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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5 13:54:22

한니발 작전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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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undesarchiv_Bild_146-1972-092-05,_Flucht_aus_Ostpreußen.jpg
발트해를 건너는 소형 보트들.
1. 개요2. 배경3. 작전의 진행
3.1. 몰려오는 피난민들3.2.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격침3.3. 처절한 탈출3.4. 고야호 격침
4. 작전의 끝5. 평가6. 기타7. 관련문서

1. 개요

한니발 작전(Operation Hannibal/Unternehmen Hannibal)은 1945년 나치 독일동프로이센, 서프로이센, 쿠를란트 일대의 민간인들과 군인들을 진격해오는 소련군을 피해 해상으로 철수시킨,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상 탈출이다.[1]

이 작전으로 약 80~90만 명의 민간인과 35만 명의 군인들이 해상으로 탈출했으며, 탈출작전의 모범으로 평가되는 됭케르크 철수작전[2]보다 훨씬 큰 규모의 탈출 작전이었지만 나치 독일이 소련의 보복을 당하기 싫어 도망친 작전이라 됭케르크 같은 감동도 없는 만큼 작전의 인지도 자체는 매우 낮다.

2. 배경

1944년 8월 초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 중부집단군을 격파한 소련군은 독일 본토 최동단 동프로이센 코앞까지 도달하였고, 마침내 독일 국민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땅에서 전쟁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1944년 10월 소련군은 동프로이센 최북단 메멜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독일 본토 공략을 시작하였고 독소전쟁 당시 독일군의 전쟁범죄에 눈이 돌아간 소련군이 점령지에서 독일 민간인들을 학살, 강간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동프로이센을 비롯한 독일 동부에 살던 수백만 명의 주민들은 공포에 휩싸여 서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치 독일이 패망을 앞둔 1945년 1월 13일, 이반 체르냐홉스키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주도로 동프로이센 전역을 장악하기 위한 동프로이센 공세가 시작되었다. 당시 빈사 상태였던 독일군은 소련군을 막아내지 못했으며, 결국 소련군은 1월 24일 비스툴라 석호에 도달해 쾨니히스베르크를 비롯한 동프로이센 일대 전체가 소련군에 포위되었다.

이에 크릭스마리네의 최고사령관이었던 카를 되니츠 해군 원수는 묘책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바로 동프로이센의 민간인과 군인들을 배편으로 독일 점령하 덴마크나 독일 본토로 탈출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작전이 고안될 수 있었던 건 당시 독일이 발트해의 제해권을 부분적으로는 계속 잡고 있었고,[3] 선박을 이용하면 한번에 많은 수의 인원들을 탈출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카를 되니츠는 휘하 제독이었던 오스카 쿠메츠 해군 대장과 크릭스마리네 수송국장인 콘라트 엥겔하르트 해군 소장에게 구체적인 소개 작전을 수립하고 동원 가능한 모든 선박을 징발하라고 명령한다. 또한 이 작전에는 "한니발"이라는 코드명이 붙었는데,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북아프리카 진공으로 카르타고가 위기에 처하자 한니발 바르카의 카르타고군이 본국을 구원하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카르타고로 선박을 이용해 탈출한 것에서 따온 것이다. 이것은 이후 작전의 정식 명칭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1945년 1월 23일, 되니츠 제독고텐하펜에 전보를 보내 탈출 작전을 시작하라고 명령했고, 동시에 통상파괴전을 위한 유보트 용으로 마지막까지 남겨놓았던 선박용 비축유를 모조리 풀었다. 이렇게 한니발 작전은 시작되었다.

3. 작전의 진행

3.1. 몰려오는 피난민들


파일:Bundesarchiv_Bild_146-1972-093-51,_Pillau,_Einschiffung_von_Flüchtlingen.jpg

위치 불명의 동프로이센 지역에서 탈출선에 올라타는 피난민들

파일:Bundesarchiv_Bild_146-1972-093-65,_Flüchtlinge_auf_Schiff.jpg

소련군에 의해 포위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수상기모함인 '한스 알브레트 베델함'[4]에 승선하는 피난민들

1월 23일을 시작으로 동프로이센에서는 대대적인 해상 철수가 시작되었다. 피난민들은 물론이고, 부상병들 역시 배에 오르는 것이 허락되었기에 고텐하펜, 단치히, 필라우, 메멜 등 동서프로이센 지역의 주요 항구들에는 사람들로 꽉꽉 들어찼다. 징발된 선박들과 군함들은 끊임없이 이들을 실어 날랐으나 몰려오는 민간인들의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3.2.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격침

한편 작전이 시작되자 소련 해군은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했다.[5] 당시 발트해에 전개된 소련 해군의 수상함 전략은 대단히 미약했던 관계로 대부분의 공격은 잠수함이나 항공기로 이루어졌다.

파일:external/us.acidcow.com/acid_picdump_48.jpg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마침내 일이 터진다. 1945년 1월 30일, 항구 을 목적지로 그단스크에서 출발한 독일 여객선 빌헬름 구스틀로프호가 소련 해군의 S급 잠수함 S-13에 격침당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무려 9,500명에서 최대 1만여 명에 달하는 피난민들과 부상병들이 차가운 발트해의 바다에서 사망했다.[6] 이후로도 소련군의 공격은 계속되었고 피해가 속출했는데, 대표적으로 2월 9일에는 3,000명-4,000명이 승선한 상태로 필라우[7]를 출항한 SS 게네랄 폰 슈토이벤(SS General von Steuben) 호가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에 S-13의[8] 공격으로 격침되었다. 생존자는 고작 650명이었다.

3.3. 처절한 탈출

3월 초에는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아트미랄 세어와 구축함 3척, 엘빙급 어뢰함 T36이 포메른의 볼린(Wolin) 섬 일대에서 포격 지원을 실시했다. 이 포격 지원은 소련 육군의 진격을 지연시켰고, 이 틈을 타 약 75,000명의 민간인이 소형 선박이나 상륙정 등을 타고 탈출했다. 이 과정에서 SS 도이칠란트(Deutschland)[9] 같은 대형 여객선들은 무려 1만 1천명에 이르는 피난민들과 부상병들을 실어날랐다.

탈출 작전은 처절함의 연속이었다. 일단 좀 큰 배에 타면 운이 아주 좋은 편이었다. 피난민들은 끝없이 몰려들었고, 배에 타지 못한 일부는 위험을 무릅쓰고 어선, 심지어는 보트 정도의 작은 배에 몸을 맡긴 채 무작정 바다로 나갔다.[10] 물론 큰 배에 탄 사람들도 안전한 건 아니었는데, 소련 해군과 공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배가 격침당하면서 수장당하는 건 물론이요, 비위생적인 배 안에서 병에 걸려 죽거나[11] 기아로 고통받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한편 독일군 역시 피난민들을 사수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저항했는데, 육군은 한줌밖에 안 되는 병력들로 몰려오는 소련군을 지연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해상에서도 몇 척 안 되는 군함들이 필사적으로 소련군들에게 포격을 가했다.

3.4. 고야호 격침

한편 4월 16일, 이번에는 노르웨이에서 징집된 상선 MV 고야(Goya)호가 소련 해군 잠수함 L-3의 어뢰에 맞고 격침되었다. 이로 인해 약 6,000명이 목숨을 잃었고, 183명만이 구조되었다.

4. 작전의 끝

1945년 4월 30일,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하고 베를린 공방전이 독일의 패배로 종료된다. 이후 히틀러의 유언으로 플렌스부르크 정부의 대통령직[12]을 승계받은 되니츠는 피난민 구출을 위해 협상을 통해 시간을 끌어보려 했고 소련군과 전쟁을 지속한다고 선언하며[13], 이제부터는 피난민이나 부상병 수송이 아닌 실질적인 전투에 도움이 될, 즉 쿠를란트 포켓에 고립된 독일 전투병력(약 20만 명) 구출에 집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5월 6일 되니츠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영국군 병력들에게 체포되었고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1945년 5월 8일 밤 9시, 92척의 중소형 선박들로 이루어진 수송선단이 18,000여 명을 태우고 라트비아 리에파야를 떠난 것을 끝으로 한니발 작전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물론 이후로도 한두 척의 선박들로 이루어진 선발적인 규모의 탈출이 있었으나 대부분 소련 해군의 경비정들에 의하여 저지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이 완전히 항복하고 플렌스부르크 정부도 해체되면서 해상으로의 탈출은 막을 내렸다.

5. 평가

개요에도 서술했지만, 한니발 작전은 인류 역사에 남을, 다시는 없을 규모의 탈출 작전이었다. 총 15주 남짓했던 작전 기간 동안 적게는 494척에서 많게는 1,080척에 달하는 상선들과 여객선, 군함들이 투입되었고, 이들은 무려 80~90만 명의 피난민들과 35만 명의 군인들을 동프로이센과 폴란드에서 독일령 덴마크나 독일 본토로 탈출시켰다.

물론 구출한 사람들의 숫자 못지 않게 피해도 어마어마했는데 빌헬름 구스틀로프와 게네랄 폰 슈토이벤, 고야를 제외하고도 작전 도중 158척의 선박이 침몰하였고 소련군의 공격이나 전염병, 기아 등 각종 이유로 수십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작전 도중 목숨을 잃었다.

그래도 만주에 거주하던 일본인 민간인 100만 명과 일본 관동군 병사 70만 명을 그대로 내팽개치고 자기들끼리만 도망친 일본 관동군 수뇌부들의 비겁한 행동에 비하면[14], 그나마 자국민을 지키려고 했던 태도를 보여주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정말로 자국민을 보호하고자 했다면, 더 이상 이길 가능성이 없는 전쟁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그나마 병력이 남아있을 때 빨리 항복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6. 기타


7. 관련문서


[1] 탈출한 인원이 흥남 철수작전에서 탈출시킨 사람의 10배 이상이며, 국공내전 기간 동안 중국 전역에서 대만으로 탈출한 외성인 수의 총합에 맞먹는다.[2] 총 33만 8천명 탈출 성공.[3] 당시 크릭스마리네는 이미 망했지 않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소련 해군의 전력은 그보다도 더 처참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작전을 진행할 여력은 되었다.[4] Hans Albrecht Wedel. 이후 1945년 4월 8일 단치히에서 공습으로 격침된다.[5] 민간인들의 철수 행렬을 공격하는 것이 비인도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당시 복수심에 휩싸여 있던 소련군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또한 철수 행렬에 민간인뿐만 아니라 병력도 포함되었기에 공격 자체는 국제법적으로 문제될 게 없었다. 무엇보다 독일군 역시 1941년 소련 피난민들이 잔뜩 탄 병원선 아르메니아 호를 격침시켜 수천 명을 수장시킨 적이 있었기에 소련을 비난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6] 사건의 자세한 전말은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침몰사고 문서를 참조.[7]칼리닌그라드 주 발티스크 시[8] 빌헬름 구스틀로프를 격침시킨 그 S-13 맞다. 참고로 이 때문에 S-13의 함장 알렉산드로 마리네스코 소령은 히틀러로부터 독일 국민의 적으로 지정되었다.[9] 이후 SS 도이칠란트는 작전의 끝물이었던 5월 3일 결국 항구에서 영국 공군의 폭격으로 최후를 맞이하지만, 기적적으로 침몰 과정에서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다.[10] 물론 이런 소형 선박으로는 거친 발트해를 건너기 힘들었던 관계로, 대부분 이들은 먼바다로 나간 뒤 대형 군함이나 여객선에 구조되는 방식으로 탈출했다. 순수히 소형 선박만으로 탈출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11] 많은 수의 노인들과 아기들이 탈출선 안에서 병에 걸려 사망했다.[12] 총통직이 아니다. 히틀러는 사후 총통직을 다시 총리와 대통령으로 나누어 총리에 파울 요제프 괴벨스를, 대통령에 되니츠를 임명하였으나 괴벨스는 히틀러가 자살한 뒤 얼마 되지 않아서 본인도 자살하였던 관계로 되니츠가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13] 항복하면 소련군에게 끔찍한 일을 당할 것이 뻔하니[14] 심지어 이들은 도망가면서 자기들도 열차에 태워달라는 일본인 민간인들한테 총질까지 하면서 막았고, 혹시나 그들이 따라올까봐 철도 노선도 죄다 끊어버려서 만주에 남겨진 일본 민간인들과 관동군 병사들은 열차도 타지 못한채 그대로 소련군의 폭력에 노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