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의 독일 전함에 대한 내용은 도이칠란트급 전함 문서 참고하십시오.
제2차 세계 대전의 독일 해군 함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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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함 | 1형, 2형, 7형, 9형, 10형, 14형, 17형, 21형, 23형, | |||
경순양함 | 엠덴급, 쾨니히스베르크급, 라이프치히급, | |||
중순양함 | 아트미랄 히퍼급, 도이칠란트급, | |||
항공모함 | ||||
항공순양함 | ||||
전함 | 전노급 도이칠란트급노급 샤른호르스트급, 비스마르크급, 순양전함 | |||
어뢰함 | 어뢰함 1923, 어뢰함 1924, 어뢰함 1935, 어뢰함 1937, 어뢰함 1939, | |||
어뢰정 | 슈넬보트 | |||
훈련함 | 브렘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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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보르크바르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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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zerschiff der Deutschland-Klasse |
1. 개요
크릭스마리네의 장갑함/중순양함으로 베르사유 조약 이후 대폭 축소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해군(라이히스마리네)의 구식화된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을 대체하기 위해 건조한 함종이다. 이후 나치 독일 시대에 접어들면서 3번함 아트미랄 그라프 슈페의 취역으로 생산이 종료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독일 국방군 해군(크릭스마리네) 수상함대의 주력 함종으로 활약하였다.도이칠란트급은 포켓전함(Pocket Battleship)이라고도 불리지만 이 명칭은 공식 명칭이 아닌 당시 관함식에서 도이칠란트급을 본 영국 언론에서 붙인 별칭이고, 이들 함선을 실제로 건조한 독일에서는 장갑함(Panzerschiff)으로 구분했고, 아트미랄 그라프 슈페함을 라플라타 전투에서 상실한 뒤 독일 해군은 1940년에 슈페의 두 자매함인 도이칠란트(뤼초)와 셰어함을 중순양함으로 등급을 변경시켰다.장갑함이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실제 장갑은 주포탑을 제외하면 아트미랄 히퍼(Admiral Hipper)급 중순양함과 다를게 없었고 당시 존재했던 전함들이 14~16 인치급 주포를 가졌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도이칠란트급은 전함의 범주에는 절대 넣을 수 없다. 독일 해군이 재분류한 것처럼 도이칠란트급은 당시 중순양함의 표준 주포인 8 인치(203 mm)보다 더 강한 11 인치급 주포(283 mm) 6 문을 장착하고 대신 속도를 희생한 고화력의 느린 중순양함에 불과했다.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 문서 참조. 따지고 보면, 흔히 장갑차라 불리는 차량들도 전차보단 장갑이 훨씬 얇으니, 걍 이름 붙이기 나름이다.
2. 제원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Panzerkreuzer der Deutschland-Klasse | ||
다음급 | 아트미랄 히퍼급 중순양함 | |
표준배수량 | 10,800톤 | |
만재배수량 | 14,520톤 | |
전장 | 186m | |
전폭 | 20.69m | |
흘수 | 7.25m | |
출력 | 53,260SHP | |
최고 속력 | 28노트 (약 52km/h) | |
항속거리 | 20노트 (약 37km/h) 순항 시 19,000km | |
동력 | 기관 | MAN 디젤 엔진 8기 |
추진 | 2축 프로펠러 | |
승조원 | 장교 | 33명 |
수병 | 586명 | |
무장 | 주포 | 3연장 28cm C/28 함포 2기 |
부포 | 15cm SK C/28 함포 8문 | |
8.8cm SK L/45 양용포 3문 | ||
대잠 | 533mm 어뢰 발사관 8문 | |
장갑 | 주포탑 | 140mm |
측면 | 80mm | |
갑판 | 45mm | |
함재기 | 아라도 Ar 196 수상기 2기 | |
함재기 시설 | 캐터펄트 1기 |
3. 개발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당시만 해도 세계 해군의 주력함은 여전히 대구경 함포를 장비한 전함이었다. 패전 이후 독일 해군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배수량 1만 t이상의 함정, 12 인치 이상의 함포를 탑재한 함정은 건조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제한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주포의 사거리도 30 km 이하로 규제당했다. 이 때문에 신규 건조하는 함정의 주포 부앙각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올릴 수 없도록 규제되었다. 이 중 부앙각 문제는 조약 파기 이후 곧바로 개선되었다.이 제한에 위배되지 않으려면 독일 해군이 보유할 수 있는 전함은 11 인치 2연장 포탑 2 개를 탑재한, 드레드노트 이전 세대(Pre-dreadnought)의 전함 6 척(브라운슈바이크급 전함 3대,도이칠란트급 전함 3대) 만을 운용할 수 있을 뿐이었고, 그나마도 이 함정들은 드레드노트 등장 이전에 건조되었기에 전간기에는 너무 노후한 함정들 뿐이었다. 이로 인해 사실상 당시 독일 해군은 세계 최강의 해군국인 영국과 순위권 안에 드는 해군을 보유한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바로 옆에 둔 상태에서 열강 해군으로서의 기능을 강제로 거세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규제는 한때 카이저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대건함 정책으로 영국 다음가는 세계 2 위의 규모를 자랑하기도 했었던 독일 해군으로서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나마 보유를 허락받은 전노급 전함 6척도 모두 노후함이었기 때문에 대체가 시급한 형편이었는데, 영국은 물론 프랑스나 이탈리아같은 다른 열강이라면 퇴역하는 전함을 대체할 수 있는 신형전함을 건조할 수 있었겠지만 독일은 조약의 제한 때문에 현대식 전함을 건조할 수 없었던 것이다.[1]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독일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근본적으로 이전 세대 전함의 수준을 넘지 못하는 어중간한 함정일 뿐이었다. 더욱 큰 문제는 그나마도 퇴역하는 11 인치 주포 전함의 화력을 보충하는 11 인치 주포 탑재함을 건조할 경우 1만 톤 배수량 내에서 대응방어를 선택하면 최소한의 기동력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배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탑재한 무장 중량합계와 이 무장에 대한 대응방어를 위한 장갑중량합계를 일정 속도로 움직이기 위한 동력계통 부피의 균형이다. 기관이 커지면 배 역시 커지므로 장갑중량도 이에 정비례해서 상승하고, 그렇다고 기관용적을 너무 작게 잡으면 충분한 동력원을 넣을 수 없어 속도가 나지 않는다.
결국 머리를 굴린 끝에, 독일 해군은 11 인치 3연장 포탑 2 기를 장착한 신형함을 건조하되 해당 수준 무장을 탑재한 배로서는 드물게도 대응방어를 포기하고 장갑을 대폭 감량함으로서 배수량을 줄인다는 대담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또한 건조 과정에서 배수량 축소를 위해 당시로서는 아직 기술적으로 확실히 안정돼 있다 하기 힘들었던 함선용 디젤 엔진을 탑재하여 기관용적 소요를 줄이면서 상당한 출력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는 동시에, 기존의 리벳식을 포기하고 경합금을 사용한 용접 방식을 사용한다는 대담한 기술적 시도 역시 성공시켜, 최종적으로는 조약 규정을 살짝 오버하는 선인 기준배수량 11,000~13,000 톤 선에서 전노급전함과 초기형 드레드노트 전함에 비해 대등 이상의 화력(도이칠란트급 전함이 11인치 4문(연장포 2개), 장갑함이 11인치 6문(3연장포 2개))과 절대적으로 우세한 기동력(도이칠란트급 전함이 18.5노트, 장갑함이 28.5노트)을 확보한, 최초의 장갑함 도이칠란트함을 1929 년 건조하게 된다. 취역은 1933년.
4. 동형함 목록
<rowcolor=white> 함명 | 기공 | 진수 | 취역 | 비고 |
도이칠란트 (Deutschland) → 뤼초 (Lützow)[2] | 1929년 2월 5일 | 1931년 5월 19일 | 1933년 4월 1일 | 1947년 7월 22일 표적함으로 침몰 |
아트미랄 셰어 (Admiral Scheer) | 1931년 6월 25일 | 1933년 4월 1일 | 1934년 11월 12일 | 1945년 4월 9일 공습으로 침몰 |
아트미랄 그라프 슈페 (Admiral Graf Spee) | 1932년 10월 1일 | 1934년 6월 30일 | 1936년 1월 6일 | 1939년 12월 17일 자침 |
5. 건조내역 및 활동
이러한 도이칠란트급의 성공에 힘입어 독일 해군은 초기에는 군부의 재무장 시도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견제를 무릅쓰고, 이후 나치 정권의 집권 뒤에는 도이칠란트급이 상징하는 기술적 혁신에 반한 아돌프 히틀러 정권의 지원 하에 아트미랄 셰어(1934년 취역), 아트미랄 그라프 슈페(1936년 취역)를 연달아 건조하여 기존의 전노급전함들을 대체하기에 이른다.이 3척은 1935년 영국-독일 해군조약 체결로 독일 해군이 기존의 도이칠란트급보다 거대한 현대적 전함 건조를 국제조약을 통해 보장받게 될 때까지 독일 해군 최대최강의 전투함이었고, 역대함이 취역할 때마다 독일 해군 총기함으로 운용되었다.
실전에서도 이들은 독일 해군을 대표하는 함선으로 활약하였는데, 도이칠란트와 아트미랄 셰어는 1936년 발발한 스페인 내전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스페인 국민군을 지원하여 스페인 공화정부 측 해군의 전함 하이메 1세 등을 견제하면서 독일의 프랑코 군대에 대한 군수물자 수송 통로를 방어하였으며, 아트미랄 그라프 슈페는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크릭스마리네의 기본 전략이었던 통상파괴전을 수행하였다.
영-독 해군조약 체결 이전의 독일 해군에서 도이칠란트급은 독일 해군이 합법적으로 보유 가능한 최강의 주력함으로서 자국 영해에서 외국 해군의 세력을 배제하는 것, 즉 전함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영-독 해군조약 체결로 제대로 된 전함을 건조할 수 있게 되자 안 그래도 방어력도 화력도 부족한 도이칠란트급에게 제해임무를 맡기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여겨졌으므로, 도이칠란트급의 화력보다는 방어력 및 기동력 측면을 감안하여 원양에서의 통상파괴임무 수행에 돌리는 것으로 바뀌었다. 특히 이에는 당시 독일 해군 총사령관이었던 에리히 레더 제독이 통상파괴작전에서 당시 잠수함 전단장 카를 되니츠 대령이 주장한 U보트의 가치를 낮게 보고 대형 고속 수상함 또는 대형 잠수함에 의한 호송선단 기습 및 단독항행 상선에 대한 합법적인 임검 및 나포-격침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인식했던 탓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후 도이칠란트급 3 척 중 2차 세계대전 개전 당시 이미 바다에 나가 있던 그라프 슈페는 1939년 9월부터 자침하는 12월까지 대서양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제대로 된 통상파괴활동을 펼치는 독일 해군 함정으로 맹활약하였다. 당시만 해도 U보트는 제대로 대서양에 나가지도 못하는 상태였고, 아울러 독일 해군 역시 국제법을 준수하고 있어 전과를 올리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게다가 전쟁이 터질 줄 몰라 배들을 미리 내보내 놓지도 않았고. 당대의 통상파괴전 관련 국제법은 철저하게 수상함을 위한 것이었고 잠수함에 의한 통상파괴작전은 아주 엄격한 여건 하[3] 에서만 국제법상 허가되고 있었다. 그라프 슈페는 1차대전 당시 당시 태평양 통상로를 들쑤신 SMS 엠덴의 신화를 다시 쓰고자 했다.
나머지 2척은 도이칠란트 함이 국가 이름인 "도이칠란트"라는 함명을 가진 배가 침몰할 경우 국민들에게 끼칠 악영향을 감안해서 뤼초(Lützow)로 개명한 후, 1940년 가을 이후부터 대서양에서 통상파괴작전에 임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고, 1945년까지 살아남아 독일 항복 직전 공습으로 항구에서 침좌(아트미랄 셰어) 하거나 소련군에 노획되어 표적함으로 격침 처분(뤼초) 되는 운명을 맞았다.
문제는 해당 함을 건조한 것에 비하면 소득이 별로 없었다는 것. 그나마 멋지게 활약한 그라프 슈페함도 고작 상선 9척을 격침한 것에 불과했고, 나머지 두 척도 통상파괴작전에 나간 것은 몇 번도 안되었으며, 주로 동부전선의 독일 육군을 지원하는 포격에 종사하였다.
Graf Spee - Pocket Battleship Scuttled By Nazis Aka Graf Spee In Montevideo (c.1939 / British Pathé)
그라프 슈페가 자침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통상파괴전 도중 마주친 영국 해군 중순양함 1 척(엑세터)과 경순양함 2 척(에이잭스, 아킬레스)과 전투를 한 결과 중순양함에게는 중파의 손해를, 경순양함에는 소파의 손해를 입혔으나 교전 도중 입은 피해[4]를 수습하기 위해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Montevideo) 항구로 입항했다. 하지만 당시 중립국인 우루과이는 외교상의 문제로 장기 입항을 거절하고 국제법상 72 시간만 머무를 수 있었다. 몬테비데오는 라플라타 강 하구에 있는 항구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친독 국가인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갈 수 있었지만 라플라타 강의 수심이 생각보다 얕았고 무엇보다 수리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곧바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영국의 함대가 오고 있다는 잘못된 소식[5]이 들어오면서 결국 1939년 12월 17일 승조원들을 하함시킨 뒤 자침한다. 이때 몬테비데오 항에선 독일 함선과 영국 함대의 전투가 일어날 거라는 소문이 퍼져 주민들이 전투를 기대하고 있었다고(...). 그라프 슈페의 승조원들은 종전 때까지 우루과이에 억류되었으나 소수는 탈출해서 친독 국가였던 아르헨티나 등으로 도주하기도 했다. 함장인 한스 랑스도르프 대령은 승조원과 함께 하함한 뒤 독일 제국 해군(Kaiserlich Marine)기를 펼쳐놓고 권총으로 자살했다. 교전 때 전사한 승무원들은 몬테비데오 공동묘지에 매장했고, 랑스도르프 함장의 시신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운구해서 장례를 치렀다.
이후 우루과이 정부는 2004년에 그라프 슈페 잔해 인양 작업에 들어갔지만# 2007년에 작업을 중단하였다. 이후 우루과이 해군이 침몰 지역을 출입금지 구역으로 설정했는데, 네오나치들의 약탈과, 잔해가 운하로 들어가 손상을 입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그러나 민간회사가 인양한 함미장식 석재 국가수리상을 판매한다고 하여 큰 논란을 일으켰고 실제로 네오 나치들이 사려고 하였다. 결국 우루과이 정부는 판매를 불허하고 국립 해양박물관에 보관 중이다.참고. 그 중에서 해결이 안되었던 '나치 청동 국가수리상'을 정부가 매각해야 한다고 판결내렸다.# 최종적으로 정부 소유권이 되었으며, 수리상을 녹여 비둘기상으로 바꾸기로 계획한다.# 하지만 유적을 파괴한다는 비판을 받고 비둘기상 제작은 포기했다.#
셰어의 경우는 통상파괴 위주로 활동하며 남대서양과 인도양에서 10만톤 이상의 전과를 기록했다. 1942년 소련을 상대로 한 통상파괴작전이 쇄빙선 시비랴코프 1척에게 발각당해 격침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시비랴코프가 보낸 무전으로 통상파괴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또한 저비스 베이 사건에 연루된 함이기도 하다. 이후에는 동부전선에서 독일 육군 지원 포격에 종사했으며 전쟁 말기 동프로이센 대탈출 당시 물밀듯이 밀려오는 소련군을 피해 도망치는 독일 민간 수송선을 엄호했다. 셰어와 구축함이 호위하는 수송선들은 열악한 상황으로 인해 구축함 호위가 붙었음에도 소련 공군의 폭격으로 수만명의 사망자를 내었다. 1945년 영국 공군의 폭격으로 인해 항구에서 전복, 격침당했다.[6]
도이칠란트(뤼초)는 베저위붕 작전에 투입되었다가 해안포대의 공격으로 파손을 입고 홀로 독일로 돌아가다가 영국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함미가 동강나기 직전의 손상을 입고 간신히 돌아가 1 년간 수리와 개장을 거쳤다. 바렌츠 해 해전에도 참가했으나 독일 해군의 소극적인 전술로 인해 제대로 활약하지 못하고 대패를 지켜봐야만 했다.
도이칠란트(뤼초)가 후퇴한 이유는 간단한데, 포탄을 막을 장갑도 없는 판에 어뢰를 막을 수 있는 방어시설이 사실상 전무했으므로 어뢰 1방이 충분히 함에 치명상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런 방어상의 문제로 인해 통상파괴활동 중 적 수송함대를 보고도 호위함이 붙어있는 것을 보고는 건드리지도 않고 그대로 도주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이후 뤼초는 종전 직전 공습으로 항구에서 착저,[7] 격침되었다.
6. 후대의 평가
도이칠란트급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냉엄해서, 비록 우수한 화력을 통해 전함을 방불케 하는 현대적인 함정을 건조해 냈다는 점은 인정받으면서도 그 화력을 확보하기 위해 방어력을 지나치게 희생해서 도이칠란트급의 장갑 방어력은 경순양함의 6 인치 함포에 대해 원거리에서의 방어가 한계로 순양함과 비등했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제한된 배수량 때문에 충분한 기관을 실을 수도 없어 속도 역시 순양함보다 느려 순양함으로서의 임무조차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웠다는 것 또한 일반적으로 지적받는다. 실제로 도이칠란트급은 복수의 순양함과 교전할 경우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고 도주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게다가 1930년대에 건조된 정규 전함들조차 도이칠란트급과 대등 또는 그 이상의 기동력을 얻었으므로 이미 이 시점에서 도이칠란트급의 운명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한마디로 말해서 '전함을 속도로 제압하고 순양함을 화력으로 제압하려던' 이 함급은 '전함에는 화력으로 제압당하고', '순양함에는 속도로 제압당하는' 역설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원래 목표는 발트해 안에서 발트해의 소국들의 경순수준을 유지하면서 장갑과 화력에 집중하며 대신 속도와 항속거리는 희생한 해방전함과 정면 대결을 하며, 영국이나 소련의 전함과 싸운다면 안개가 자주끼는 발트해 에서는 운좋으면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노려 공멸이나 대파시키는 것을 목표로 만들었다고 한다.
7. 여담
3번함 아트미랄 그라프 슈페를 1:20 축척 모형보트로 자작한 사람도 있다. 승조원 인형들도 제작해 올려두었고 결정적으로 '사람이 탑승하여 항해 가능'. 역시 양덕후는 위대하다. #3번함 아트미랄 그라프 슈페는 노르웨이 침공의 단초가 된 알트마르크 나포 사건과 관련되었다. 물론 베저위붕 작전의 진짜 원인은 영국과 독일의 전략적 입지 때문이지 고작 수송선 한 척 때문에 일어난 일은 아니다. 단지, 저 사건이 일종의 발단 정도였다는 것.
8. 매체에서
- 영화
3번함인 아트미랄 그라프 슈페와 관련된 영화가 있다.
- 애니메이션
이후 9화에서 다시 재 등장해서 하레카제와 재 교전한다. 하레카제가 발사한 어뢰를 전부 깡으로 무시하는 패기를 보여주면서 하레카제의 3번 주포를 광탈시키는 등 간지 넘치는 활약을 보이지만 하레카제 승무원 6 명으로 이루어진 별동대가 함내로 진입되면서 결국 리타이어가 되어버린다.
이후 마지막 화에서 하레카제를 지원하기 위한 지원 함대 소속으로 등장한다.
- 게임
월드 오브 워쉽 에서 3번함인 아트미랄 그라프 슈페가 6티어 프리미엄 중순양함으로 나온다
워썬더에서 3번함인 아트미랄 그라프 슈페가 독일 대형함 5랭크 에서 나온다
중국의 모바일게임 전함소녀에 도이칠란트, 아트미랄 셰어, 그라프 슈페 세 자매가 모두 등장한다. 하지만 중순양함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순양전함 취급을 받아 순양전함 최약체인 함급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1차대전 때 함선인 몰트케보다 더 약하다.
같은 중국 모바일 게임인 벽람항로에서는 도이칠란트가 중순양함으로 등장한다. 포켓전함의 원래 목적을 살려 경순양함과 구축함에 대해 공격력이 증가하는 스킬을 지니고 있다. 또한, 그라프 슈페도 중순양함으로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포켓전함 스킬 보유.
이벤트 그라프 슈페 추격전에서는 S3 스테이지의 보스로 등장. 불리해진 상황에서 자침한 그라프 슈페의 실제 역사를 살려 체력이 일정 이상 내려가면 자폭한다. 다른 전투와는 다르게 자폭 전에 그라프 슈페를 잡아야 S승리로 인정되며, 자폭할 경우 아군 함에도 큰 데미지를 주며 여기서 격침되는 아군 함선이 발생하면 B승리까지 내려간다. 보스전을 총 60번 클리어하면 보상으로 그라프 슈페가 주어진다.
Naval Creed:Warships에서 독일 순양함 2차트리 3티어로 등장한다.
워쉽 플릿 커맨드에서 뤼초(위 이미지)가 4성급으로, 그라프 슈페가 5성급의 순양함으로 등장한다.
[1] 본래 협상국은 드레드노트급 8척(나사우급 4척, 헬골란트급 4척)으로 제한하려 했지만 스캐퍼플로 자침사건으로 함선을 전쟁보상으로 받을 수 없게 되자 열받아서 보유를 인정해줬던 드레드노트급 전함들중 6척은 스크랩처리하고 2척은 각기 미국과 프랑스로 넘겨져 표적함으로 격침되고 전드레드노트급 6척만 보유를 허가한다.[2] 1940년부터[3] 일단 정선 명령을 내린 뒤 명령에 불복하면 공격을하고, 항복하면 상선 승무윈을 모두 잠수함에 태운후 격침시키고 등등 매우 엄격하고 까다로운 절차였기에, 이 절차를 지켰던 건 2차 대전 초기 영국 해군 외에는 전무하다. 그도 그럴게 절차 자체가 잠수함의 특성을 개무시하고 설정되어서, 지키는놈은 바로 상어밥되는 수준의 어처구니 없는 절차다. 일단 정선명령을 하려면 부상을 하고 적함 군처로 가야하는데 잠수함 특성상 내압 선체가 유일한 장갑이다보니 정선명령을 듣고 상선용 무장까지 갈 필요도 없이 37밀 대전차포 한발만 맞춰도 그 잠수함은 죽은거다. 그냥 가속해서 들이 박기만 해도 그대로 격침후 승무원 몰살이니까. 항복해도 문제가 되는게 좁아 터져서 식랑보관할 곳도 모자라고 화장실 2개면 감격의 기도를 올려야하는 잠수함에서 적 승조원을 태울곳을 어떻게 만드는지.... 아니 그 이전에 적 승무원들이 폭동이라도 일으키면 뒤진다. 문자그대로 상선 승조원이 잠수함 승무원보다 많고 내압선채 깨지면 해저유적지가 되어버리는 잠수함인지라 군함 주제에 개인화기가 없다.[4] 결정적으로 중유를 예열해 액상화하는 장비가 파손되었다. 이걸 수리하지 못하면 항해가 불가능한 상태였다.[5] 이는 영국 측이 고의로 흘린 역정보였다. 아직 영국 함대가 집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라프 슈페가 도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보를 흘린 것.[6] 한편 당시 같은 항구에 프린츠 오이겐도 있었는데, 오이겐은 공습을 피해서 살아남았다. 오이겐의 상당한 강운을 알 수 있는 부분.[7] 단 완전히 뒤집어져버린 셰어와는 다르게 주포탑 등 상부구조물은 계속 수면 위에 있었기에 5월 4일 탄약을 모두 소진할 때까지 소련군을 방어하기 위한 지원포격을 실시했다.[8] 왜 세일럼인지 추측을 해보자면, 그라프 슈페처럼 연돌이 한개에 3연장 주포를 가지고 있고, 분류가 중순양함으로 되어 있기도 하니 이런식으로 출연을 시킨것으로 보인다. 마치 귀에 걸치면 귀걸이 코에걸면 코걸이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