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란토 공습 | |||||
| 좌초한 콘테 디 카보우르급 전함 콘테 디 카보우르 | |||||
| 명칭 | 영어: Battle of Taranto 이탈리아어: Notte di Taranto | ||||
| 날짜 | 1940년 11월 11일 | ||||
| 장소 | 이탈리아, 아풀리아 주 타란토 |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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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휘관 | |||||
| 전력 | |||||
| 항공모함 1척[1]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4척 뇌격기 21기 | 전함 6척[2] 중순양함 7척 경순양함 7척 구축함 13척 | ||||
| 결과 | |||||
| 영국 해군의 승리, 하지만 이탈리아 해군 무력화에는 실패 | |||||
| 피해규모 | |||||
| 전사 2명 포로 2명 뇌격기 2기 격추 | 전사 59명[3] 부상 600명 전함 3척 무력화[4] 중순양함 1척 손상 구축함 2척 손상 전투기 2기 파괴 | ||||
1. 개요
1940년 11월 11일 영국 해군이 이탈리아 해군의 모항이었던 타란토에 공습을 가한 전투이다.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 퓨리어스가 1918년 7월 19일에 감행한 톤더른 공습의 확장판이며, 역사상 최초로 항공기와 전함이 맞붙은 사건이었다.타란토 공습은 항공어뢰를 사용한 공습이 전함을 상대로 대단히 유효함을 증명하였다. 하지만 이탈리아가 손상을 입은 전함들을 빠르게 복구시켰고, 얼마 안 가 영국 역시 이탈리아의 인간어뢰 공격으로 전함 2척이 대파되는 피해를 입으면서 정작 이 공습 자체는 전쟁에서 그리 큰 전략적 의의는 가지지 못했다.
2.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지중해에서는 영국 해군 지중해함대, 프랑스 해군 지중해함대, 이탈리아 해군 3강 구도가 형성되어 있었다. 1940년 6월 프랑스 전투가 끝나면서 이 구도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독일이 서유럽을 거의 석권하여 영국 본토가 침공 위험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영국 본토 해역 함대가 지중해 함대를 증원하기 곤란한 상황이 닥쳐왔다. 게다가 유사시 지중해에서 영국과 협력하며 이탈리아를 견제할 수도 있었던 프랑스 해군마저 독일에 항복하면서 영국의 지중해 함대가 이탈리아 해군에 대해 전력의 열세에 몰리게 되었다.마침내 1940년 6월 10일 이탈리아가 추축국에 가담하여 영국에 선전포고를 해왔다. 당시 이탈리아 해군은 전함 6척[5], 순양함 21척, 구축함 52척, 잠수함 106척 등을 보유하여, 앤드루 커닝엄 제독의 영국 지중해 함대(전함 4척, 항모 1척, 순양함 9척, 구축함 25척, 잠수함 10척)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이집트의 영국군은 전적으로 바다를 이용한 보급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몰타섬을 둘러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구로 오는 해로가 최단 거리의 보급로였다. 대안으로 희망봉을 경유하면서 아프리카 대륙을 한 바퀴 도는 항로도 있었지만 이 경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효과적인 보급이 어려웠다. 그 때문에 아주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지브롤터 ↔ 몰타 ↔ 알렉산드리아로 이어지는 항로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중해 항로를 수호해야 할 영국 해군은 상대인 이탈리아 해군에 비해 수적 열세에 몰렸을 뿐만 아니라, 시칠리아 및 몰타 섬을 중간에 두고 지브롤터와 알렉산드리아 양쪽의 세력이 분리되어 서로 작전 협조가 어려운 상태였다. 또한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에서 불과 8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몰타 기지의 영국군은 구축함 1척, 잠수함 6척, 대공포 42문, 전투기 12대가 전부라서 이탈리아 해공군의 집중 공격을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이탈리아군이 함대를 투입하여 깽판이라도 부리는 날에는 몰타 기지는 물론 이집트 주둔 영국군에게까지 위기에 처할 상황이었다.
3. 과정
3.1. 양측의 상황
함대를 사열하는 베니토 무솔리니.
당시 이탈리아 해군의 전력은 전함이 6척[6], 중순양함이 무려 8척[7]으로, 정면 결전을 펼칠 경우 영국 지중해 함대까지도 압도할 정도의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리비아 주둔 이탈리아 육군은 아직 물자와 장비 양면에서 적절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고, 특히 무솔리니의 이집트 침공 준비를 위해 추가적인 대규모 보급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이탈리아 해군은 당분간 리비아의 트리폴리와 벵가지 행 보급선단의 호위에만 전념해야 했다. 그런데 마침 알렉산드리아 주둔 영국 지중해 함대도 몰타 기지의 부족한 전력을 보충하기 위한 호송 선단을 호위하여 서로 진로가 엇갈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1940년 7월 9일 이탈리아의 칼라브리아 반도 근해에서 푼타 스틸로 전투(Battle of Punta Stilo, 영국 측 기록)-칼라브리아 해전(Battle of Calabria, 이탈리아 측 기록)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 전투 자체는 양측이 수송선단을 호위하고 각각의 목적지로 가다가 우연히 맞닥뜨린 사건이었지만, 이탈리아 공군 폭격기 72대가 투입되고 순양함과 전함들이 서로 포격을 교환하는 등 대규모 해전으로 발전했다. 이탈리아는 전함 줄리오 체사레(Giulio Cesare) 소파, 중순양함 볼차노(Bolzano)가 대파되었으며, 영국은 경순양함 넵튠(HMS Neptune), 글로스터(HMS Gloucester), 구축함 헤리워드(HMS Hereward), 디코이(Decoy)가 대파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 전함 줄리오 체사레와 영국 전함 워스파이트는 서로 역사상 최장거리의 포격전 기록을 세우기도 했는데, 26,000야드(24km) 거리에서 줄리오 체사레가 워스파이트를 상대로 지근탄 2발을 내고, 워스파이트의 15인치 포탄1발이 줄리오 체사레의 후방 갑판에 명중했다.
이후에도 이탈리아 해군은 리비아의 자군에게, 영국 해군은 몰타 기지를 위한 재보급에 집중하면서 가끔씩 조우전이 발생할 뿐이었다. 그러나 본토에 안전한 항구 타란토를 보유한 이탈리아와 달리, 영국 측은 알렉산드리아 해군 기지 자체가 이탈리아 육군의 침공 위협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영국 지중해 함대에게 더욱 불리한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영국 해군이 이탈리아 해군의 주력 함대(전함 6척, 중순양함 7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8척)가 집중 배치되어 있는 타란토 항을 직접 공격하기도 어려웠다. 당시 타란토 항은 대공포101문, 기관총 193정의 막강한 화력을 위시하여, 서치라이트22대, 저공 비행하는 항공기의 기습을 저지하기 위한 방공기구(barrage balloon) 87대, 어뢰 공격을 막기 위한 대어뢰 저지용 그물망 4.2km등이 설치되어 있는 등, 이탈리아 해군 나름대로 철저한 방호책을 강구해둔 상태였다.[8]
3.2. 작전 계획 수립 및 공습 준비
1938년 뮌헨 위기 당시 이탈리아 해군에 의해 영국 해군 항모의 생존이 위협받을 가능성을 우려한 지중해 함대 사령관 해군 대장 더들리 파운드 제독이 대책을 강구하라는 지시를 내림에 따라, 지중해 함대의 항공모함 글로리어스 전단장 리스터 소장(Sir Arthur Lumley Lyster)이 이러한 상황에 대비한 해법을 제시한 바 있었다. 바로 항공모함의 함재기 소드피시를 이용하여 야간에 뇌격을 가하고 함재기를 수용한 후에 전속력으로 후퇴하는 기습작전이었다.[9] 파운드 제독은 이 조언을 받아들이고 1939년에 후임으로 부임한 지중해 함대 사령관 앤드루 커닝엄 제독에게 전언하여, 저지먼트Judgment 작전이라는 명칭을 부여하게 되었다.[10]
그리고 프랑스의 몰락과 더불어 프랑스의 해군이 동맹군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저지먼트(Judgment) 작전이 필요하게 되었다. 작전에 나설 항모로는 다소 낡았지만 함재기가 모두 소드피시로 구성된 항모 이글(HMS Eagle)이 선택되었다. 그러나 확정적인 계획은 9월 16일 이탈리아 육군이 시디 바라니(Sidi Barrani)에서 정지하여 영국 지중해 함대에게 운신의 자유가 확보된 후에나 작성될 수 있었다.
당초 작전은 10월 21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소드피시의 화재 사고가 번져 항모 이글의 연료 시스템까지 파손되는 재난이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작전 시행일이 11월 11일로 연기되었을 뿐 아니라, 항모 이글이 작전 참가를 포기하고 항모 일러스트리어스에게 소드피시 5대를 인계하여, 항모 일러스트리어스(HMS Illustrious) 전단(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4척이 호위)이 공습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3.3. 정찰
당연히 작전을 위해서는 타란토 항에 대한 사전정찰을 통해 공습에 필요한 정보[11]를 알아내야 했는데, 당연히 영국 정찰기가 왔다가면 조만간 영국의 공습이 벌어질 것이라는 경고가 되는데다 타란토 항구 근처에는 13개의 청음소가 있어 레이더 부재를 조금이나마 보완했다. 때문에 영국은 빠르고 높이 나는 정찰기가 필요했는데 당시 지중해 함대에서 유일하게 말타에서 750km 떨어진 타란토까지 왕복할 수 있는 쇼트 선덜랜드 비행정은 적진 정찰에는 부적합했다.때문에 커닝햄은 본국에 신형 고속 정찰기를 요청했고, 얼마 후 말타에 마틴 메릴랜드 쌍발 경폭격기 3대가 도착했다. 이들은 최고 속력 489km/h에 최대 상승고도 9km에 달했기에 이탈리아 주력 전투기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 이렇게 도착한 마틴 메릴랜드들은 타란토 항구의 고공정찰을 여러 번 성공했지나 공습 당일 11월 11일 아침에는 낮은 구름이 끼어 촬영이 불가능했다. 이에 정찰기 조종사 아드리안 워버튼(Adrian Warburton, 1918.3.10~1944.4.12)이 초저공으로 돌입해 군함 계류 상황을 직접 시도하고 대공포를 쏘기도 전에 빠져나왔는데, 승무원들(조종사, 항법사, 기총수)의 정찰 기록에서 전함 숫자가 일치하지 않자 다시 항구로 돌입해서 전함 5척, 순양함 14척, 구축함 27척이라고 확인한 후 탈출했다.
사전정찰 결과 영국은 어뢰 방어망 외에도 방공기구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종사들에게 방공기구들의 구체적인 위치가 상세히 표시된 지도를 제공했다.
또한 조명도 문제였는데, 선두 소드피쉬들에게 어뢰 대신 마그네슘 조명탄을 탑재해서 목표물과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조명탄 투하를 담당시켰다. 여기다 이탈리아군의 탐조등을 무력화할 방법도 필요했는데, 처음에는 말타에 주둔하는 영국 공군의 웰링턴 폭격기들이 고공으로 침투해 시선을 돌리면 1~2분 후 소드피쉬들이 저공으로 침투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소속도, 비행 성능도 달라 난이도가 너무 높았다. 때문에 소드피쉬 중 일부를 폭탄으로 무장하고 고고도로 침투해서 탐조등을 유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12] 하지만 이 때문에 어뢰로 무장한 소드피쉬의 양이 크게 줄었다.
여기다 폭격 날짜도 문제였다. 소드피쉬 조종사들이 성공적으로 공격을 진행하려면 다음과 같은 천문 조건을 만족해야 했다.
- 1. 조종사들이 지형지물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달이 밝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최소한 상현달~하현달 사이가 되어야 한다.
- 2. 타란토 항구의 지형상 소드피쉬들은 서쪽에서 돌입해야 하는데, 달빛을 등진 전함들의 실루엣이 조종사들에게 잘 보이려면 달이 동쪽 하늘에 낮게 뜬 상태에서 돌입해야 한다.
- 3. 소드피쉬의 짧은 항속거리를 보완하려면 일러스트리어스가 타란토 270km 거리까지 접근한 상태에서 소드피쉬들이 발진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일러스트리어스는 충분히 어두운 상태에서 타란토 쪽으로 출발해야 하며 달이 늦은 한밤중에 동쪽 하늘에 떠야 한다.
- 4. 몇 시간 뒤 돌아올 소드피쉬들을 착함시키고 항모가 안전거리 밖으로 후퇴할 때까지 해가 뜨면 안 된다.
3.4. 이탈리아군의 대응
당연히 이탈리아군도 영국 해군이 타란토 항구에 몇 주 동안이나 정찰기를 보내 정찰하는 모습에 뭔가 수상함을 느꼈지만, 커닝햄 제독은 이탈리아군을 교란하기 위해 11월 4일부터 지중해 전역 모든 기지에서 10여 개의 소함대를 일제히 이동시키는 MD8 작전을 펼쳤다. 일부는 실제 수송선단이 맞았지만 일부는 그저 이탈리아군을 교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3.5. 공습 준비
일러스트리어스는 36대의 함재기를 운용할 수 있었으나 호위 전투기를 제외하면 총 24대의 소드피쉬 뇌격기만 탑재할 수 있었고, 최대한 피해를 입히기 위해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웠다. 핵심은 조명탄조-폭탄조-어뢰조 3개로 나뉘어 각자 다른 코스로 돌입하는 것.- 1. 12대씩 2개 편대로 나누어 공격.
- 2. 두 편대는 1시간의 시간차를 두고 이함.[13]
- 3. 각 편대는 다음과 같은 무장 조합으로 구성.
Mark XII 어뢰 1발 6대 어뢰조 250파운드 항공폭탄 6발 4대 폭탄조 250파운드 항공폭탄 4발, 조명탄 16발 2대 - 4. 조명탄을 장착한 소드피쉬 2대가 먼저 남쪽으로 돌입, 부둣가를 따라 조명탄을 투하한 뒤 항구 유류 저장소에 폭격을 가해 서쪽에서 돌입할 뇌격기들 대신 시선을 끌고 전함 뒤쪽에 조명탄을 밝혀 뇌격기들의 시야 파악을 용이하게 한다.
- 5. 폭탄을 장착한 4대의 소드피쉬는 북쪽 고공으로 침투한 뒤 항구 북쪽 순양함과 구축함들에게 급강하 폭격을 가한다.
- 6. 어뢰를 장착한 6대의 소드피쉬는 저공으로 침투해 각자 목표로 지정받은 전함들에게 어뢰를 발사.
이렇게 계획을 쌌으나 작전 며칠 전부터 훈련 중이던 소드피쉬가 세 대나 이함 직후 바다에 추락했는데, 조종사들은 구출했지만 원인을 모르던 중 3번째 소드피쉬 추락 직후에야 유조선 톤라인(Toneline)에게서 급유받은 항공유가 바닷물, 모래, 곰팡이에 오염된 것을 확인했다. 결국 모든 소드피쉬는 연료탱크를 비우고 톤라인의 항공유를 쓰지 않기로 했다. 소드피쉬가 전투 전부터 3대나 손실되었기에 작전도 수정이 불가피했다.
- 1. 기습의 이점을 살릴 수 있는 첫 번째 편대에 12대를, 두 번째 편대에 9대를 배치.
- 2. 1차 편대에는 원래대로 6대, 2차 편대에는 5대가 어뢰 장착. 폭탄 장착 소드피쉬들 중 편대당 2대씩은 폭탄과 조명탄을 섞어서 장착.
3.6. 타란토 공습
3.6.1. 1차 공격대
작전 당일 일러스트리어스는 순양함 4척, 구축함 4척의 호위를 받아 타란토 315km 지점에 저녁 8시에 도착했고, 풍속 2노트라는 소식에 소드피쉬의 이함을 위해 바람 방향으로 변침해서 28노트로 항진했다.[14] 편대장 윌리엄슨(M.W. Williamson) 해군 중령과 815비행중대의 소드피시 12대 -어뢰 장착 6대, 폭탄 장착 6대-가 이함하자 8시 40분이 되었다. 이후 17분 동안 V자 편대를 구성하고 120km/h의 순항 속도로 타란토를 향해 날아갔지만, 하필 그날 경로에 층운이 깔려 있어 일부 소드피쉬들이 편대에서 이탈하긴 했으나 큰 문제 없이 10시 50분에 항구에 도착했는데... 누군가 쑤셔놓은 말벌집 내지는 에트나산[15] 상태. 아까 편대에서 이탈한 이안 스웨인(Ian Swain) 대위가 약 20분 전에 타란토 인근에 도착해서 동료들을 기다리면서 인근을 배회하는 중이었는데, 이탈리아군 청음소에서 이 소리를 듣고 세 번째[16] 경보를 울린 것. 이들이 항구 근처에 접근했을 때 이미 이탈리아군은 대공포를 하늘로 난사하고 있었다.
이 난장판 와중에도 우선 조명탄 소드피쉬 2대가 해안가를 따라가서 2.4km 고도에서 조명탄을 투하했는데 당시 이탈리아군은 탐조등을 쓰지 않아 별다른 공격을 받지 않았다.
다음으로 윌리엄슨 소령과 어뢰 장착 소드피쉬 2기가 소리를 최대한 감추기 위해 1.5km 상공에서 엔진 출력을 최소로 낮추고 해면 10m 높이까지 강하해 이탈리아 전함 콘테 디 카보우로를 노렸지만, 구축함 풀미네(Fulmine)가 이를 눈치채고 1km 거리에서 대공포화를 퍼부었으나 어뢰 공격을 저지하진 못했다. 윌리엄슨의 소드피쉬는 어뢰 투하 직후 바다에 추락했지만[17] 윌리엄슨과 항법사 스칼렛 대위는 생존해 부유식 도크로 올라간 뒤 포로로 잡혔다. 이들이 투하한 어뢰 3발 중 윌리엄슨의 것을 제외한 어뢰 두 발은 빗나갔다.[18]
다만 어뢰조는 생각보다 직접적 사격을 받진 않았는데, 이들은 이미 반원형 항만 안쪽에서 초저공 비행을 하고 있었기에 이탈리아 대공포 사수들이 이들을 조준했다가 맞은편 상선들이 얻어맞는 모습에 조준을 높이면서 대부분 머리 위로 빗나갔기 때문이다. 다만 예광탄 때문에 심리적 부담감은 어쩔 수 없었으며 화약 냄새 때문에 이 예광탄들을 '불타는 양파(Flaming onion)'라 불렀다.
23시 15분, 이안 스웨인 대위의 소드피쉬가 항만에 돌입해 360미터 거리에서 리토리오의 좌현에 어뢰를 명중시켰고,[19] 동시에 켐프(Kemp) 대위의 어뢰도 리토리오의 우현 선수에 명중했다. 켐프 대위와 거의 동시에 투하된 마운드(Maund) 대위의 어뢰는 빗나가서 항만 바닥 진흙에 처박혔다. 어뢰조의 명중율은 50%로 높은 성과를 올렸다.
한편 폭탄조는 원 목표물인 중순양함들이 부두가 아닌 항구 바다 가운데에 계류되어 있어 목표물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처음 돌입한 팻치(Patch) 대위는 2.5km 상공에서 중순양함 트리에스테(Trieste), 트렌토(Trento), 볼차노(Bolzano)가 대공포를 난사하는 것을 발견하고 급강하폭격을 시도했으나[20] 빗나가고 항구 건물들의 지붕을 스치며 도주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중순양함들이 영국 폭격기가 대공포 예광탄으로 위치를 파악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대공포 사격을 중단하면서 어둠에 숨어버리자 후발 폭탄조는 목표 파악을 실패하고 수상정 기지, 경순양함과 구축함들이 정박한 부두를 폭격하기도 했다. 이 중 한 발은 마에스트랄레급 구축함 리베치오(Libeccio)에 명중했지만 불발되었다.[21] 마지막으로 렘 대위는 조명탄 투하 이후 250파운드 폭탄 4발을 유류 저장고에 투하하고 남은 조명탄도 투하해 이탈리아군의 탄약과 체력을 소모시켰다.
23분간 진행된 공격에서 손실된 소드피쉬는 단 한 대였다.
3.6.2. 2차 공격대
10시 30분 헤일(J.W.Hale) 해군 중령이 이끄는 819비행중대의 소드피쉬 9대로 이루어진 2차 공격대가 출격했으며 2대는 폭탄, 2대는 조명탄, 5대는 어뢰를 탑재했다.2차 공격대는 이함 당시부터 문제가 생겼는데, 폭탄조의 8~9번기의 이함을 앞두고 9번기의 바퀴 고정장치를 너무 일찍 제거해서 두 기체가 날개를 부딪혔고, 어렵게 날개를 떼어내자 8번기의 동체와 날개를 덮은 캔버스천이 일부 찢어졌기에 9번기를 먼저 발함시키고 8번기를 격납고로 내려보내 수리 후 재이함시키느라 30분을 지채했다. 여기다 9번기가 비행 중 보조연료탱크가 떨어져나가면서 엔진이 꺼져 추락했고, 300m 정도 급강하하다 엔진을 겨우 재점화시켰지만 임무 수행이 불가능하다 판단해 일러스트리어스로 돌아가던 중 무선침묵으로 아군 인식 표시등을 제대로 켜지 못해 적기로 착각하고 아군 오사를 가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아군 인식 표시등을 뒤늦게나마 켜서 사상자는 없었지만 2차 공격대는 8대로 줄어들었다.
23시 10분 2차 공격대가 타란토에서 110km 거리, 2.4km 상공에서 비행하던 중 이탈리아군이 1차 공격대에 난사하던 대공포화를 목표삼아 비행, 23시 50분 도착해 공습을 시작했다.
0시 10분 뇌격조 5대가 항내로 진입해 선두의 3대가 리토리오를 노리고 강하하던 중 배일리(Bayley)와 슬로터(Slaughter)의 포스피쉬가 오른쪽으로 기울어 미끄러지다가 대공포에 피격당해 공중폭발하면서 둘 다 사망했다. 나머지 두 대는 리토리오 210m 지점에서 어뢰를 투하해 한 발은 리토리오에 명중했으나 한 발은 불발되어 나중에 항만 진흙바닥에서 발견되었다. 나머지 한 대는 두일리오를 명중시키고 탈출했으며, 마지막 소드피쉬는 바람에 날아온 방공기구에 충돌했으나 추락을 면하고[22] 비토리오 베네토를 노렸으나 빗나가서 콘데 디 카오부르를 명중시켰다.
수리 때문에 어뢰조가 탈출할 때 15분이나 늦게 돌입한 8번 소드피쉬의 클리포드(Clifford) 대위와 항법사 고잉(Going) 대위의 소드피쉬는 항만 가운데 중순양함들을 발견하고 6발의 폭탄을 투하했으나 모두 불발, 하지만 한 발은 중순양함 토렌토에 명중해 연료 유출을 일으켰다.[23]
3.6.3. 이탈리아군의 방어 대책
당시 이탈리아군은 타란토 항을 방어하기 위해 청음소와 방공기구, 어뢰 방어망을 설치했지만 생각보다 허점이 많았다. 물론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름 합리적인 부분도 꽤 존재했다.- 1. 방공기구
총 3열로 배치된 90개의 방공기구와 그 사이에 걸린 강철 케이블은 소드피쉬가 부딪히면 절대 못 살아나가는 강도였으나, 11월 초 폭풍으로 상당수의 방공기구가 파손되었는데 수소 부족과 취약한 산업기반으로 인해 빠른 복구가 불가능했다. 때문에 11월 11일 오전 기준으로 16개가 전함들의 서쪽과 북쪽에, 11개는 동쪽에 배치되어 총 27개밖에 없었다.
- 2. 어뢰 방어망
전함 계류장에는 어뢰를 막기 위한 어뢰 방어망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모든 전함들을 방어하려면 12.6km 길이로 설치해야 할 것을 실제로는 4.2km 밖에 설치하지 않았으며 그나마도 공습 직전에는 폭풍 때문에 2.9km 분량이 해안으로 인양되어 수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자면 당시에도 어뢰 방어망은 설치 노력에 비해 실전에서 큰 효과를 보여준 적이 없었다.[24] 방뢰망은 정박 중 일단 설치하기만 하면 추가비용 없이[25] 어뢰를 거의 완벽하게 막을 수 있지만, 제독이면 모를까 이걸 실제로 치는 수병들에게는 엄청난 중노동이다. 방뢰망은 아연도금한 강철제라서 매우 무거운 데다 이용과 보관 과정에서 엉키고 파손되는 일이 허다하다. 그런데 이걸 수병들이 전함 선창에 보관했다가 정박할 때마다 일일이 꺼내서 보트에 옮겨 싣은 뒤 군함에서 적당한 거리까지 끌고 가서 전개하고 고정하는 것도, 반대로 출항하기 전에 그물을 꺼내서 청소하고 선창에 보관하는 것도 너무 비효율적이었다.
게다가 계류장(Mooring)도 넉넉한 공간이 아니라서 전함들이 정박할 수 있는 공간은 생각보다 좁았고,[26] 때문에 각 군함들이 자함에 각각 방뢰망을 설치하고 철거하기보다는 계류나 정박 지점에 항구 단위로 반영구적 어뢰방어망을 치는 방식의 지역방어를 하고 그 구역으로 군함들이 드나들게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다.
여기다 이탈리아 해군 전함들은 벌지를 토대로 개량한 퓰리에제 시스템[27]
- 3. 탐조등
공습 당시 타란토의 이탈리아 수비대는 탐조등을 '전혀' 쓰지 않았으며 일러스트리어스 함장 데니스 보이드(Denis Boyd)는 "2회에 걸친 공습 중 적군이 서치라이트를 전혀 쓰지 않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라는 보고를 올렸다.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조명탄 투하를 담당했던 램 대위의 추측으로는 뇌격기인 소드피쉬들은 초저공으로 날아올 테니 탐조등을 낮게 비춰야 하고, 그러면 항구 계류장 전함들을 비출 테니 전함 대공포 사수들을 방해할 것이었다는 것이다.
- 4. 대공포
공습 이전 이탈리아 해군의 항구 내 대공포 운용 원칙이 하나 있었는데, '항구 내에 정박한 상태에서 공습을 받더라도 자함을 공격하는 것이 확실치 않다면 발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대공포 하나가 고픈데 뭔 소리인가 싶지만... 의외로 합리적인데, 당시 대공포는 탄막을 형성해 항공기 접근을 차단하는 방식이기에 항구 내에서 대공포를 난사하면 상당수의 포탄이 아군 건물과 함선의 머리 위로 쏟아지게 된다. 때문에 탄막 형성은 육상 대공포대에 맡기고 명확히 눈에 보이거나 탐조등에 걸린 적만 조준사격하는 것이 부차적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 외에도 이탈리아 중순양함과 구축함들이 대공포를 난사하다가 이렇게 발생한 예광탄이 역으로 아군의 위치를 노출하는 꼴임을 깨닫고 대공포 사격을 중단하면서 어둠 속에 숨어버리기도 했다.
3.7. 공습 결과
- 영국 해군
- 이탈리아 해군
- 전함 3척의 피해 :
- 전함 콘테 디 카보우르(Conte di Cavour): 선체에 12×8미터의 구멍이 뚫리고 착저. 인명 피해는 27명 전사, 100여 명 부상. 이후 인양되었으나 수리 중에 이탈리아가 연합국 측으로 편을 바꾸는 바람에 영구적으로 현역으로 복귀하지 못하였다.(영구 손실)
- 전함 카이오 두일리오(Caio Duilio): 11*7미터 크기의 구멍이 뚫리고 좌초. 7달 만에 수리되어 현역 복귀.
- 전함 리토리오(Littorio): 어뢰 3발에 명중되어 침수. 인명 피해는 32명 전사 외에 다수 부상자 발생. 4달 만에 수리되어 현역 복귀.
- 트렌토급 중순양함 트렌토 1척 소파, 에마누엘레 페사노, 리베치오 구축함 2척 소파.
- 항공기 2대 지상에서 파괴
- 유류 탱크 파괴 및 사용불능
- 59명 사망, 600명 이상 부상
4. 이후
항구의 착저한 이탈리아 전함 2척(카이오 두얼리오, 리토리오)는 반년에 걸쳐 수리되었고 1척(콘테 디 카보우로)은 끝내 복귀하지 못했다. 그리고 공습 다음 날 이탈리아 해군은 피해를 입지 않은 함선을 좀 더 안전한 나폴리 항으로 이동시켰다.5. 결과
5.1. 공습 자체는 성공!
하룻밤 사이에 영국이 뇌격기 2기를 잃는 동안 이탈리아 해군은 전함 3척을 잃었고, 일시적으로 영국의 지중해 함대 쪽으로 세력 균형이 이동했다. 덕분에 영국 해군은 이탈리아의 주력함대에 대비해서 단일 부대를 편성하여 뭉쳐다녀야 했던 처지에서 벗어나 각각 항모 1척, 전함 2척으로 구성된 2개 전투단을 구성하여 좀 더 능동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또한 영국은 공습 바로 다음날인 11월 12일, 경순양함 3척과 구축함 2척으로 이루어진 X 함대를 주축으로 호위전력이 마비된 이탈리아 수송대를 기습, 상선 4척을 가라앉히고 어뢰함 1척에 손상을 입히는 전공을 세웠다.(오타란토 해협 해전)
5.2. 반쪽짜리 승리
그러나 영국 해군은 당초 기대했던 목표, "이탈리아 해군의 활동 위축"을 완전히 달성하지는 못했다.[28] 대표적으로 타란토 공습 이후 불과 5일 만에 이탈리아 해군의 노련한 제독 이니고 캄피오니(Campioni) 제독이 전함 2척, 순양함 6척, 구축함 14척의 대함대를 꾸려 출격. 몰타행 영국 호송선단을 방해하는데 성공했다.(스파르티벤토곶 해전) 결과적으로 타란토 공습은 추축국의 아프리카 호송선단 저지 임무에도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오히려 이탈리아는 리비아 행 호송선단을 증가시켰다.[29] 여기다 소드피쉬가 투하한 폭탄 대부분이 불발되어 생각보다 큰 피해는 아니었다.또한 이탈리아는 1년 뒤 이탈리아 해군 잠수정 쉬레(Scire)에 탑승한 제10강습부대가 알렉산드리아 해군 기지에 침투하여 영국 지중해 함대의 전함 퀸 엘리자베스(HMS Queen Elizabeth)와 밸리언트(HMS Valiant)를 대파하여 복수를 성공한다. 이게 바로 인간어뢰 작전으로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습격 사건이다. 이후 두 전함은 각각 9달, 6달씩 전투불능에 빠지는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영국군은 타란토 공습의 실패보다 이 알렉산드리아 습격(Raid on Alexandria)가 더 뼈아프다고 보았다. 비록 타란토에서 이탈리아 전함을 주저앉게 만들었지만 자신들의 전함도 똑같이 무력화되면 전략적 우위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실제 타란토 공습 이후 이탈리아는 패기 넘치게 계속 북아프리카 전선에 대한 보급을 하면서도 몰타섬으로 가는 영국 수송선단을 잡아내기도 하는 여유있는 척을 했지만, 반대로 영국은 항구에서 무력화된 전함 2척이 멀쩡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30]
결국 이탈리아가 항복할 때까지 영국은 지중해 전체의 제해권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 그나마 1941년 마타판곶 해전에서 중순양함 3척과 구축함 2척을 거의 손실없이 잡는 대승을 거두면서 2개월 정도의 평화(?)를 얻긴 하였다. 하지만 그 직후 크레타 섬 전투와 북아프리카 전역, 몰타 항공전을 통해 독일군이 개입하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고, 이탈리아 해군도 자국 공군과 독일군과 협력하여 영국군의 호송 작전을 다시 방해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영국 해군 당국은 타란토 공습이 지중해에서 이탈리아 해군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녹아웃을 먹이는데는 실패했다고 평가한다.[31] 그리고 1년 뒤, 영국 해군은 Z 함대를 싱가포르에 보내기 위해 함대를 구성하면서, 타란토 공습이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탓에 지중해와 수에즈 운하를 이용할 수 없어 처칠의 안을 수용하고, 이로 인하여 영국 해군 역사상 최악의 참패 중 하나인 말레이 해전이 벌어진다. 이에 격분한 영국 수뇌부는 지중해 항로를 다시 열기 위해 몰타를 사수하라고 지시하였고, 제 3차 몰타 항공전의 막이 열리게 된다. 그리고 처칠은 3차 몰타 항공전 내내 북아프리카에서 방어전을 고수하던 오킨렉을 잘라버리고[32] 해롤드 알렉산더와 버나드 몽고메리를 부임시킨다.[33]
기술적인 관점에서 보면, 타란토 공습 이전 항공 어뢰 전문가들은 적어도 수심 23미터가 확보되어야 선박에 대한 어뢰 공격이 가능하다고 평가했었다. 타란토 항구의 수심은 12미터에 불과했으나, 영국 해군은 어뢰가 지나치게 잠수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후 일본 제국 해군은 타란토 공습을 면밀히 연구해서 이듬해 미 해군을 겨냥한 진주만 공습에 백분 활용했다. 특히 어뢰가 과도하게 잠수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나 미국 해군의 예상 출격범위 밖에서 출격을 감행한 것 등등. 다만 진주만 공습은 미군의 삽질도 어느 정도 적용했다. 문서 참조.
6. 매체에서의 모습
- 모바일 게임 벽람항로에서는 '신성한 프렐류드'의 A구역 파트는 타란토 공습을 포함하여 영국과 이탈리아 해군의 전투를 모태로 했다. 실제 역사의 이탈리아 제국을 모티브로 한 사디아 제국의 입장에서 공격을 막아내는데, 공습이라는 점을 반영했는지 지속적으로 비행기가 아군 항구를 노리고 들어온다.
-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는 1940년 7월 5일 벌어졌는데, 이탈리아군이 프랑스의 영국 기습에서 얻은 전훈과 캄피오네 제독의 존재로 원 역사와 달리 서치라이트를 동원해서 소드피쉬를 7대나 격추시켰으며[34] 피해도 훨씬 적었다. 하지만 유류 탱크가 날아간 데다 리토리오의 중파는 해결하지 못했다.
7. 같이 보기
- 진주만 공습: 타란토 공습으로부터 13개월 후 벌어졌다. 그럼에도 타란토 공습보다도 유명해진, 항공모함에 의한 함대 공습의 대표격 사례가 되었다.
- 구레 군항 공습: 일본군 전력이 육군이든, 해군이든 거의 거덜나고 있었던 차에 철저하게 은닉된 함정(준요라든지...)을 제외한 잔존 전력에 대한 확인사살이다.
[1]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2] 리토리오, 비토리오 베네토, 콘데 디 카보우르, 줄리오 체자레, 카이오 두일리오, 안드레아 도리아.[3] 전사자 중 27명은 콘테 디 카보우로에서 나왔고 나머지 32명은 리토리오에서 나왔다.[4] 콘테 디 카보우르는 착저, 카이오 두일리오는 좌초, 리토리오는 선수부분만 착저. 이 중 카이오 두일리오와 리토리오는 수리 후 현역에 복귀하나 손상이 심했던 콘테 디 카보우르는 이탈리아 항복 전까지 수리되지 못하고 영구적으로 현역에서 제외되었다.[5] 카보우르급 2척, 카이오 두일리오급 2척, 리토리오급 2척. 3번함 로마와 4번함 임페로는 아직 한창 건조중이었다.[6] 콘테 디 카보우르급 2척, 카이오 두일리오급 2척, 리토리오급 2척. 리토리오급 3번함 로마는 1940년 시점에서는 미완공이었으므로 제외.[7] 트렌토급 3척, 차라급 4척, 그리고 구식 방호순양함이기는 하지만 체급상 중순양함인 산 조르지오급 1척.[8] Santoni, Alberto (November 1990), "L'attacco inglese a Taranto" The English attack on Taranto, Rivista Italiana di Difesa (in Italian): 88–95[9] 타격력의 주력은 뇌격기가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당시 영국해군이 운용하던 뇌격기는 페어리 소드피시로 복엽기인데다가 순항속도가 200km가 안될 정도로 느린 기체라서 낮에 투입했다가는 죄다 털릴 것이 자명한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야간공습으로 작전을 결정하였으며, 혹시 있을 정찰을 고려하여 이탈리아 공군의 활동범위 밖에서 출격하는 계획을 입안하였다.[10] Stephen, Martin (1988). Grove, Eric, ed. Sea Battles in Close-up: World War 2. Volume 1. Shepperton, Surrey: Ian Allanm. pp. 34–38.[11] 방파제와 섬의 지형, 군함들의 정박 위치와 수량, 대공포와 탐조등 진지의 위치, 방공기구나 어뢰 방어망의 위치 등.[12] 그리스 공군의 요구 조건으로 소드피쉬는 개발할 때부터 급강하 폭격 옵션이 들어가 있었다.[13] 당시 영국 항모들은 폐쇄식 격납고를 사용했기에 내부로 폭탄이 관통하면 치명적이었다. 때문에 유폭을 막기 위해 무장 장착은 비행갑판 위에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고, 한밤중에 등화 관제로 작업하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렸기에 1시간의 여유를 두었다.[14] 소드피쉬가 캐터펄트 없이 이함하려면 30노트의 맞바람이 필요했다.[15] 조명탄 투하를 담당한 찰스 램(Charles Lamb) 대위의 표현.[16] 첫 번째는 8시에 청음소에서 뭔가 엔진 소리를 듣고 울린 공습경보로 10분 만에 종료, 두 번째는 9시쯤에 항구를 염탐하던 선더랜드 비행정의 엔진음을 듣고 울린 경보.[17] 대공포 피격인지 해수면 접촉인지는 명확하지 않다.[18] 23시 15분 전함 안드레아 도리아가 인근에서 두 차례의 큰 폭발을 목격했다고 보고했다.[19] 갑자기 리토리오가 눈 앞에 나타난 탓에 투하 직후 마스트 사이로 직진해서 그대로 빠져나갔다.[20] 이때 폭탄 중 하나에는 이탈리아군을 조롱하기 위해 영국 군화를 달아놨다고 한다.[21] 이날 폭탄조의 폭탄 다수가 불발탄이었다.[22] 강철 케이블이 아닌 본체에 부딪혔기에 피해가 없었다.[23] Sturtivant, Ray (1990). British naval aviation: the Fleet Air Arm 1917–1990. London: Arms & Armour Press. pp. 48–50[24] 대표적으로 러일전쟁 당시 뤼순 공방전에서의 페트로파블로프스크급 전함 세바스토폴. 뤼순항 외곽에 정박한 세바스토폴을 노리고 일본 어뢰정 30여 척이 며칠 동안 100발 가까이 되는 어뢰를 퍼부었는데, 어뢰 여러 발이 방뢰망에 명중하면서 전함 쪽으로 밀려나자 가까운 곳에서 폭발한 어뢰들이 세바스토폴에 피해를 입혀 착저시켰다.[25] 선창에 보관한 그물을 부표나 현측 지지봉에 매달아두기만 하면 되니까.[26] 진주만 공습 당시 미 전함들이 전함 열(Battleship Row)라는 2열 종대로 늘어서 있던 이유도 멍청해서가 아니다. 계류장이 생각보다 비좁은 데다 출항을 위한 예인선 작업, 각종 보급품 선적과 보수를 위해서라도 이렇게 세워두는 것이 편리했다.[27] 이 내장되어 있었기에 방뢰망이 없다고 큰 위험에 노출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계류장은 수심이 너무 얕아서 항공어뢰를 투하해도 바닥에 처박힐 것이 상식이었지만, 영국이 이를 극복할 무기를 들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28]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 비록 전함 3척이 날라갔다고는 해도 전함은 아직 3척이 남았고 무엇보다 중순양함이 6척이나 살아있었기에 이탈리아 해군의 활동은 그다지 위축되지 않았다.[29] Bragadin, Italian Navy in World War II, p. 356.[30] 다만 이탈리아는 바로 위의 본토에서 수리하면 되지만 영국은 일단 지중해에서 벗어나 수리를 해야하니 상황이 같다고 볼 수 없긴 하다.[31] Caravaggio, A.N, Lieutenant Colonel, 'THE ATTACK AT TARANTO: Tactical Success, Operational Failure', Naval War College Review, 1997.[32] 군인으로서는 좋은 판단이었을지 모르나, 지중해 항로를 다시 열어야하는 전시 내각 입장에서는 복장이 터질 일이었다.[33] 그리고 처칠이 깨달은 것은 몽고메리 또한 오킨렉 못지 않은 옹고집이라는 것.[34] 한 대는 서치라이트 빛을 정통으로 맞고 균형을 잃어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