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바인푸르트 공습 | |||
날짜 | |||
1943년 10월 14일 | |||
장소 | |||
나치 독일 슈바인푸르트 | |||
공격측 | 방어측 | ||
교전국 | 미국 | 나치 독일 | |
지휘관 | 로버트 윌리암스 | 아돌프 갈란트 | |
전력 | 폭격기 291기 | 대공방어부대 1개 사단 제1공군사단 제3공군사단 | |
피해 규모 | B-17 60기 격추 B-17 127기 손상 승무원 600명 사망 | 전투기 31기 손실 슈바인푸르트 볼베어링 공장 60% 마비 | |
결과 | |||
추축국의 승리, 미공군의 공습 실패 | |||
기타 | |||
미 제 8 공군의 피해가 극심하여 후속 조치 불가로 독일 공장지대 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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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3년 10월 14일,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미군 8공군 소속 B-17 편대가 독일 슈바인푸르트의 볼베어링 공장과 BOSCH 등 루프트바페 산업시설에 폭격한 사건을 말한다.2. 작전 수립
1943년, 독일 슈바인푸르트와 레겐스부르크에서 매달 200대의 전투기와 부속품목들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미 8공군은 독일군의 산업시설을 파괴시키고자 폭격 계획을 수립한다. 특히 슈바인푸르트의 BOSCH 소속 볼베어링 공장은 독일의 전투기 뿐만 아니라 각종 전차에 쓰이는 중요부속이었으므로 이 산업시설을 파괴시킨다면 독일 무기생산에 차질이 생길 것임은 자명하였으므로 커티스 르메이를 위시한 8공군은 슈바인푸르트를 공습하기 위해 8월에 1차로 슈바인푸르트 공습을 실시한다. 당시에는 폭격기무적론이 미공군을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B-17의 강력한 방어무장만으로 독일기의 요격을 막아낼 수 있으리라 보았다.물론 P-47 썬더볼트와 같은 호위기도 붙이기로 했는데 당시의 미군 전투기들은 항속거리가 영불해협 근처로 제한되었고 보조탱크로는 독일의 아헨 상공까지는 연장되었으나 이 탱크가 고고도에서 기압 차로 인해 새는 등 문제가 많은 결함품이었다. 때문의 독일의 중요 산업 시설까지는 호위기가 함께 갈 수 없었으므로 독일 상공에 들어서는 즉시 호위기들은 영국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독일 루프트바페는 주로 호위기들이 폭격기 편대를 떠난 후부터 요격을 시작했다.
3. 슈바인푸르트 1차 공습
8월 17일 새벽, B-17 170대로 이루어진 르메이의 제4폭격비행단은 레겐스부르크를, B-17 230대로 이루어진 윌리암스의 제1폭격비행단은 슈바인푸르트를 공습하기 위해 영국에서 출격했다. 적 전투기들로부터의 요격피해를 줄이기 위해 두 비행단이 중간경로까지 함께 비행하고, 레겐스부르크를 폭격한 그룹이 적 전투기들을 유인하며 북아프리카로 날아가 착륙하는 사이, 슈바인푸르트를 폭격한 그룹은 영국으로 돌아간다는, 나름 상세하게 설계된 작전이다. 하지만 시작부터 작전에 큰 차질이 발생했는데, 출발지인 영국에 짙은 안개가 끼어 이륙이 계속 지연된 것. 그런데 참다못한 르메이가 자신이 속한 제4폭격비행단을 먼저 출발시켜버리면서, 제1폭격비행단과 약 3시간 정도의 지연이 발생해버렸다. 레겐스부르크 (독일의 남동부에 위치) | 슈바인푸르트 (독일 중앙부에 위치) |
따라서 제1폭격비행단이 독일 국경으로 들어서자마자 일이 심각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제4폭격비행단이 이미 같은 경로를 3시간이나 전에 지나갔기 때문에, 당시 요격을 담당한 독일 전투기들은 재급유와 재무장을 완전히 하고 잔뜩 독이 오른 채 독일 상공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독일 공군의 Fw190 200대와 Bf 109 100대는 21대의 B-17 폭격기를 격추시켰다. 그래도 제1폭격비행단은 계속 비행하여 420톤 이상의 폭탄을 슈바인푸르트에 투하했고, 볼 베어링 공장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B-17들은 영국으로의 귀환길에서 기다리고 있는 독일 전투기들의 요격을 또다시 뚫어야 했다. 돌아가는 경로에는 선행그룹마저 없었기에 이들은 독일 공군의 막강한 화력을 홀로 받아내야 했고, 독일국경 근처까지 살아남은 폭격기들은 P-47들과 만나 그제서야 호위를 받으며 영불해협을 건너 귀환할 수 있었지만, 결국 복귀 과정에서 5대의 폭격기를 더 잃었다.
한편 레겐스부르크를 폭격하고 북아프리카로 건너간 제1폭격비행단 역시 총 24대의 B-17을 잃었으며, 영불해협에서 두 폭격비행단을 호위한 전투기 부대에서는 P-47 3대, 스핏파이어 3대의 손실을 보았다.
결과적으로, 슈바인푸르트-레겐스부르크 공습은 제8공군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음이 밝혀졌다. 60대의 B-17가 격추되었고, 승무원 600명이 희생되었다. 영국과 북아프리카에 도착한 폭격기들 중에서도 122대가 손상을 입었고 그 중 27대는 폐기시켜야 했다. 많은 미국인들은 이 공습이 엄청난 희생만큼의 전과를 올린 것인지 의심했다. 이 공습은“폭격기는 무엇이든 뚫고 나갈 수 있다"는 폭격만능주의자들의 주장을 무색케 만들었다. 그러나 미군 지휘관들은 이 교훈을 뒤늦게 받아들였다.
반면, 300대의 전투기 전력 중 36대를 잃고 12대가 파손당한 독일 공군의 아돌프 갈란드에게는, 비록 자신들이 입은 피해도 회복하기 힘들 정도이기는 했지만, 미국의 중폭격기 공격에 대해 독일의 강력한 전투기 방어가 큰 피해를 줄 수 있음을 확실히 증명한 것이었다.
4. 2차 공습
사진 정찰에 의해서 레겐스부르크의 메서슈미트 공장은 파괴가 확인되었으나, 슈바인푸르트의 사진은 피해가 놀라운 속도로 복구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정보 보고도 제3제국 전역에서 볼 베어링이 급박하게 요구되고 있음을 확인해 주어, 1943년 8월 17일 공습으로 독일의 볼 베어링 산업이 큰 타격을 받았음이 입증되었다. 수리에 의해 다시 가동이 되기 전에, 후속 공습을 실시하여 이 공장들을 완전히 괴멸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번에는 전력을 나누게 되는 유인 공습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모든 전력이 슈바인푸르트로 집중되었다. 이번에도, 예정된 장거리용 호위전투기 도착을 기다릴 시간이 없었으며, B-17들은 다시 한번 호위 없이 출격을 하게 되었다.원래 계획은 상승률이 떨어지는 폭격기들이 순항고도에 도달하면 영국의 스핏파이어가 그리 멀지않은 해협까지 안전하게 호위,폭격기에게 목표지점의 방향을 선출하여 알려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되어있었으나 하필 오전대의 화창한 날씨에 폭격기들이 이륙한뒤 갑자기 날씨가 흐려지면서 스핏파이어들은 예정대로 이륙하는게 아닌 날씨가 풀릴때까지 대기상태로 놓였다가 결국 기상악화로 스핏파이어의 엄호 임무는 취소되어버렸다.
1943년 10월 14일 아침에, 291대의 B-17과 200대 가까운 호위 전투기들로 구성된 대편대가 영국의 기지를 이륙했다. 첫 번째 편대는 14시 39분 부터 14시 45분 동안, 즉각 후속 공격대였단 두 번째 그룹은 14시 51분 부터 14시57분동안 공격하기로 했다. 30마일 간격의 두 집단으로 나누어진 B-17들이 네덜란드 국경을 넘기도 전에, 호위 전투기들은 BF-109 20대의 공격을 받았다. P-47들이 이를 격퇴했으나, 독일 전투기들은 B-17 승무원들도 볼 수 있을 정도였고 이들은 안전 거리를 유지하면서 P-47들이 돌아가야만 하는 아헨 상공을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썬더볼트들이 영국으로 방향을 돌리자마자, 독일 비행기들의 공격이 하늘을 덮었다. Bf109, Fw190, Bf110, Me 210, Ju88에다가 Ju87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와 He 111 중형 폭격기까지 포함된 공격대가, 큰 효과를 보았던 1차 8월 17일의 요격에서 사용했던 것과 같은 무기로 공중전을 벌여왔다. Bf109와 Fw190은 20밀리 기관포와 기관총 사격으로 폭격기들의 대형을 흐트러 놓았다. 슈투카들은 폭격기 편대 위로 상승하여, 지연신관 폭탄들을 B-17 위로 투하했다. 쌍발의 BF-110과 ME-210, 그리고 HE-111은 대공포탄보다 4배가 강한 폭발력을 가진 로케트탄들을 발사했다. 부서지고, 불타고, 동강난 B-17들이 추락해 갔고, 편대 내의 비는 공간들은 다른 B-17들이 빨리 채워서 방어 대형을 가까스로 유지해나갔다.
전투는 1차 슈바인푸르트 공격보다 더 격렬했다. 어느 폭격기의 승무원은 1분 정도의 시간에 독일 전투기가 40번을 공격했다고 기록했다. 미국 지휘관의 한 사람인 버드 피슬리 대령은 B-17이 추락한 위치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11개 목격했다. 두 비행대가 슈바인푸르트 교외에 가까워졌을 때는, 28대의 폭격기가 격추되고 34대의 폭격기가 손상이나 기계 고장으로 귀환하고 말았다. 슈바인푸르트에 도달한 폭격기들은, 1차 공습 후에 설치된 새로운 대공포대들로부터 무서운 포화를 받아야 했다. 독일 전투기들은 아군의 대공포화에 맞을 위험도 무릅쓰고, 용감하게 공격을 계속하였다. 남은 미국기들로서는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밀집대형은 유지되었고, 12분 정도의 시간에 500톤의 폭탄을 공장들에 아주 정확하게 투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귀환 때는 더 심했다. 1차 공습 때와 같이, B-17의 승무원들은 슈바인푸르트로부터의 귀환길에서 재급유, 재무장한 독일측 항공기들을 계속 만났다. 32대가 귀환 중에 다시 격추되었다. 지옥 같은 공중전이 3시간 이상 벌어진 후에, 살아남은 폭격기들은 많은 수가 큰 손상을 입고 이미 전사했거나 큰 부상을 입어 죽어가고 있는 승무원들을 가득 채운 채로 영불 해협에 도착했다.
5. 공습 이후
또 다시, 미군으로서는 최악의 이 임무에서 60대의 폭격기와 그 승무원들이 독일 상공에서 희생되었다. 미군은 186대의 독일 전투기를 격추시켰다고 주장했으나, 독일 공군의 실제 손실은 31대였고, 12대가 파손되었다. 처음 이커가 바랐던 대로, 공습 그 자체는 슈바인푸르트 정찰 사진에 의해서 1차 공습보다 훨씬 더 큰 피해를 주었음이 확인되었다. 독일 측에서는, 알베르트 슈페어의 평가에 의하면 공장들 생산 능력의 67%가 파괴되었다. 10월 14일에 이어서 연합군이 2주마다 베어링 공장들을 공습한다면, 독일은 4개월만에 국방력을 상실하게 될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러나 8공군의 피해가 너무 심하여, 후속 공습은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불가능했다.독일은 폭격의 피해를 고스란히 회복했고 모자라는 베어링 생산량은 스웨덴, 스위스, 이탈리아에 주문해서 이전과 큰 차이가 없는 생산량을 유지한다.
미군 승무원들이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이라고 부른 이 공습 후에, 독일이 심한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독일 상공의 제공권은 아직 독일 공군이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해리스의 폭격기대대는 미군이 바랬던 후속 공습은 커녕 전혀 다른 목표에 폭격을 했고 그 사이 독일은 빠르게 복구했기 때문에 미공군은 작전 중 도움이 되지 않았던 영국 공군에 크게 실망하게 되었다. 때문에 8공군은 전쟁 말기 있었던 드레스덴 공습과 함부르크 폭격과 같은 민간인지대 폭격은 비인도적이라며 해리스의 협조 요청에 딱지를 놓았고 이와 같은 처신으로 큰 피해를 입고도 적국 시민보다는 공장지대와 같은 전략목표에만 집중해서 큰 효과를 냈다는 좋은 이미지로 승전식에도 참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