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렌츠해 해전 | ||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 ||
침몰하는 독일 해군의 1934년형 구축함 Z16 프리드리히 에콜트 | ||
날짜 | ||
1942년 12월 25일 ~ 1943년 1월 9일 | ||
장소 | ||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 인근 바렌츠해 | ||
교전국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지휘관 | [[틀:깃발|로버트 버네트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로버트 셔브룩 | ]][[틀:깃발| ]][[틀:깃발|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오스카 쿠메츠| ]] | ]][[틀:깃발| ]][[에리히 레더| ]]
결과 | ||
나치 독일의 영국 해군 선단 공격 실패 영국의 전략적 승리 | ||
전력 | 순양함 2척 구축함 6척 초계함 2척 기뢰부설함 1척 견인선 2척 | 중순양함 2척 구축함 6척 |
피해규모 | 전사 250명 구축함 1척 침몰 구축함 1척 손상 기뢰부설함 1척 침몰 | 전사 330명 중순양함 1척 손상 구축함 1척 침몰 구축함 1척 대파 |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2년 12월 25일부터 1943년 1월 9일까지 바렌츠해에서 영국 해군과 독일 해군 사이에 벌어진 해전. 독일 해군이 PQ-17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벌인 해전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독일 해군 역사상 최악의 졸전이 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독일 해군의 수상함대는 사실상 종말을 맞게 된다.2. 무지개 작전
크릭스마리네는 비스마르크 추격전에서 독일의 대표 전함인 비스마르크를 상실한 후 대양함대의 활동범위 증가와 심각한 연료의 부족으로 인해 함대의 활동범위를 더욱 축소시켜야 했다. 그리고 1942년 말 비스마르크급 전함 티르피츠가 수리를 위해 노르웨이의 트론하임으로 철수함으로써 북극해 항로에 대해 독일군이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크게 감소했다.이런 좋지 못한 상황에서 독일 해군 총사령관 해군 원수 에리히 레더 제독은 북극해를 통과해서 소련에게 렌드리스 보급 물자를 전해주는 연합국 선단을 공격해서 독일 함대의 위력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레겐보겐(Regenbogen, 무지개)' 작전을 수립했다. 이 작전은 중순양함 아트미랄 히퍼와 6척의 구축함으로 편성된 부대를 영국 수송선단의 호위함선과 교전하게 하고 그 사이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뤼초가 수송선들을 격침시킨다는 것이었다.
영국의 입장에서도, 유보트와 루프트바페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북극해 항로는 폐쇄할 수 없는 처지였다. 1941년 11월까지 영국은 북극해 항로를 통한 수송선단의 파견을 중단했으나, 소련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영국은 다시 선단을 출격시켰다. 다만 방법을 바꿔서 선단의 호칭을 JW로 변경하고 선단을 A, B, C 등으로 잘게 나눠서 보냄으로서 설령 독일군에게 들키더라도 최소한의 피해만 입도록 조치했다. 이런 방법을 사용해서 12월 18일 15척의 상선과 7척의 구축함, 5척의 코르벳 함으로 구성된 JW-51A는 피해를 입지 않고 1주일 후에 소련의 무르만스크 항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그 다음에 JW-51B선단이 14척의 상선으로 구성되어 12월 22일에 소련으로 길을 나섰다. O급 구축함 '온슬로(Onslow)', '오리비(Oribi)', '오비디언트(Obedient)', '옵듀레이트(Obdurate)', '오웰(Orwell)', 그리고 A급 구축함 '아카테스(Achates)' 등 6척의 구축함, 1척의 소해함, 2척의 코르벳 함, 2척의 견인함이 '제17소함대'로 편성되어 선단의 근접 호위를 담당하고, 경순양함 'HMS 자메이카(Jamaica)'와 'HMS 셰필드(Sheffield)' 두 척이 해군소장 버네트 제독의 지휘 하에 'R함대'로 편성되어 호위를 담당했다.
3. 교전의 시작
JW-51B가 출항한 지 5일째 되는 날, 너무 거센 파도로 선단은 뿔뿔히 흩어졌다. 12월 30일 아침, 독일 해군 잠수함 U-354가 이들 선단의 일부를 발견, 다음과 같이 무전을 보냈다.6~10척의 수송선단 발견, 호위 전력은 빈약
이 보고를 받은 레더 제독은 독일 함대가 전과를 올릴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 레겐보겐 작전을 발동했다. 중순양함 히퍼, 장갑함 뤼초, 구축함 6척의 독일 함대는 히틀러에게 줄 신년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의기양양하게 출발하였다. 지휘관은 해군 중장 오스카 쿠메츠 제독[1] 이었다.
쿠메츠 제독이 레더 제독에게 맨 처음 받은 명령은 아래와 같았다.
우세한 적과의 교전은 피하라,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상황에 따라 적을 격멸하라.
이 명령을 굳게 새긴 쿠메츠 제독은 12월 30일 18시 알텐 피오르를 나섰다. 히퍼와 뤼초는 각기 나뉘어 선단을 추격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쪽이든지 한 쪽이 먼저 적과 교전을 시작하면 그 동안 다른 한 척이 상선대로 접근하기 위해서였다. 히퍼와 구축함 6척을 직접 지휘하던 쿠메츠 제독은 상황을 봐서 구축함 3척을 뤼초 쪽으로 이양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순간, 레더 제독은 주의에 주의를 요하던 히틀러의 명령을 상기하고 갑자기 함대에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
적과 같은 규모라도 교전은 피하라, 대형 순양함을 위험에 빠뜨려서는 안될 것.
12월 31일 02:40시, 히퍼와 뤼초는 각각 갈라져서 북동쪽으로 향했고, 07:15시 경에는 선단 후방 약 39km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몇 분이 지난 후 쿠메츠 제독의 함대는 정체불명의 함정을 발견하게 된다. 쿠메츠 제독은 구축함 엘콜트에게 그 함정을 조사해 볼 것을 명하고 히퍼를 그 쪽으로 유도해갔다. 엘콜트의 후방에는 히퍼 함대의 구축함 2척과 뤼초 함대의 구축함 3척이 뒤를 따르고 있는 상태였다. 08:30시 경, 히퍼는 선단의 좌후방에, 뤼초는 선단의 우측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때 JW-51B선단은 구축함 부대가 호위중이었고, 순양함 셰필드와 자메이카가 선단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 해군이나 영국 해군 모두 시계가 극히 불량해서 적의 위치를 알 수 없었고, 결국 아주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해서야 적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독일 해군과 영국 해군 모두 처음으로 붙은 것은 구축함들이었는데, 09:15시 경 영국 구축함 1척이 독일 구축함 3척과 마주치게 되었고 약 7.4km의 거리를 두고 포격전이 시작되었다. 포격소리와 섬광을 발견한 영국군의 구축함들은 곧장 교전에 합류하였다.
4. 독일 해군의 오판과 패배
뒤쳐저 따라오던 히퍼에 탑승한 쿠메츠 제독은 이 때에도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였다. 쿠메츠는 이때 쓴 메모에서 아래와 같이 적었다.시계가 극히 나쁨. 상대하고 있는 함정이 적인지 아군인지도 판단할 수 없음. 시야에는 합계 10척 정도 보이지만 그 가운데 선단을 추적하는 아군함정이 있는지 판단할 수 없음.
이런 와중에 1척의 영국 구축함이 연막을 치면서 히퍼 쪽으로 다가오는 게 발견되었고, 히퍼는 이 영국 구축함에게 사격을 퍼부었으나 명중시키지는 못하였다. 히퍼의 사격으로 히퍼의 존재를 알아차린 영국군은 구축함들을 고속으로 히퍼를 향하게 하여 어뢰 공격을 감행하는 듯 했다가 다시 회피하는 기만전술을 쓰기 시작했다.
이에 쿠메츠 제독은 레더 제독의 명령을 상기했다. 영국 해군은 분명 자신보다 열세이나 자신의 순양함에 '중대한 위협'이 가해지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는 판단을 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지원포격만 하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10:00시 경 영국 해군의 구축함들은 HMS 셰필드를 비롯한 영국 순양함들이 지원을 위해 오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이 때 영국 구축함들은 고전 중이었고 10:20시경에는 영국 구축함 HMS 온슬로에 히퍼의 20cm 포탄이 명중했다. 명백하게도 화력에서는 영국 구축함과 중순양함 히퍼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고 어느 정도 전투를 계속하면 결정적 타격을 줄 것이 뻔하였으나, 쿠메츠 제독은 레더의 명령을 상기하고 히퍼를 후방으로 급히 철수시키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영국의 구축함 부대는 순양함 HMS 셰필드와 HMS 자메이카를 전장으로 유도하기 위해 선단의 선두로 위치를 옮길 수 있었다.
1045시, 영국 코르벳이 정체불명의 함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는데, 이 정체불명의 함은 바로 선단의 4km까지 접근한 크릭스마리네 포켓전함 뤼초와 구축함 3척이었다. 이 상황에서 사실상 뤼초의 부대는 영국 선단을 제압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뤼초도 급속히 안개 속으로 후퇴해버리고 마는데, 당시의 전투기록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있었다.
10:50시 시계불량. 적인지 아군인지 판단불가.
말하자면 아군이 너무나도 확실히 우세한 상황이 아니면 교전하지 말라는 명령 때문에 독일 해군의 행동은 극도로 위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전장으로 달려오던 영국 해군 순양함들은 드디어 히퍼를 발견, 곧바로 포격을 개시하였다. 포격은 13km밖에서 시작되었는데, 영국 해군의 정확한 포격으로 3발의 6인치 포탄이 히퍼에 명중하고 말았다. 이 피탄으로 보일러실이 침수된 히퍼는 속력이 28노트로 떨어졌고, 그로부터 5분 뒤에는 역시 HMS 셰필드의 포격으로 독일 구축함 1척이 격침되고 1척이 대파되었다. 이렇게 되자 11:49시 쿠메츠 제독은 전 독일 함대에 대해 퇴각 명령을 내려야 했다. 4시간에 걸친 혼전이 경순양함 HMS 셰필드의 7번의 일제사격으로 끝내 독일 해군의 완패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5. 레더 제독의 사임
해군의 패배에 히틀러는 격노했다. 사실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해당 해전의 경우 공군이나 잠수함 등의 개입이 없는 상태에서 압도적인 수상함 전력을 보유한 독일 해군이 상대적으로 빈약한 영국 해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린 것도 모자라서 피해까지 입은 졸전이었으니 전시 지도자라면 히틀러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분노할 만한 일이었다.[2]함대를 보존하는 것은 더 이상 허용할 수 없다. 나는 대양함대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과는커녕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였다. 따라서 구축함과 어뢰정, 소해정 등을 제외한 모든 대형 함선은 해체하고 그 대포, 승조원, 장갑은 독일의 대서양 방벽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레더는 히틀러의 이러한 명령에 대해 상세한 내용의 각서를 써서 제출했다. 대강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독일 함대의 임무는 상대를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억지력이 있는 것이니, 함대를 해체한다면 이는 연합군에게 전략적인 승리를 가져다 바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만약 대형함을 해체한다면 적은 아무런 노력도 없이 승리를 얻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의 대답은 레더 제독에게 더 한층 모욕감만 안겨주었다.
함대는 적과의 병력우열을 계산하고 나서야 싸우는 겁쟁이에 불과하였다. 군인으로서 총통은 싸울 때는 철저하게 싸울 것을 희망한다.
이에 레더 제독은 히틀러의 명령을 따를 수 없었고, 결국 사임의 길을 택했다. 초창기부터 독일 국방군의 건설에 참여하였던 레더 제독이 사임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히틀러는 적지 않게 놀라기는 했으나, 함대를 해체하라는 명령은 끝끝내 취소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1943년 1월 30일, 에리히 레더 제독은 해군 총사령관직을 사임함과 동시에 퇴역하고, 히틀러는 그 후임으로 잠수함대 사령관 카를 되니츠 제독을 임명하였다.
히틀러의 이런 인선은 잠수함대 사령관이면 수상함대를 해체하려고 하는 자신의 생각을 잘 실행할 것이라 여긴 것이지만 새로 해군 총사령관이 된 되니츠 제독은 자료를 검토하고 다른 제독들의 의견을 들어본 다음에, 함대를 축소시키는 것은 있어도 해체시키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히틀러의 의도에 반하는 보고를 했다. 당장 유보트의 입장에서도 독일의 수상함대가 사라지면, 그들을 상대하던 연합국의 전력이 온전히 유보트에게 집중되므로 절대 좋은 일이 아니었다. 결국 3주간의 설득 끝에 히틀러는 대형 함선의 완전 해체명령은 취소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항공모함 그라프 체펠린의 건조를 완전중단하고,[3] 그나이제나우같은 손상을 입은 함선들의 퇴역을 앞당기며,[4] 살아남은 수상함의 활동영역을 발트해에 국한시켰기 때문에 사실상 이 시점에서 독일 대양해군 함대의 명맥은 영원히 끊어졌다. 다만 전함 티르피츠와 샤른호르스트는 북극해 항로를 방해하기 위해서 노르웨이의 피오르에 배치되었으며, 이 둘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 영국 해공군은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1] Oscar Kummetz. 이 사람은 노르웨이 침공에서 블뤼허의 함장을 맡았다가 함은 격침당하고 자신은 포로로 잡힌 굴욕적인 전과가 있다. 그래도 나름대로 능력은 있어서 이후 한니발 작전에까지 참여한다.[2] 사실 이 해전에서 독일 해군은 승리하는 건 둘째치고 최소한의 전공이라도 세울 기회를 무려 두 번이나 놓쳤다. 첫 번째는 뤼초가 선단에게 4km 지점까지 접근하였을 때 공격 명령만 내렸다면 고작 구축함 몇 척의 호위만 받는 선단 상대로 어느정도 전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고, 두 번째는 쿠메츠가 순양함들이 도착하기 이전 히퍼로 영국 구축함들에게 공격을 지속하였다면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도 있었다.[3] 다만 이 부분은 오히려 물자를 절약하였던 적절한 선택이었다는 말도 많다. 당장 그라프 체펠린이 제대로 활동에 들어간 건 빨라도 1943년 중순이었을 텐데 그때쯤이면 슬슬 독일 공군이나 독일 해군이나 제공/제해권을 상실해가던 시기였기 때문. 설렁 건조되었어도 폭격으로 가라앉았거나 자침이라는 운명을 피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4] 그나이제나우는 대파된 상태로 수리 겸 개장을 기다리고 있다가, 히틀러의 대형함 해체 명령으로 끝내 복귀되지 못하고 그대로 스크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