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로실로프그라드 작전 «스카쵸크»[1] 러시아어: Ворошиловградская операция «Скачок» 독일어: Woroschilowgrader Operation 영어: Operation Gallop | ||
제2차 세계 대전중 동부전선의 일부 | ||
| ||
▲ 남쪽에서 보로실로프그라드와 스탈리노 방면으로 공세를 펼치는 남서 전선군 | ||
날짜 | ||
1943년 1월 29일 ~ 2월 18일 | ||
장소 | ||
소련 우크라이나 SSR 하리코프주와 보로실로프그라드주 일대 | ||
교전국 |
| |
지휘관 |
(남서 전선군 사령관)
(제1근위군 사령관)
(제3근위군 사령관)
(포포프 기동집단 사령관)
(제17항공군 사령관) |
(돈 집단군 사령관)
(제4항공함대 사령관)
(제1기갑군 사령관)
(제4기갑군 사령관)
(제17군단 사령관) |
결과 | ||
소련의 전술적 승리 전략적 목표 달성 실패 이지움과 보로실로프그라드 탈환 | ||
영향 | ||
남부 집단군과 A 집단군 분리 돈바스 북부 탈환 남부 집단군의 반격 시작 | ||
전력 | 병력 약 32만 명 | |
피해 규모 |
1. 개요
보로실로프그라드 작전(«Скачок»)은 1943년 1월 29일부터 2월 18일까지 진행된 소련 붉은 군대의 공세 작전으로, 이 작전의 주된 목표는 현재의 우크라이나 루한스크 지역에 해당하는 당시 보로실로프그라드를 포함한 북부 돈바스 지역을 독일군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었으며, 더 나아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이끄는 독일 돈 집단군을 포위 및 섬멸하는 전략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다.2. 전투 서열
2.1. 소련군[2]
- 남서 전선군 ( 사령관 : 니콜라이 바투틴 상장[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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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독일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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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개
작전은 니콜라이 바투틴이 지휘하는 남서전선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약 32만 명의 병력이 배치되었다. 작전의 핵심은 독일군이 철수하지 못하도록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기동 부대는 슬라뱐스크-마리우폴 방향으로 돌파해 7일 이내에 마리우폴 부근에 도달, 적의 퇴각로를 봉쇄해야 했다. 제6군은 북쪽 측면을 방어하며 쿠피얀스크, 발라클레야 방향으로 진격했고, 제1근위군은 기동 부대의 성과를 활용하여 서쪽에서 돈바스 지역을 포위하는 작전을 맡았다.오스트로고즈스크-로소샨스카야 작전(상부 돈 강에서의 오스트로고즈스크-로소샨스카야 독일군 집단 섬멸 작전; 제2부)이 종료된 후, 돈바스 지역에서의 공세를 전개하기에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었다. 독일군 전선에는 쿠르스크-돈바스 방향으로 400킬로미터에 달하는 간격이 생겼다. 소련 지휘부는 돈바스 지역에 있는 독일군을 포위하려던 이전 계획으로 회귀했다. 보로네시 전선군이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에서 별 작전을 시행하는 동안, 남서전선군은 돈바스를 해방하고 마리우폴로 돌파하여, 독일군 돈 집단군을 포위한 뒤 남부전선군과 함께 이를 섬멸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소련의 주요 제철 및 탄광 지역을 해방하기 위한 이 작전은 ‘도약(Скачок)’ 작전이라 불렸다.
3.1. 전투 시작
1943년 1월 29일, 하리토노프가 이끄는 6군은 휴식 없이 20킬로미터 구간에서 란츠 그룹(298·320보병사단, 27전차사단, 193·393돌격대대)의 우익을 향해 일제히 돌격했다. 독일군이 격렬히 반격했지만, 다음 날 제1근위군이 크라스니 림안으로 진격을 개시하자 카바네예에서 리시찬스크까지 방어선을 구축한 19전차사단마저 버티지 못하고 후퇴했다. 쿠즈네초프는 즉시 포포프 기동집단의 전차군단을 전면 투입했고, 독일군은 로스토프 인근에서 급파된 3·7전차사단으로 슬라뱐스크 방어를 강화했으나 1월 31일 6군이 스바토보를 함락시키며 320사단을 서쪽으로 밀어냈다.2월 1일 새벽, 소련군은 얼음을 깨고 급조된 교량을 통해 시베르스키도네츠강을 건넜다. 제35근위보병사단이 철로를 차단한 뒤 바르벤코보로 돌진하는 등 진격이 빨라지자, 2일에는 보로네시 전선군의 동시 진격과 맞물려 쿠피얀스크를 탈환하고 320사단 일부를 완전 포위했다. 이어 제1근위군은 슬라뱐스크·리시찬스크 일대 교통망을 전차로 차단하고, 제10전차군단이 바흐무트 강을 따라 재진격했으나 제3전차사단의 저지로 솔 역까지만 전진했다.
3일에는 6군이 쿠피얀스크 해방을 완수한 뒤 이즐륨·발라클레야를 확보했고, 포포프 집단은 크라마토르스크를 해방했다. 포위된 독일 320사단은 연료가 바닥나 차량과 중장비를 버리고, 농가에서 징발한 말, 소, 황소로 철수를 시도했다. 결국 일부 병력이 하르키우 일대에서 포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했다.
3.2. 보로실로프그라드 공방전
레류셴코 사령관이 지휘하는 제3근위군(14·18근위보병사단, 제1근위기계화군단, 제2·23·제2근위전차군단, 제8근위기병군단, 13개 포병·박격포연대 및 혼성항공·전투기항공사단 지원)은 2월 4일 보로실로프그라드에 도달했다. 이 도시는 세 개의 방어선과 수많은 화력점, 지뢰밭, 공병 장애물로 요새화되어 있었고, 6, 7전차사단, 335보병사단, SS 라이히 사단이 장기간의 시가전과 고립 방어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초 계획된 측면 우회 대신 레류셴코는 곧바로 정면 돌파를 감행했으나 접근로에서 열흘간 교착 상태에 빠졌고, 깊은 돌파는 2월 10일에야 병력 충원율 45%, 군마 35%, 포병·기관총 30~40% 수준이던 보리스프 기병군단 한 개만으로 시작됐다.한편 만슈타인은 시베르스키도네츠강 전선 붕괴 위기에 직면하자 예비 전력 없이 전선을 단축하고 제4전차군을 전환 배치하며 홀리트트 그룹을 미우스 강으로 후퇴시켜 동부 도네츠와 동부 도네바스 일부를 포기할 것을 건의했으나, 히틀러는 “러시아군이 거리를 늘릴수록 동력이 약화된다”며 거부했다. 그러나 북측 측면이 소련군의 압박에 흔들리자, 2월 6일 만슈타인은 볼프스찬체로 전격 초청된 히틀러를 설득해 마지못해 고트 휘하 제4전차군 전환 배치를 승인받았다. 7일 밤부터 8일 새벽까지 고트 사단은 바타이스크 도하 거점을 이탈했고, 홀리트트 그룹은 카멘스크–노보체르카스크 중간 진지로 후퇴했으며, 소련군은 도나우 강을 건너 로스토프 해방을 개시했다. 남측 전선 후퇴로 위험 지점에 예비 전력이 배치되며 반격 준비가 가능해졌으나, 하르키우 일대 전선은 이미 붕괴 상태였고 B군단은 전투력을 상실해 제1전차군 단독으로는 복구가 불가능했으며, 제4전차군 전환 배치에도 약 2주가 소요될 전망이었다.
3.3. 보로실로프그라드 해방
남서전선군 소속 레류셴코 사단은 보로실로프그라드 정면 돌파에 실패하자, 군사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적 측면을 타격해 요새를 포위·압박하는 원래 계획으로 전환했다. 이 무렵 제8기병군단이 선행해 2월 13일 데발체보에 단독 진입했으나, 주력 부대의 지원이 닿지 않아 시가지 전투에 고립되고 말았다. 독일군 홀리트트 사단은 소련군의 압박으로 미우스 강까지 후퇴했으나, 맥켄젠의 제1전차군(3·40전차사단, 제17군단)과 기갑정찰사단 ‘비킹’이 북측 전선의 틈새를 막아 소련군의 전면 돌파를 저지했다. 한편 하리토노프 6군은 140~180km를 전진해 크라스노흐라드를 점령했고, 제1근위군은 슬라뱐스크를 우회해 2월 11일 로조바야 역을 탈환, 시넬니코보를 겨냥했다. 포포프 기동그룹은 크라스노아르메이스코예의 교통 요충을 장악했다.2월 12일, 만슈타인의 지휘 아래 도네바스 그룹군은 남부군집단으로 재편되어 제4·제1전차군과 란츠·홀리트트 그룹 등 30개 사단(12개 전차·기갑사단 포함)을 배속받았다. 전멸 직전이던 B 집단군은 해체되어 잔여 전력이 중앙·남부 군집단으로 분산되고, 제2군은 중앙으로 이관되었다. 2월 14일 소련군은 보로실로프그라드를 완전 해방했으나, 레류셴코 사단이 투입한 두 전차군단은 전차가 고갈되어 제2전차군단이 즉시 예비로 후퇴해 재정비에 들어갔고, 제23전차군단과 제1근위기계화군단이 지원하는 두 보병사단만으로 크라스노돈을 해방하는 데 그쳤다.
데발체보에서는 독일군이 보리스프 기병군단을 포위해 공수 보급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9일간 고립된 기병군단은 2월 23일 전멸·항복했다. 이후 남서전선군의 공세는 급격히 정체되어, 2월 17일까지 하리토노프 6군과 제1근위군은 파블로흐라드를 점령하고 드니프로페트로프스크·자포리자 접근로에 도달했으나, 보급과 예비 전력 부족으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남서전선군은 120~250km를 전진하며 독일군에 큰 타격을 입혔으나, 도네바스 전역 전체 해방과 돈 집단군의 포위섬멸에는 실패했고, 만슈타인은 독일군을 또 한 차례 위기에서 구해냈다.
4. 결과
“이 작전은 도약이 아니라, 미끄러진 발끝이었다.”
세르게이 스트레클로프
독일군은 예상보다 빠르게 전열을 재정비하고 반격에 나섰다. 특히 히틀러는 서부 전선에서 엘리트 부대인 제2SS기갑사단과 5 SS기갑사단을 급파해 방어를 강화했고, 루한스크 전방에서는 격렬한 방어전이 벌어졌다. 소련군은 고립된 채 전투를 이어가며 큰 손실을 입었다.세르게이 스트레클로프
항공 지원도 제한적이었다. 제17공군은 작전 초기에 약 270기의 항공기를 보유했지만, 전선이 깊숙이 진격하면서 지상군과의 연결이 끊겨 효율적인 공중 지원이 어려웠다. 이후 330여 대로 증강되었지만, 공중우위는 확보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도약 작전은 전략적 승리라기보다는 전술적 성공으로 평가된다. 보로실로프그라드(루한스크)를 일시적으로 해방하고, 북부 돈바스 지역 일부를 회복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독일군의 포위 및 섬멸이라는 궁극적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1] 도약[2] 2월 1일 기준[3] 2월 12일에 대장으로 진급[4] 2월 3일 기준[5] 2월 12일에 남부 집단군으로 개칭[6] 5주 정도 프레터-피코 분견군 사령부를 구성하다가 2월 3일에 다시 30군단 사령부가 되었다.[7] 야전군 예비[8] 제4군단[9] 42년 8월 26일에 1항공군단으로부터 창설됐고 2월 17일에 다시 1항공군단으로 개칭[10] 돈강 중류의 B 집단군 지원[11] 42년 11월 25일에 1대공포군단으로부터 창설됐고 2월 6일에 다시 1대공포군단으로 개칭[12] 코카서스의 A 집단군 지원[13] 돈강 하류의 돈 집단군 지원[14] 스탈린그라드의 6군 지원[15] 2월 6일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