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데카니사 전투 Dodecanese campaign | ||
제2차 세계 대전 지중해 전구의 일부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Dodekanes.png 도데카니사 제도의 위치 | ||
날짜 | ||
1943년 9월 8일 ~ 11월 22일 | ||
장소 | ||
이탈리아령 에게해 제도 일대 | ||
교전국 | [[이탈리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지휘관 | 이니고 캄피오니 로버트 틸니 | 프리드리히빌헬름 뮐러 울리히 클리만 마리오 솔데렐리 |
병력 | 이탈리아 55,000명 영국 5,300명 | 7,500명 |
피해 규모 | 이탈리아 - 사상 5,350명 - 포로 44,391명 영국 - 사상 4,800명 - 전투기 113척 격추 - 순양함 1척 침몰 - 구축함 6척 침몰 - 잠수함 3척 침몰 - 어뢰정 및 연안 방어선 10척 침몰 | 사상 1,184명 상륙정 15정척 격침 |
결과 | ||
독일의 도데카니사 제도 점령 | ||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의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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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3년 9월 이탈리아 왕국이 연합군에게 항복하였고 그 지역은 모두 연합군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 중에서는 발칸 반도의 남부에 독일이 점거하고 있던 도데카니사 제도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에 독일은 연합군에게 이양될 이탈리아군 병력과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서 도데카니사 제도를 공격하는 작전을 시행한다.2. 전개
3. 결과
애초 전투는 이탈리아 수뇌부의 갑작스런 항복과 이로 인해 명령계통이 와해된 도데카니사 제도의 이탈리아군이 연합군에게 긴급히 지원요청을 하면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전투에 참여한 영국군의 급조된 병력으로 독일군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그리스령에서 날아온 독일 공군기들에게 영국 해군 함정들이 다수 손실을 입고 이탈리아군은 독일군에게 항복했으며 독일군의 피해는 1,100여명 수준이었지만 영국군은 4배가 넘는 5,000여명의 사상자가 났다. 이 때문에 처칠은 "또 갈리폴리냐"는 비판을 받았다. 그 결과 독일 괴뢰 정부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과 독일군이 도데카니사 제도를 1945년 패망 직전까지 지배했다.또한 이 전투에서 이탈리아군 지휘관이었던 이니고 캄피오니 제독은 살로 공화국과 독일측에 포로가 되었다. 그는 살로 공화국에서 협력 요청을 받았지만, 추축국과의 협력을 거부하였다. 결국 얼마 뒤 그는 반역죄로 사형당했다.
이 전역을 바탕으로 만든 소설이 바로 영화로도 각색된 나바론의 요새이다.
여담으로 독일군의 유도미사일 Hs293이 투입된 전투이기도 하다. Hs293은 이 전투에서 영국 구축함 한 척을 격침시켰고 한 척에 손상을 입히는 전공을 세운다.
4. 기타
이곳에 배치된 이탈리아군은 독일군의 무장해제에 응해 스스로 해산한 본토 사단들과 달리, 독일군과 협상을 거부하고 저항을 선택했다. 전투가 끝난 후 독일군은 적법한 절차없이 이탈리아군 장교와 사병들을 학살했고, 제33보병사단 아퀴가 주둔한 케팔로니아 섬에서는 그 피해가 컸다. 사단장 안토니오 간딘(Antonio Gandin)을 비롯한 이탈리아군 장교 137명이 독일군에게 총살되었고, 장병 약 5천여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집계되었다.1950년대 그리스 정부에서 유해를 발굴하여 추모비를 세웠다.# 이 사건을 다룬 영화가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코렐리의 만돌린이다.
한편 지휘계통상 학살 명령을 내린 하랄트 폰 히르슈펠트(Harald von Hirschfeld) 제98산악연대장은 전쟁 중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