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스트 요새 방어전 Оборона Брестской крепости Kampf um die Brester Festung (1941) Defense of Brest Fortress[1] |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소전쟁의 일부 | |||
▲ 브레스트 전투 당시 동부전선 브레스트 전투를 그린 소련의 기록화 | |||
날짜 | |||
1941년 6월 22일 ~ 29일 | |||
장소 | |||
브레스트 요새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소련| ]]||
지휘관 | [[틀:깃발|표트르 가브릴로프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이반 주바초프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예핌 포민† | ]][[틀:깃발| ]][[틀:깃발| ]] [[틀:깃발|프리츠 슐리퍼 | ]][[틀:깃발| ]][[틀:깃발| ]]|
결과 | |||
소련의 패배, 나치 독일의 요새 점령 | |||
영향 | |||
독소전쟁 당시 최초의 전투 | |||
전력 | 9천명 - 내무인민위원회 - 6소총사단 - 42차량화소총사단 - 17국경방어군 - 기타 소규모 부대 | 1만 7천 명 - 45보병사단 - 31사단 - 34사단 - 2기갑군 | |
피해규모 | - 전사 2천명 - 포로 6,800명 | - 전사 429명 - 부상 668명 |
1. 개요
1941년 6월 22일부터 29일까지 소련 (현 벨라루스)의 브레스트 요새에서 벌어진 소련군과 독일 국방군간의 전투이다.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과 소련군이 맞붙은 첫 전투이다.
2. 브레스트 요새
현재 브레스트 요새의 모습. 외벽의 총알과 포탄 자국들이 당시 전투의 격렬함을 보여준다.
브레스트 요새는 19세기에 지어진 요새로서, 3개의 성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면적은 4㎢, 전체 길이는 6.4㎞에 달하는 요새이다. 이 요새가 위치한 브레스트주는 원래 폴란드의 영토였다. 그러나 1939년 독일이 서쪽에서 폴란드를 침공하고, 뒤이어 소련도 동쪽에서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이후 독소 불가침조약에 따라 브레스트주는 소련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 전개 당시 브레스트는 독소 국경에 맞닿아 있는 최전방 도시였으며, 독일 중부집단군의 진격 경로에 놓여 있었다. 중부집단군은 브레스트 요새를 비롯한 브레스트주 일대를 점령하고, 요새 근방의 부크 강[2]을 도하하여 바르샤바-모스크바 간의 철도와 고속도로를 통제할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1만 7천여 명의 독일군 45 보병사단[3]과 31사단, 34사단, 그리고 하인츠 구데리안 지휘 하의 2 기갑군 등 2만 명이 독소 국경에 집결했다.
반면 당시 브레스트 요새에는 NKVD 병력과 6 소총사단, 42 차량화 소총사단, 국경군 소속 17 국경방어군 외의 소규모 부대를 포함해 전부 9천여 명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들은 병력 면에서도 열세였을 뿐 아니라 독일군을 맞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여담으로 구데리안은 이로써 브레스트 요새를 두 번째 공격하게 되었다. 1939년에 폴란드군으로부터 이 요새를 빼앗아 소련군에게 넘겨준 주역이 바로 구데리안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3. 전투 경과
3.1. 독일군의 침공
1941년 6월 22일 새벽 4시, 나치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며 소련을 침공한다. 국경 최전방에 있던 브레스트 시와 요새는 독일군의 강렬한 포병의 포격을 제대로 얻어맞았다.[4] 소련군은 독일군의 엄청난 포격에 국경 방어선이 무너지자 대신 요새를 방어하기로 결정하고 요새로 후퇴한다. 하지만 요새 또한 포격으로 두들겨맞았기 때문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건물 곳곳이 파괴되었다. 사전 포격 후 첫 독일군 선발대가 부크 강을 도하하여 브레스트 요새에 도착한다. 독일군은 요새를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고, 소련군은 포위된 채 내부에 고립되어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3.2. 소련군의 방어
브레스트 요새 내부 지도. 위쪽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코브린 성채, 테레스폴 성채, 볼린 성채.
뜻밖의 기습을 당한 브레스트 요새 내부의 소련군은 매우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독일군의 포격으로 방어전을 시작하기도 전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포격으로 인해 요새 곳곳이 무너져 병력들이 분산된 채 고립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 때문에 소련군은 통합된 지도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각자 고립된 구역에서 전투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무기고가 붕괴되어 무기와 탄약이 매몰되는 등 방어전을 수행할 물자 또한 부족했다.
이러한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요새의 방어적 이점을 이용하여 거세게 저항했다. 6월 22일 첫날에만 281명의 독일군 전사자가 발생했다. 치열한 전투가 이틀 동안 벌어졌고, 24일까지 독일군은 368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소련군은 요새화된 건물 안에서 소총과 기관총 및 기타 화기로 구성된 방어선을 구축했고, 이반 주바초프 대위[5] 와 정치장교 예핌 포민[6]의 지휘 아래 조직적인 저항을 지속했다. 이는 요새로 진입을 시도하는 독일군에게 큰 출혈을 강요했다. 시민들[7] 또한 군을 도왔다. 부녀자들은 부상자를 간호했고, 기관총 탄약을 장전했으며 심지어 몇몇은 직접 총을 들고 전투에 임했다. 아이들은 무너진 무기고로부터 탄약을 가져오거나 식량을 조달했으며, 독일군의 움직임을 살피는 등 어른들을 도왔다.
이러한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독일군은 네벨베르퍼와 화염방사기, 심지어 루프트바페의 공중 폭격까지 동원하며 공격했다. 소련군은 백병전까지 감행하며 강렬하게 저항했으나, 26일 저녁에는 일부 구역을 제외한 요새의 대부분이 독일군의 손에 넘어갔다.
3.3. 요새 함락
폐허가 된 요새 내부로 진입하는 독일군.
6월 29일 독일군은 폭격기로 요새의 동쪽 구역을 폭격하면서 소련군에게 항복할 것을 강요했다. 독일군의 맹렬한 폭격에 360여 명의 방어군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구역의 소련군 및 민간인들도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다.
(오른쪽)
Прощай,
Родина.
조국이여,
잘 있거라.
Прощай,
Родина.
조국이여,
잘 있거라.
(브레스트 요새에 새겨졌던 한 소련군의 낙서. 이후 1944년 소련군이 다시 브레스트 요새를 탈환하면서 발견되었고, 선전을 통해 유명해졌다.)[8]
하지만 일부 소련군은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저항하는 쪽을 택했다. 이들은 독일군에 의해 모두 전멸한다.
결과적으로 소련군은 2천여 명이 전사하고 5~6천여 명이 포로로 잡히게 된다. 반면 독일군은 429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9]
4. 이후
폐허가 된 브레스트 요새.
독일군의 원래 목표였던 바르샤바-모스크바 간 철도와 고속도로의 점령은 전투 첫날 달성했기 때문에, 독일군은 전투 종료 이후 요새를 떠난다.
브레스트 요새를 방문한 아돌프 히틀러와 베니토 무솔리니, 1941년 8월 26일.
브레스트 영웅 요새 기념비.
이후 1944년 소련군은 다시 브레스트 요새를 수복하게 된다. 소련은 각종 매체를 동원해 브레스트 요새 전투를 파시즘에 저항한 소련 인민들의 위대한 투쟁으로 선전했다. 1956년 브레스트 요새 박물관이 개관하였고, 1965년 소련은 독일 항복 20주년을 기념하여 브레스트 요새에 '영웅 요새' 칭호를 하사한다. 그러나 독일군과 싸우다가 포로로 잡힌 소련 포로들은 전쟁 중에는 독일의 수용소에서 죽어갔고, 전쟁 후에는 독일군에게 항복했다는 이유로 시베리아 굴라크로 유배당했으나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에 의해 복권되어 영웅 칭호를 받았다.[10]
5. 매체
러시아-벨라루스 합작 영화인 '브레스트 요새' 가 2010년에 개봉했다.
당시 제333연대 군악단의 위탁 학생이었던 '알렉산드르 아키모프'[11]라는 소년이 훗날 할아버지가 되어 회고하는 형식으로 영화가 전개된다.
소련군의 우라돌격의 위엄을 잘 보여주는 영화이다.
[1] 그냥 Battle of Brest라고 하면 이 전투 말고 1944년 서부전선의 브레스트 전투를 가리킨다.[2] 폴란드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를 지나는 강이다.[3] 오스트리아인으로 구성된 부대이다.[4] 칼 자주박격포까지 동원되었으니 말 다했다. 사실 이 전투는 칼 자주박격포가 투입된 첫 전투이기도 하다.[5] 이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사망한다.[6] 이후 독일군에 정치장교 색출에 의해 총살된다. 영화 '브레스트 요새' 에서 이 장면이 등장하는데, 전투 종료 후 독일군 소령이 소련군 포로 중 정치장교나 공산주의자, 유대인을 따로 분류하자, 포민이 직접 '내가 바로 정치장교요. 공산주의자에다 유대인이지'라고 하며 자진 총살당한다.[7] 당시 브레스트 요새 안에는 군 병력 이외에 이들의 가족을 포함한 상당한 수의 민간인이 거주 중이었다.[8] 다만 낙서의 날짜가 1941년 7월 20일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에 신뢰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렇지만 당시 독일 병사들의 기록을 보면 소련군이 이미 점령한 지역에서 나타나 등 뒤에서 총을 쏴댄다고 비난하는 내용이 흔하다. 이 기록을 남긴 병사 역시 점령 후에도 요새 깊숙한 곳에 숨어있다가 마지막 자살 기습을 하기 전에 썼을 가능성이 크다. 혹은 단순히 날짜를 착각했을 수도 있다. 그 때는 시계를 가진 병사도 드물었고, 시계에 날짜 계산 기능도 없었다.[9] 이는 소련군이 열세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선전했음을 보여주는데, 6월 30일까지 동부전선에서 전사한 독일군 숫자가 8,880여 명임을 감안할 때, 소련군은 브레스트 요새에서만 독일군 전체 전사자의 5%를 내게 했다는 것이다.[10] 인간에 대한 의심이 강했던 스탈린은 독일에 포로로 잡힌 소련인들을 적과 내통한 스파이로 처벌하였다. 물론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운동 이후 나치 부역자 노릇을 하지 않은 이상 모두 무죄로 풀려났으며 일부는 공로가 인정되어 영웅 칭호를 받는다.[11] 그의 형 또한 군인이었는데, 대전차포 사수로 3호 전차 2대를 격파했으나 위치가 노출되었음에도 피신하지 않고 대전차포 사격을 이어가다 전차의 반격으로 전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