈련함으로 전용된지 오래였고, 류호는 전손판정을 받고 항구에 방치된 폐물이었으며, 카츠라기는 2000파운드 폭탄을 갑판에 맞고 중파된 상태였다. 일본 해군의 항공대가 오래 전에 전멸했으므로, 여기 거론된 항공모함들은 대형 수송선 이상의 역할을 할 수도 없었다. 전쟁 내내 아무 것도 안 한 군함으로 유명한 키타카미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