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letter-spacing: -0.9px; word-break: keep-all" {{{#000,#999 | <colbgcolor=#536349> 연표 | 사건 |
1936년 |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 |
1937년 | 7월 중일전쟁 발발(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 |
1938년 |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 |
1939년 |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 |
1940년 |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 |
1941년 |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 |
1942년 | 4월 둘리틀 특공대 | 6월 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 |
1943년 |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 |
1944년 |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 |
1945년 |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연합군의 일본 본토 공습(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옥음방송)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 |
됭케르크 철수작전 영어: Dunkirk evacuation[1] 프랑스어: Évacuation de Dunkerque | ||
▲ 해안가에서 기다리는 연합군 | ||
장소 | ||
프랑스 북부 됭케르크 | ||
기간 | ||
1940년 5월 26일 ~ 6월 4일 | ||
교전국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틀:깃발| ]][[틀:깃발| ]][[캐나다 자치령| ]] [[프랑스 제3공화국|]] 프랑스 [[벨기에| ]][[틀:국기| ]][[틀:국기| ]] [[네덜란드| ]][[틀:국기| ]][[틀:국기| ]] [[틀:깃발| ]][[틀:깃발| ]][[폴란드 망명정부| ]]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지휘관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휴 다우딩| ]] [[틀:깃발| ]][[틀:깃발| ]][[버트럼 램지| ]] [[틀:깃발| ]][[틀:깃발| ]][[고트 경 존 베레커| ]] [[틀:깃발| ]][[틀:깃발| ]][[윌리엄 테넌트| ]] [[막심 베이강|]] 막심 베이강 [[장마리 샤를 아브리엘|]] 장마리 샤를 아브리엘 | ]][[틀:깃발| ]][[해럴드 알렉산더|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한스 폰 루크| ]] | ]][[틀:깃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
결과 | ||
연합군 338,226명의 철수 성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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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anwhile, the Royal Navy, with the willing help of countless merchant seamen, strained every nerve to embark the British and Allied troops; 220 light warships and 650 other vessels were engaged. They had to operate upon the difficult coast, often in adverse weather, under an almost ceaseless hail of bombs and an increasing concentration of artillery fire. Nor were the seas, as I have said, themselves free from mines and torpedoes. It was in conditions such as these that our men carried on, with little or no rest, for days and nights on end, making trip after trip across the dangerous waters, bringing with them always men whom they had rescued. The numbers they have brought back are the measure of their devotion and their courage.
한편, 수많은 상선의 지원을 받아, 왕립해군은 영국군과 연합군의 구출에 총력을 다했고, 220척의 군함과 650척의 선박들이 참여했습니다. 그들은 악천후 속, 끊임없이 쏟아지는 폭탄과 증가하는 포병 사격의 집중 아래에, 해안 위에서 어려운 작전을 수행해야만 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바다는 기뢰나 어뢰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병사들은 며칠 밤을 쉬지 않고 위험한 바다를 건너, 사람들을 옮기며 구조해 냈습니다. 그들이 되찾아 온 숫자는, 그들의 헌신과 용기의 척도입니다.
윈스턴 처칠, 됭케르크 철수작전 이후 연설
한편, 수많은 상선의 지원을 받아, 왕립해군은 영국군과 연합군의 구출에 총력을 다했고, 220척의 군함과 650척의 선박들이 참여했습니다. 그들은 악천후 속, 끊임없이 쏟아지는 폭탄과 증가하는 포병 사격의 집중 아래에, 해안 위에서 어려운 작전을 수행해야만 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바다는 기뢰나 어뢰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병사들은 며칠 밤을 쉬지 않고 위험한 바다를 건너, 사람들을 옮기며 구조해 냈습니다. 그들이 되찾아 온 숫자는, 그들의 헌신과 용기의 척도입니다.
윈스턴 처칠, 됭케르크 철수작전 이후 연설
1. 개요
<rowcolor=white> 됭케르크 철수작전의 1분 전개 |
작전 당시에는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상 철수 작전이었으며, 이후 나치 독일 멸망 직전에 카를 되니츠가 동프로이센 등지에서 벌였던 한니발 작전이 최대 규모의 해상 철수 작전으로 남아있다. 현대 한국사에서는 6.25 전쟁 당시의 흥남 철수작전이 비슷한 사례로 꼽힐 수 있다.
2. 배경
<rowcolor=white> 프랑스 침공의 전개 |
<rowcolor=white> 독일군에게 포위 당한 연합군 |
게다가 영국에게는 이들을 탈출시켜야 하는 이유가 더 존재했다. 본래 영국 육군은 상비군의 수가 적은 편이었고, 포위망에 갇힌 영국 육군 병력, 즉 '대륙 원정군'(British Expeditionary Force)은 영국 지상군의 실질 주력이었다. 본토에 일부 부대가 남아 있고, 예비역을 소집하고 신병들을 징집하고 있었지만 이들이 제 역할을 하려면 당연히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해외의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 식민지에 주둔한 병력은 그 여건상 함부로 영국 본토로 뺄 수도 없었고 그럴 시간도 없었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들의 병력도 마찬가지로 당장 영국 본토를 증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즉 이 대륙 원정군 병력을 구출하지 못하면 영국 본토는 빈약한 잔여 병력만으로 지켜야 하는 속 빈 강정이 된다는 뜻이었다.
연합군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단 하나, 바다를 건너 영국으로 빠져나가는 것뿐이었다. 세계 전사상 유례가 없는 사상 최대규모의 탈출작전은 그렇게 막이 올랐다.
3. 작전 직전 상황
3.1. 독일군의 상황
패배라는 걸 모르고 전진해오던 독일 육군은 아라스 전차전에서 역습을 당했지만, 이내 격퇴하고 다시 진격을 재개하고 있었다. 독일 육군 최선두부대는 사기가 드높았으며, 하인츠 구데리안은 5월 22일, 예하 1기갑사단에게 칼레로, 2기갑사단에게 불로뉴쉬르메르[2]로, 그리고 10기갑사단에게 운명의 땅 됭케르크로 각각 진격할 것을 지시했다.이들 3개 항구도시는 포위망 안에 있던 연합군이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항구들이었으며, 독일 육군이 이들 항구도시를 진입, 점령하면 철수는 불가능했다. 다행히 이들 3개 도시에 대한 방어 준비는 그 직전에 간신히 끝났는데, 여기에는 독일군이 연합군의 역습 정보를 듣고 5월 21일, 24시간 공격중지 명령을 내린 행운이 겹쳤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결국 5월 25일, 독일 육군 제2기갑사단이 불로뉴를, 26일에는 제1기갑사단이 칼레를 함락시켰다. 됭케르크가 무사했던 이유는 단 하나, 독일군 최고사령부에서 됭케르크를 맡았던 제10기갑사단을 클라이스트 기갑군의 예비부대로 돌리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독일 육군은 이미 5월 24일, 됭케르크에서 불과 15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한 상태였다. 몇 발자국만 더 내딛으면 됭케르크였고, 철수는 불가능했겠지만…
독일 육군 제4군 사령부는 5월 24일을 기해, 예하 부대에 부대간격 단축 명령을 내렸다. 기갑부대와 보병부대 간의 거리가 너무 벌어졌으니 이를 좁히라는 명령이었고, 당연하게도 보병을 빨리 걷게 할 방법이 없으니 사실상 기갑부대에 이동을 정지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전선을 방문한 아돌프 히틀러도 전군에 진격정지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은 5월 26일이 되어서야 철회되었고, 독일군은 5월 27일에야 공세에 나섰다.
3.1.1. 독일군 오판의 원인
- 우선 아라스 전차전에서의 예상치 못한 연합군의 거센 반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독일군내에 선두 기갑부대가 고립되어 전멸할 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있었다. 아라스에서 영국군 주도의 연합군의 반격은 롬멜의 제 7기갑사단의 보급부대를 유린하고 1차 방어선을 돌파하며 정말로 7기갑사단을 섬멸시킬 뻔했다. 물론 롬멜이 급히 전선에 있던 전차부대들을 소환하고 88mm 대공포와 슈튜카의 협공으로 역으로 연합군의 전차전력을 섬멸시켰지만 이를 알지 못한 독일군 최고사령부에서는 오히려 저놈들이 뒤에 저렇게 강력한 기갑전력으로 선두 기갑부대를 섬멸하려한다!라는 확신을 주게 된 것이다. 1940년 5월 15일 스당 방면에서 프랑스군의 마지막 저항시도를 분쇄하고 나서부터 너무 작전대로 잘 되어가자 아돌프 히틀러와 A집단군사령관 룬트슈테트 등은 연합군이 반격해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 둘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마른 전투에서 이 같은 상황을 보았던 탓에 지휘부의 걱정은 매우 컸었으며 이들은 구데리안과 만슈타인의 급격한 기동전술에 대해 이해도가 상당히 부족한 편이었다. 하지만 정작 육군 총사령부인 OKH에서는 히틀러가 쓸데없이 걱정한다고 여기고, 적극적인 공세를 요구했다. 문제는 일선의 야전군사령관들의 상당수가 육군사령부의 주장이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여기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특히나 공세의 주역인 A집단군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와 참모장 조덴슈테른은 기갑부대와 보병부대 간의 간격이 크게 벌어져 있다는 점을 우려하여 끊임없이 클라이스트에게 진격 속도를 낮추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쳐야 한다는 육군 총사령부 및 최일선 야전 지휘관들의 의견과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는 히틀러 및 일선 사령관의 의견이 완전히 대립된 상태였다.
- 이런 상황에서 공군 원수 헤르만 괴링이 공군만으로 뒹케르크에서 연합군을 다 쓸어버리겠다고 호언장담했고, 파리를 포함한 프랑스의 나머지 부분들을 마저 공격하려면 기갑부대가 필수임을 절감한 히틀러가 괴링을 믿기로 한 것이다. 특히 위에서 언급한 연합군의 아리스 반격도 루프트바페의 가세로 쉽게 물리처버렸으니 히틀러 입장에선 한번 믿어보자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문제라면 당시 너무 연합군 공군이 하도 약하다 보니 전과 뻥튀기로 인한 괴링의 오판과 예상 외의 신예전투기 스핏파이어의 등장으로 덩게르크 철수작전에서는 고전하였다는 거다. 이 때문에 일설에 따르면 에르빈 롬멜 장군은 이때부터 히틀러의 능력에 의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3]
정지 명령으로 인해 독일군은 됭케르크 직전의 지역을 폭우가 오기 전에 하루빨리 통과해서 아직 방어가 상당히 허술한 됭케르크를 비교적 소수의 병력만으로도 손쉽게 점령하여 연합군의 해상 철수를 손쉽게 차단할 수 있었던 기회를 그만 눈앞에서 날려먹고 말았다.
진격 정지 명령이 지닌 큰 군사적인 실책 중 하나로 이미 아 운하를 도하하여 교두보를 만든 기갑 집단의 선견 부대들까지 운하 너머로 되돌린 것을 들 수 있다. 정지 명령 그 자체는 당시의 전술적 상황과 부대 운용상의 기술적 조건 등을 고려하면 충분히 타당성이 없지는 않다는 의견을 내는 연구자들조차 이미 만들어진 교두보에서 철수시킨 것은 크나큰 실수라고 지적한다. 운하 너머의 독일군 교두보가 사라진 동안 연합군은 방어진지를 어떻게든 만들어 내는데 성공하여 철수 기간 동안 독일군의 공세를 저지할 절호의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독일군 교두보가 소규모나마 운하 너머에 존재하고 있었다면 연합군은 독일군의 진격 정지 기간 동안 방어 진지 구축보다 교두보 소멸에 중점을 두고 공세적으로 행동했을 것이기 때문에 독일군의 진격 정지 명령이 해소된 후에는 도리어 반격을 받아 보다 적은 수의 병력만이 탈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3.2. 연합군의 상황
불로뉴와 칼레의 연이은 함락으로 마지막 남은 됭케르크로 철수를 서두르던 연합군은, 독일군의 갑작스런 공격 정지에 당황하면서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됭케르크로의 철수를 완료했으며, 프랑스 해군 북부해군사령관(commander-in-chief of the northern naval forces)인 장-마리 샤를 아브리알 해군중장[4]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을 중심으로 시 외곽에 진지를 구축하고 우주방어에 돌입했다. 그러나 아무리 우주방어라 해도, 결국 독일 측 전력이 훨씬 우세한 것은 사실이었고, 시간이 지나면 이들이 패해 바다 속으로 쓸려나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지휘 체계도 혼란에 빠져있어서, 서부 전선의 총지휘를 맡은 프랑스군 지휘부는 여전히 포위망 내·외부에서의 협격이란 망상에 빠져 있었고,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3세는 5월 28일 독일에 항복한 반면 벨기에 내각은 런던으로 망명해서 망명정부를 구성하고 항전을 선언, 지휘 체계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결국 영국은 포위된 연합군에 대한 구출을 단독으로 실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국은 이를 실행하기 위한 충분한 선박을 확보하지 못했다. 세계 최강 대영제국의 해군이었으나, 그만큼 영국에겐 지켜야 할 바다가 많았다. 지중해와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모든 바다에 전력이 분산되어 있어서 충분한 철수 선박의 제공이 어려웠다. 더군다나 영국군은 노르웨이 전역에서의 철수까지 동시에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노르웨이에 파병된 부대는 규모 면에서 대륙 원정군에 비하면 수가 한참 적고 본토와의 거리는 훨씬 멀었지만, 어느 정도의 선박을 할당해야 했다.
결국 영국은 어떻게든 최소 300,000명 이상의 병력 철수를 위한 선박을 하나라도 더 긁어모을 필요가 있었다.
4. 작전 준비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5월 26일에 첫 실행하기로 한 영국군이지만 선박이 부족했다. 프랑스 해군, 벨기에, 네덜란드 해군[5]에게 협조 요청을 해서 선박을 있는 대로 긁어모아봤으나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영국 정부는 선박 징발령을 내렸는데, 당초 예상보다 더 많은 선박들이 몰려왔다.<rowcolor=white> 당시 모습을 묘사한 그림 |
<rowcolor=white> 라이톨러 중령의 선다우너호 |
"이건 진짜 전쟁입니다. 총알이 날아다니는 진짜 전쟁이에요."
하고 말리는 관구 사령관에게 소형 선박을 몰고 온 한 선주가 하고는 배를 몰고 갔다는 에피소드까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영국은 무려 약 900여 척의 대규모 철수 선단을 확보했는데 그 중의 핵심 전력은 누가 뭐라 해도 속도가 빠른 220여 척의 해군 구축함들이었다.그동안 서부 전선에서 온갖 굴욕을 당한 영국 공군도 반격의 칼날을 뽑아들었다. 영국 공군의 투입 가능한 전투기가 총동원되어 됭케르크와 영불 해협의 제공권을 장악하기로 계획했으며, 비장의 신예기인 스핏파이어도 출격을 기다렸다. 프랑스는 지상에서의 반격을 통한 포위망 돌파를 뒤늦게 포기하고, 영국 측에 자국군도 데리고 가달라고 요청하면서 지휘권 문제도 해결되었으며, 프랑스 육군 2개 사단이 후위를 맡아 필사적인 지연 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한편, 독일은 지상에서의 공세를 강화하는 가운데, 대대적인 항공 작전을 준비했다.
5. 작전 진행
영국군은 첫 2일 동안 45,000명을 탈출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나, 정작 그동안 탈출시킨 인원은 30,000명도 채 안 되면서 영국군 지휘부는 절망감에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 직후부터 폭풍치던 영불 해협이 갑자기 고요해지는 기적이 일어나면서 철수 작전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당연히 독일군은 이를 방치하지 않았다. 폭격항공단 KG 1, KG 2, KG 3, KG 4, 그리고 KG 54에 소속된 Ju87, Ju 88, He 111 등 폭격기를 대거 투입하여 됭케르크 해안의 병력들과 철수 선단에 무차별 공격을 쏟아부었다. 또한 독일 공군은 해안가의 항구 시설도 폭격했고, 이 과정에서 물탱크가 파괴당하면서 작전 내내 항구에서 일어난 화재에 대한 대응이 어려워지기도 했다.그러나 작전 기간 영불 해협의 구름이 짙게 드리우면서 철수하는 선단에 대한 정확한 공격이 어려웠고 자신들의 폭격으로 발생한 화재는 독일공군의 작전 집중도를 방해했으며, 무엇보다 본토의 기지에서 발진하여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도전해오는 영국 공군에 맞서 힘겨운 사투를 벌여야 했다. 영국 조종사들은 독일 폭격기들을 저지하기 위해 밥 먹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출격했고, 연료가 간당간당해질 때까지 싸우며 됭케르크의 대학살을 막아냈다.당시 됭케르크 전투에서의 양측 항공력의 충돌은 영국 본토 항공전의 서곡이었다. 이 항공전을 영화화한 <Battle of Britain>(국내에서는 <공군 대전략>으로 소개) 은 철수 작전이 끝난 됭케르크를 배경으로 스토리가 시작된다.
5월 29일부터의 기상 변화로 영국군은 훨씬 양호한 상태에서 작전이 가능해졌다. 항구뿐만 아니라 해변에서도 탈출 병력의 승선이 가능해졌고, 바다가 고요해지면서 탈출선들의 항해 속도도 빨라졌다. 어느 귀족의 보트는 정원의 30배가 넘는 사람들을 태우고 무사히 도착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때 흘수선이 갑판까지 올라오는, 말 그대로 가라앉기 직전까지 갔다고. 어떤 선박은 해안에 지나치게 접근하다 모래톱에 걸려 좌초되자 오히려 그걸 역이용, 다른 선박을 접현시켜 안전하게 승선시키는 마치 임시 부두 같은 역할을 맡기도 했다. 5월 31일과 6월 1일에 걸쳐 병력 철수는 최고조에 달했고, 이후 후위부대들의 철수가 이루어지다가 6월 4일을 기해 작전은 종료되었다.
6. 작전 결과
6.1. 철수작전은 성공
작전 기간 철수 병력 통계 | |
5월 27일 | 7,669명 |
5월 28일 | 17,804명 |
5월 29일 | 47,310명 |
5월 30일 | 53,823명 |
5월 31일 | 68,014명 |
6월 1일 | 64,429명 |
6월 2일 | 26,256명 |
6월 3일 | 26,746명 |
6월 4일 | 26,175명 |
총 합 | 338,226명 |
이는 가장 큰 성과로써 전시에 그것도 300,000명이나 되는 전문 직업군인[8]들을 성공적으로 탈출시킨 것이다. 전쟁이 아무리 첨단화되어도 결국 사람 손에 결정되기에 전투경험이 많은 군인들은 필수적인데[9], 이러한 인적자원을 한 번의 철수작전으로 상당수 지켜냈다는 것 자체가 연합국에게는 고무적이었다. 이들은 훗날 북아프리카 전선부터 노르망디를 거쳐 독일까지 진격하게 된다.
6.2. 프랑스군의 후방 사수
이렇게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프랑스 육군 후방 사수 부대는 독일군 800,000명의 진격을 저지하며 됭케르크 철수작전의 성공에 큰 공헌을 했다. 이들은 프랑스 육군 제12기계화보병사단, 제68, 21, 32, 60보병사단들의 예하 부대 및 제8주아브 연대였다.후방 사수를 맡았던 이들은 철수작전이 끝날 때까지 진지를 사수했고, 최후의 부대까지 해협을 건너 도피하는데 성공하는 것을 본 후, 군기가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독일군에 항복했다. 이렇게 된 프랑스 육군 병력은 34,000명에 달했다. 이들의 엄호가 아니었으면 철수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됭케르크 철수에서 이들의 맹활약은 상대적으로 묻히고 있다.[10]
6.3. 연합군의 손실
냉정하게 보면 철수가 완전한 성공은 아니었다. 단기적으로는 서부 전선 전황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해 프랑스는 결국 항복했다. 철수 병력은 대부분의 장비를 버리고 와야 했다. 각종 차량, 화포 등은 물론이고 소총이나 기관단총 같은 개인화기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거기다 이 장비들을 파괴하고 처분할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독일군에게 고스란히 노획되기까지 했다.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영국군이 버리고 온 무기는 8~10개 사단을 무장시키는 데 충분한 양이었다. 페도어 폰 보크 육군 상급대장은 자신의 일기에'무수한 차량들, 야포, 전차와 각종 지상군 장비들이 좁디좁은 공간에 밀집해 있었으며, 서로 뒤엉켜 폐기물 처리장을 방불케 했다 (중략) 여기 버려진 물자는 족히 1개 야전군 분량은 되었으며 적들의 장비는 훌륭하고 완벽해서 너무나 빈약한 장비를 가진 우리들의 시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후략)
라고 썼다.영국군이 버리고 간 장비는 막대한 분량의 식량과 피복, 탄약, 야포 880문, 대구경포 310문, 대공포 500문, 대전차포 850문, 기관총 11,000정, 전차와 장갑차량 475대, 오토바이 20,000대, 그리고 차량 약 63,000대 등이었다.[11] 이때 영국 본토에는 오직 2개 사단을 무장시키는 데나 충분한 장비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철수에 성공한 병력들은 사실상 빈털털이 상태에서 재무장을 시작해야 했으나 당시 영국의 산업력으로는 당장 쳐들어올 독일 공군에 맞설 전투기를 뽑기에도 벅찬 상황이었으며, 재무장을 하기 위해 긁어모아 보니 너무 적은 무기였기에 영국 정부는 어떻게든 무장할 수단을 만들기 위해 고민끝에 만들어진 것이 스텐 기관단총이었다. 이들의 재무장은 결국 스텐 기관단총과 리엔필드 소총, 그리고 미국이 장비지원을 하는 걸로 해결했다. 덕분에 영국군은 1942년까지 북아프리카 전역에 호주군 및 뉴질랜드군을 투입해야 했다. 대신 철수에 성공한 병력은 1943년부터 연합군 반격의 선봉이 된다.
작전 기간 동안 철수 선단은 구축함 13척, 대형 선박 9척, 그리고 소형 선박 200여 척 등, 총 272척이 침몰 및 파괴되는 비교적 가벼운 피해를 입었다. 이는 기상 조건 때문이기도 했지만 영국 공군의 결사적인 반격과 엄호 덕분이기도 했다.
영국 공군은 작전 기간 동안 총 4,822 소티[12]를 띄워 무려 177기의 전투기의 손실을 입어야 했다. 프랑스 항복까지 영국이 서부 전선에서 입은 전투기 총 손실이 432기이다. 전체 손실의 40%를 됭케르크 철수 작전에서 잃은 것이다. 곧 있을 영국 본토 항공전을 생각하면 엄청난 전력 손실이었으나 독일이 프랑스를 먼저 공략하는 동안 필사적으로 전투기를 뽑아내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출 수 있었다. 됭케르크에서 영국 공군이 보여준 투혼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Ju 87에게 신나게 두들겨맞은 지상군 병력은 오히려 '공군 놈들은 독일 놈들이 폭격하고 있는데 어디서 뭐하는거냐'면서 공군을 비난했다. [13] 이런 반응이 나왔던 것은 공중전 자체가 철수 작전이 진행중인 해안가와 좀 떨어진 곳에서 전개되고 있었으며 영국 본토 항공전을 위해 영국 정부도 공세보다 철수작전을 돕는 선에서만 투입했기에 정작 상공에서는 영국공군 전투기를 거의 볼 수 없었기 때문으로, 그 결과 격추당한 조종사들이 철수 병력 대열에 합류하면 그야말로 싸늘한 시선에 푸대접을 받았다.
이 작전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명전투기로 꼽히는 스핏파이어와 Bf109가 처음으로 맞대결을 벌였으며 조종사들은 드디어 "호적수"를 만났다는 반응과 함께 서로 상대편 전투기를 칭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더불어 영국 공군에서 투입한 전투기 디파이언트가 후방부 터렛형 무장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여 많은 독일 공군 조종사들을 당황하게 만들면서 기대 이상의 전과를 올렸다.
6.3.1. 보름호우트 학살
자칫 전원이 몰살당할 뻔했지만, 아우구스투스 제닝스(Augustus Jennings) 원사(Warrent officer class 2)와 스탠리 무어(Stanly Moore) 중사가 헛간에 투척된 수류탄 몇 개를 몸으로 막아내어 여러 생존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파헤이 일병의 경우도 그 두 부사관들의 영웅적인 희생으로 생존한 경우였다. 그는 폭발 이후 독일군에 의해 끌려나와 가슴에 총을 맞았지만 다행히 즉사하지는 않았고, SS 부대가 확인 사살을 하지 않은채 헛간에 공격을 재차 퍼부은 후 곧 자리를 떠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편 헛간 안에도 몇 명이 기적적으로 살아 있었는데, 그들 중 알프레드 툼스(Alfred Tombs) 일병을 포함한 4명은 SS가 물러간 후 헛간을 탈출하여 다른 독일군에 포로로 잡힘으로써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파헤이 일병과 남은 생존자들은 약 2일간 헛간에서 버티다가 근처를 지나던 독일군 부대에 구조되었다.
또다른 생존자로는 버트 에반스(Bert Evans) 일병이 있다. 그는 수류탄이 터졌을 때 오른손이 박살났지만 살아남았고, 폭발 속에서도 다친 곳 없이 멀쩡했던 제임스 린앨런(James Lynn-Allen) 대위가 그를 헛간 밖으로 끌어내어 같이 포복으로 탈출했다. 그들은 수십m 가량을 기어 근처 연못에 숨어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불행히도 그곳에서 독일군 병사 한 명을 마주치고 말았다. 결국 앨런 대위는 그 독일군 병사가 쏜 두 발의 총탄을 맞고 즉사했다. 에반스 일병 또한 두 발을 맞았지만 치명상을 입었을 뿐 죽지는 않았다. 그는 근처 농가로 500m 가량을 기어갔고, 그곳에서 만난 한 독일군 장교가 그를 야전 병원으로 직접 데려다주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
7. 작전 이후
우리는 항복하거나 패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프랑스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바다와 대양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감과 힘을 길러 하늘에서 싸울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의 땅을 지켜 낼 것입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상륙지점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판과 거리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언덕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15]
We shall not flag or fail. We shall go on to the end. We shall fight in France, we shall fight on the seas and oceans, we shall fight with growing confidence and growing strength in the air, we shall defend our island, whatever the cost may be. We shall fight on the beaches, we shall fight on the landing grounds, we shall fight in the fields and in the streets, we shall fight in the hills, we shall never surrender![16]
윈스턴 처칠,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됭케르크 철수, 엄밀히 말해서는 철수 후에 다시 프랑스로 상륙해서 프랑스군을 돕지 않은 것을 영국의 배반이라며 격분했는데, 항복 직후 영국 해군이 캐터펄트 작전으로 메르크 엘 케비르 공격을 감행, 자국 함대를 박살내면서 이런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북아프리카에 미군이 상륙해 프랑스군과 교전하자 "영국놈들이 머저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당신들은 다르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영국놈들하고 같은 짓을 할 줄은 몰랐군!"라면서 까댔으며, 비시 프랑스 군대 중에는 연합군과 죽자살자 교전한 부대도 나왔을 정도였다.[17]We shall not flag or fail. We shall go on to the end. We shall fight in France, we shall fight on the seas and oceans, we shall fight with growing confidence and growing strength in the air, we shall defend our island, whatever the cost may be. We shall fight on the beaches, we shall fight on the landing grounds, we shall fight in the fields and in the streets, we shall fight in the hills, we shall never surrender![16]
윈스턴 처칠,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본 작전에서는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던 크릭스마리네도 덩달아 쏠쏠한 부수입을 챙겼는데, 영국 원정군이 버리고 간 수많은 물자들 중 하나로 미사용 신품 상태로 대량 노획된 영국 육군 전투복(Battle Dress)이 그것이었다. 육군 기준에선 쓰기는 양이 적고 피아 식별 문제도 큰데다 버리기는 양이 많아서 애매하던 전투복들 중 하계용을 해군이 가져다가 약간 개조하여 U보트 승조원들의 함상 작업복으로 지급했는데, 이게 생각보다 대박을 친 것이다. 밑단이 짧아 걸리적거리지도 않고, 갈색 계열의 색상은 기름때 등을 잘 가려 줬으며, 면의 일종인 데님은 덥고 습한 잠수함에서 기존의 모직보다 덜 덥고 잘 마르는데다 작업복에 적합하게 질겼기 때문이다. 서로 얼굴 보고 싸울 일도 없는 대잠전 특성상 피아식별 문제도 없었다. 거기에 더해 전용 피복을 받았다는 점이 이들로 하여금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자부심도 심어 주었다. 이런 호평에 놀란 해군 지휘부는 노획품이 소진되자 비슷한 디자인의 보다 개량된 잠수함 작업복을 자체생산하여 종전시까지 지급해주었다.
2023년 8월 10일, 본 작전에 참전했던 영국 해군 중 마지막 생존자인 로런스 처처 옹(1920~2023)이 향년 102세로 사망했다. #
8. 만약 됭케르크 철수작전이 실패했다면?
8.1. 군사적 측면
만약 나치군이 오판하지 않고 그대로 진격하여 됭케르크를 함락시키고, 이후 여러 가지 운이 겹쳐 나치가 프랑스 지역에 남은 영국군 30만 대군과 프랑스군 등을 전멸시켰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사학계에서도 말이 많은 부분 중 하나다. 나치는 무려 세 번이나[18] 망설였고, 만약 한 번이라도 결단을 내렸다면 철수군은 전멸했거나 혹은 소수만 빠져나가고 나머지는 궤멸되었을 것이다.그러나 전반적으로 전세를 보았을 때, 영국이 크게 불리해지기는 하지만 전쟁의 전개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론이다. 영국이 군사력을 몰빵한 건 육군이 아니라 해군이며, 영국은 도버 해협을 건너야 하는 섬나라이다. 이에 독일은 항복을 권고했으나 처칠은 이를 씹어버리면서 영국 본토 항공전이 발발한다. 나치 독일은 영국의 무기생산체제와 각종 인프라를 파괴한 뒤 바다사자 작전을 통해 제해권을 장악한 뒤 사실상 무장이 빈약한 영국 육군은 상대가 안 되니 영국 본토에 상륙만 한다면 승리는 눈앞이었다. 그러나 영국 해군은 식민지쪽 방위를 거진 포기한 뒤 영국 본토에 전력을 집결시켰기에 비대칭 전력 유보트가 메인 전력에 영국 해군에 비하면 규모가 비교도 안되는 나치 크릭스마리네쯤은 바다에서 차단할 역량이 충분했다. 심지어 이때 크릭스마리네는 노르웨이에서 영국 해군에게 다수의 구축함이 터지면서 1939년보다 약해지면 약해졌지 보강된 상태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독일은 딱히 해상전력 강화에 크게 관심이 있던 것도 아니었으며 그럴 역량도 부족했다. 오죽 했으면 이후 프랑스와의 휴전협정에서 프랑스의 해군력을 따로 요구하지도 않았다.[19] 게다가 영국 공군은 본토에서 출격하기에 기체를 잃어도 영국 본토에 낙하만 한다면 생존이 가능했으므로 귀중한 파일럿을 지킬 수 있었다. 따라서 제아무리 나치 독일이라도 공군과 해군을 꺾는 마법은 부릴 수 없었다.
물론 영국과 독일 양측 다 상륙 역량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에 서부전선/대 영국 전선이 당분간 잠잠하리라는 것은 확실하고, 독소전이 더 독일에게 유리하게 전개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독일이 진격해야 하는 땅은 나치 독일이 폴란드 침공 이래 이제까지 삼킨 모든 땅을 다 합친 것보다도 넓었고, 독일이 좀 더 우세권을 잡는 일은 가능해도 결국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소련 땅에서 민사작전을 잘해도 모자랄 판에 완벽하게 그 반대로 행동했으니 더욱 그렇다.
게다가 미국의 참전은 독일이 아닌 일본이 일으킨 일이다. 물론 히틀러가 일본이 소련전선을 도와줄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품고 제멋대로 미국에 선전포고를 날려버렸으니 서부전선 개전은 히틀러의 오판이 있기도 하다. 다만 뭔가 상식을 초월하는 엄청난 나비효과로 인해 됭케르크의 성공 이후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됭케르크 정도가 아니고 바다사자 작전을 성공시켜서 영국 본토까지 독일이 집어삼켰을지 모른다.
물론 이건 전쟁의 전반적인 흐름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고, 깊게 파고든다면 영국 입장에선 승전국은 승전국인데 프랑스와 다를 바 없는 국가가 되거나, UN이 영국과 프랑스 등 주요 국가는 빠진 채 미국와 소련의 주도로 세워지거나 아예 안 세워졌을 확률도 있다. 무엇보다 동맹국들 중 미국은 영국에서 독립한 식민국이고,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임을 생각한다면 승전국 중 가장 큰 활약을 한 두 국가의 압력으로 전후 프랑스처럼 식민지에 대한 통치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이빨빠진 사자가 되었을 확률이 높다. 디에프 상륙 작전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영국이 이만큼 본토의 병력이 있었기 때문에 아프리카 전역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전투,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위시한 서부전선의 한 축을 담당해 승전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었고, 그 힘으로 지브롤터와 홍콩, 남아프리카 공화국, 버마, 인도, 이집트와 몰타방면 및 포클랜드 등 여러 식민지등을 80년대까지 지킬 수 있었다.
거기다 2차대전에서 사망한 영국군의 수가 약 30만 정도이다. 물론 싱가포르, 홍콩, 뉴기니 등 해외 영국령 군인 사망자 숫자 포함이지만 반대로 말해서 저 30만명의 군인을 온존하지 못했다면 영국 입장에선 최악의 경우 1차대전 프랑스마냥 한 세대의 전멸도 각오해야 했을 것이다.
8.2. 정치적 측면
그러나 위의 내용들은 정치를 무시하고 어디까지나 군사적인 시나리오만 이야기하고 있다. 군사적으로야 영국 원정군 30만이 섬멸당하더라도 독일군이 해협 건너 영국을 지상군으로 공격할 방법이 마땅찮았던 게 사실이다. 문제는 이 시기 영국 정부가 우리가 알고 있던 것처럼 일치단결하여 대독전쟁을 결의하던 정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 영국 전시내각은 총리 처칠을 필두로 한 강경 대독항전파와 외무장관 핼리팩스를 필두로 한 온건 대독협상파가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었다. 위키피디아의 1940년 영국 전시내각 위기 항목상황을 이해하려면, 먼저 처칠의 정치적 입지를 이해하고 나아가 처칠이 총리가 된 날인 5월 10일과 됭케르크 철수가 시작되던 5월 하순의 상황을 비교해야 한다.
일단 처칠 본인의 정치적 입지는 결코 강한 것이 아니었다. 갈리폴리 실패 이후 처칠은 입지가 매우 약했고 대다수 정치인으로부터 한물간 사람 취급받다가 나치의 부상과 함께 재평가받고 전쟁이 터지면서 부활한 것이다. 보수당 내 강경파는 처칠을 지지했으나 그렇다고 처칠이 확고부동한 자기세력을 구축한 것도 아니었고 주류의 폭넓은 지지를 받는 인물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럼에도 처칠이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건, 노르웨이 전역의 실패 책임으로 체임벌린이 실각한 데다, 노동당이 체임벌린 안 내려오면 전시내각 참여 안하겠다는 비토를 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5월 초순의 전황은 그냥 노르웨이 전역에서만 졌을 뿐이었다. 영프 연합군이 제대로 각잡고 독일과 한판 싸워보자! 이것이 처칠이 총리가 된 시점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하필 그 날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었다.
다시 됭케르크 철수작전 시점으로 와서 전황을 점검하면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분명 처칠이 총리가 될 때만 해도, 독일과 제대로 한 판 떠보자!던 강경파의 주장이 득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과 보름여만에 영프연합군은 그냥 독일군에게 박살이 나 버렸고, 전황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 전면적인 패전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 강경파들의 목소리는 다시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고, 온건파들은 전쟁은 끝났다, 프랑스는 졌으니 어서 대독강화협상을 추진하여 패한 전쟁을 조기에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수습하자고 주장한다. 여기에 군부가 제출한 보고서가 불에 기름을 부었는데, 군부는 영독간 항공전력비를 1:4로 보았고 이런 절망적인 전력비로는 독일 항공세력에 의해 영국 해상 세력이 축출될 것을 우려했다.[20] 이 시나리오대로라면 영국의 압도적 해상력은 독일의 압도적 항공력에 의해 괴멸당하고 독일군은 퉁퉁배 어선을 타고도 안전하게 해협을 건너 영국 땅에 상륙할 수 있다는 이치였다.
5월 25일에서 27일에 걸쳐 연속으로 개최된 전시내각회의는 양측의 충돌이 극에 달하던 상황이었다. 계기는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연락이었는데, 루스벨트는 프랑스 정부가 이탈리아를 통한 대독강화협상 중재를 요청했음을 영국에 알려온 것이다. 당시 상황은 미국이 중립, 영국과 프랑스는 상호동맹이었는데, 프랑스는 동맹 영국이 아닌 우호적 중립국인 미국에 먼저 이 사실을 알린 것이다. 당연히 영국은 프랑스가 확실하게 패전+동맹에서 이탈하고 자력갱생하려 한다고 판단했고 이를 계기로 온건파의 수장 핼리팩스는 프랑스의 의견에 동조하여 독일에 우호적인 중립국 이탈리아에 중재를 요청하자는 주장을 강력히 하고 있었다.[21] 그리고 전황의 불리+본인 계파의 부재 등으로 인해 위상이 낮아진 처칠 본인마저 협상에 동의는 못해도 일단 창구는 열고 말이나 터보자는 데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결국 5월 26일, 처칠은 독일의 중부유럽 패권을 인정하고 베르사유 조약으로 뺏은 독일의 기존 아프리카 식민지를 반환하는 정도로 이탈리아에 대독협상의 중재를 요청(그리고 이탈리아에게도 중재 대가로 아프리카 식민지 일부를 추가로 포기)하는 것에 동의해야만 했다.[22]
바로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됭케르크 철수작전이 시작된 것이고, 끝내 성공했기에 처칠이 핼리팩스 등 협상파와의 정치적 투쟁에서 승리하고 대독항전을 지속할 원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점이 됭케르크 철수작전이 매우 중요한 이유이다. 영국이 독일과의 강화를 포기하고 전쟁을 지속하기로 결의한 결정적인 지점이었던 것이다.
이 측면에서 볼 때 만약 됭케르크 철수작전이 실패로 끝났다고 가정해도 처칠이 협상파와의 정치 투쟁에서는 승리할 수 있었을지도 미지수이다. 설령 총리직은 지켰더라도 협상파의 압력에 굴복해 대독강화협상을 시작했을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처칠 본인이 실각하고 보수당의 협상파 정치인이 총리에 올라 대독협상을 추진했을 수도 있다.
9. 덩케르크 잭
전쟁이 끝난 뒤인 1965년 됭케르크 철수작전에 참가한 민간 선박 선주들의 모임인 덩케르크 작은 배들 협회(The Association of Dunkirk Little Ships)#가 생겼는데 여기서 됭케르크 철수작전에 참가한 배들은 성 조지의 십자가를 선수기(Jack)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영국 정부로부터 받았다. 보통은 이를 살짝 변형해 성 조지의 십자가와 됭케르크의 문장(Coat of Arms)을 합쳐서 만든 덩케르크 잭(Dunkirk Jack)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일종의 훈장 같은 의미이다. 이 단체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영불해협을 건너는 행사를 하는데 이 행사에 참가하는 배들은 모두 이 깃발을 단다.[23]
국내에선 《알기 쉬운 세계 제2차대전사》에서 이 이야기를 와전시켜 "됭케르크 철수작전에 참가한 배들은 총기함에만 달수 있는 성 조지의 깃발을 달고 작전에 참가했다." 고 서술하는 바람에 사실이 잘못 알려졌다. 저 깃발을 달 수 있는 권한이 인정된 것은 1967년의 일이다. 총기함에만 성 조지의 깃발을 달 수 있다는 것도 엄밀히는 좀 오류. 군함에 승선한 최고 지휘관에 따라 지휘 깃발을 다르게 거는데, 영국 최고 함대 지휘관인 Admirals of the Fleet의 경우 유니언잭을 단다. 성 조지의 십자가기는 일반 제독(Admirals)이 승선시 다는 깃발이다. 기함이라도 제독이 안 타면 못달고, 기함 아니라도 제독이 타면 지휘 깃발을 단다.
그럼 됭케르크 작전 때는 어떤 깃발을 달았냐면 당연히 영국배들이 항상 하던대로 군함은 White Ensign, 정부 공인 선박은 Blue Ensign, 민간선박은 Red Ensign을 달았다.[24] 물론 민간 선박에 지휘깃발은 달지 않았다. 영화 <덩케르크>를 보면 아주 잘 나와있다. 참고로 이 영화에서 비중있게 나오는 문스톤 호는 Blue Ensign을 달았는데 이것은 이 배의 정장인 도슨이 왕립 요트 협회의 회원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여담으로, 선수기를 달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 것은 선주가 아니라 선박이라 배가 팔릴 경우 선수기를 달 수 있는 권한도 새 소유자에게 이전된다. 영화 <덩케르크>에서는 실제 됭케르크 철수작전에 참가한 선박 12척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10. 창작물에서의 등장
-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김모세 병장이 하늘에 기도를 올리자 허경영이 나타나 바다를 가르는 기적이 일어난다.(여기까지는 웹 연재본) 출판본에서는 나아가 운하를 세우는 기적이 일어난다. 그로 인해 연합군은 운하를 타고 철수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작가의 정치적 성향을 고려하면 한반도 대운하와 4대강 사업의 패러디인 것으로 보인다.
- 겁스 무한세계에 나오는 세계 중 하나인 라이히-1에서는 독일이 됭게르크에서 영국의 철수를 막아 영국을 무찌르는데 성공하고 소련까지 격파했으며 미국은 이를 무시하고 일본을 공격하여 최종적으로 미독 양국 간에 전쟁이 벌어졌으나 북대서양에서 결국 전선이 교착된다.
- 《테메레르 시리즈》에서는 이를 패러디한 철수작전이 나오는데 《테메레르》 시리즈가 나폴레옹 전쟁 시절을 다루다보니 상황이 정반대로 프랑스 제국군으로 부터 독일군을 영국군이 철수시켜주는 작전으로 등장한다.
- 카를로 젠의 1, 2차 세계대전의 재구성 소설인 《유녀전기》에서 약간 다르긴 하지만 됭게르크 철수작전과 비슷한 경우가 나온다. 군 수뇌부가 안일한 선택을 해 적의 전력을 놓아주었고, 주인공은 완벽한 승리를 쟁취할 기회였다며 분통을 터트린다. 이 때 배경으로 보아 프랑스가 모티브인 공화국 군대는 일부 전함들까지 몰고 탈출에 성공했으며, 영국이 모티브인 왕국 함대의 엄호로 인해 제국군 수뇌부는 해군을 동원한 추격을 포기한다.
- 2007년, 조 라이트 감독의 영화 <어톤먼트>에 이 됭케르크 철수 작전이 나온다. 그 중 도입부의 5분 간의 롱테이크씬은 가히 압권. 참고로 이 씬에서 영국 파견군 패잔병들이 부르는 찬송가의 제목은 <Dear Lord and Father of Mankind>이다.
- 2015년 12월 29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차기작이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다룬다고 워너 브라더스에서 공식 발표했으며, 2017년 7월에 <덩케르크>라는 이름으로 개봉했다. 국내에서는 2017년 7월 20일 개봉.
- 2017년 6월부터 <워게이밍>에서 해당 영화 개봉 기념으로 영화 홍보를 시작한 데 이어서#, 같은 해 7월에 육해공 컬래버레이션을 시작했다. 다이나모 작전에 관련된 영상을 많이 올리기는 했으나, 정작 메인인 이벤트의 내용은 애매한 느낌이다. PC 월탱은 북미서버에서 언제나 진행하던 Tankreward 이벤트고, 월탱 콘솔판에서는 3티어 골탱 셋 중 하나를 받는 이벤트와, 5티어가 되면서 엔진 마력이 올라간 풀업 마틸다랑, 20파운더 A바렐 달린 채리어티어를 골탱으로 묶어파는 패키지 판매가 같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워플레인은 덩케르크 컨셉의 프리미엄 기체 2종을 받을 수 있는 미션이 진행되는 정도, 그나마 철수작전 PVE 시나리오모드 '다이나모 작전'[25]을 진행하는 워쉽 쪽이 그럴싸하다.
- <월드 오브 탱크 블리츠>에서 <덩케르크> 영화 개봉 기념으로 4.0.0 업데이트때 "덩케르크" 위장을 추가했다.
- 알파캣이 월드 오브 워쉽에 연재하는 폭풍의 바다에 2연작으로 연재되었다.
[폭풍의 바다] 9화 - 덩케르크(상)
[폭풍의 바다] 10화 - 덩케르크(하)
- 2017년에 제작된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선 배우 게리 올드만이 됭케르크 철수작전 당시의 윈스턴 처칠을 연기했고, 75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과 9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 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는 히틀러가 영국군들이 버리고 간 장비와 영국군의 시신을 보면서 영국군이 패잔병들의 모습을 보고 사기를 잃을거라 생각하고 일부러 보내줬다고 허세를 부린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
- 헬싱 외전 편에서는 나치가 구울 연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원탁에 있던 한 인물이 만약 이 괴물이 군대화 되어서 투입되면 다시한번 됭케르크 바다에 빠지게 될 것이고, 더 이상 노르망디를 할 힘이 없게 되며, 전세는 다시 독일에게 역전된다고 말한다.
- 에이스 컴뱃 제로 The Belkan War의 8번 미션은 작전명이 "다이나모"이다. 작전명만 같은 게 아니라 임무 최종 목표가 무사히 도망쳐나오는 것이라서 현실의 됭케르크 철수 작전에서 모티브를 많이 따온 것으로 추정한다.
[1] 작전암호명(code name)은 Operation Dynamo. '됭케르크의 기적(Miracle of Dunkirk)'으로 칭하기도 한다.[2] 파리 근교 불로뉴가 아니다.[3] 물론 말 그대로 일설에 불과한 게 히틀러를 찬양하는 편지를 롬멜은 계속해서 보냈었다. 사료적으로 롬멜이 직접 히틀러에게 의문을 표한 것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히틀러가 후퇴를 반대하고 나서부터였다.[4] Jean-Marie Charles Abrial. 프랑스 항복 이후 비시 프랑스의 해군장관을 맡았다가 종전 후 10년간 강제노역형을 받았으나, 1947년에 가석방되었고, 1954년에 완전히 사면되었다. 1962년 사망.[5] 네덜란드령 동인도 등 해외 식민지가 꽤 남아 있었고, 해운업이 발달한 네덜란드는 국가 규모 대비 해군력이 매우 강력했다. 전쟁 초반 대다수의 해군 함정과 해군 항공대, 상선단이 영국으로 망명해 왔을 때, 영국에서 이들을 대환영했다.[6] 어째서 대령이 중령을 존대하는지는 <덩케르크(영화)> 문서 참고.[7] 영화 <타이타닉>에서 배가 침몰할 때 승객들이 혼란에 빠지자 빈 총을 겨누며 제지하는 항해사가 라이톨러이다.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다룬 영화 <덩케르크>에서도 도슨(Dawson) 선장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담당 배우는 마크 라이런스. 이후 1952년 그레이트 스모그로 인한 급성 심장마비로 사망했다.[8] 영국은 예나 지금이나 징병이 아닌 모병제 국가로써 전시에만 추가로 상비군과 예비군을 따로 뽑아 모집한다. 그렇기에 영국은 당시 영토에 비해 군인수는 적었지만 징병제이던 독일, 소련과 달리 수년간 훈련을 받은 엄청난 정예부대였다.[9] 멀리 안 가고 독일 공군과 일본 해군 항공대가 초반의 명성에 비해 후반에 어떠한 대접을 받았는지 생각하면 이러한 인적자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준다.[10] 이는 프랑스 침공 당시 보여주었던 프랑스군의 졸전 임팩트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지금도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제2차 세계대전 프랑스군의 굴욕이 밀리터리와 역사 관련 놀림소재로서 쓰이고 있는 걸 보면 더욱 그렇다.[11] 《폭풍 속의 씨앗》을 보면 작가와 동료가 프랑스제 트럭과 영국제 오토바이를 모는 내용이 있다. 실제로 당시에는 물론 1차 대전에 비해 차량의 보편화가 실행되었다곤 하나 아직까지도 차는 중산층 이상이 모는 사치품 내지는 고급물자였다. 심지어 이는 군대에도 해당되어 기계화의 상징이라던 독일군도 보병의 완전 기동화는 실패하여 패망 직전까지 대부분의 군사들은 야전에서 걷거나 마차를 타고 다녔다. 유일하게 전군에 자동차가 풍족하게 지급된 국가는 미국이었고, 소련 역시 차량화 비율이 전쟁 말기로 가며 상당히 높아졌지만, 이 역시 미국의 랜드리스로 트럭이나 지프 등을 원조받았고, 또 독소전쟁에서 사람이 너무 많이 죽어 편제대비 실제 가용가능 병력이 적었기 때문에 가능했다.[12] 단독 출격 횟수. 전투기의 총량이 아니라 출격 횟수이다.[13] <덩케르크(영화)>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병사 한 명이 공군은 대체 어딨냐며 화를 낸다. 다만 작중 후반에선 공군 전투기가 병사들 바로 위를 지나가며 공중전을 벌이고, 이를 보고 환호하는 병사들이 나온다.[14] 다만 미리 눈치를 챈 5명은 다행히도 헛간의 뒷문으로 탈출에 성공했고, 근처 민가에서 다른 독일군에게 다시 잡혀 전쟁 끝날 때까지 포로 생활을 해야 했다.[15] 전장의 무대를 프랑스, 바다, 하늘, 해변, 상륙지점, 들판과 거리, 언덕으로 옮겨가며 설령 영국이 계속 패배해서 독일군이 영국본토에 상륙하더라도 항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는 생략되었으나, 뒤에 자신은 그럴 가능성은 믿지 않으나, 만에 하나 영국본토가 점령되더라도, 대영제국의 식민지에서 함대와 함께 계속해서 항전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 비장미로 인해서 굉장히 많이 회자되는 연설이다.[16] 영화 덩케르크에서도 마지막 장면에 나온다.[17] 상반된 평가로는 대체로 프랑스군의 졸전과 전력을 제대로 운용하지도 못한 지휘부가 주로 까이고, 캐터펄트 작전이나 횃불 작전은 당시 연합군의 상황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는 평가가 있다. 애초에 캐터펄트 작전을 영국의 배신이라고 보는 관점 자체가 지나치게 프랑스 입장에서만 본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하고 친독적인 비시 프랑스가 성립된 이상 영국(연합군)의 입장에서 보면 프랑스의 군사적 자산이 곧 적국인 독일의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는 데 사용될 것이라고 예측할 수 밖에 없다. 세상에 어떤 정신나간 군대가 전쟁 중에 적군이 강해지도록 가만히 내버려둔단 말인가. 더구나 섬나라라는 특성상 해상 교통에 의존해야 하는 영국의 입장에서 독일의 해군력 강화는 곧 자국의 파멸로 다가가는 일보였다는 점 역시 감안해야 할 것. 당시 프랑스 해군이 영국에 굴복하여 배를 넘기거나 아니면 격침이라는 '어딜 봐도 답이 안 보이는' 선택을 강요당했다고 말하는 경우도 많지만, 영국 입장에서는 이 둘 중 하나가 아니면 남은 선택지는 '독일로 배가 넘어가는 것' 뿐이었다. 프랑스 해군에서는 프랑스의 군함을 영국에게 넘길 수는 없다고 분개했지만 그 프랑스가 항복해서 비시 프랑스가 된 이상 영국 입장에서 보면 비시 프랑스=독일의 동맹국(=괴뢰국)이므로 프랑스 군함=적함이 되어버린다는 것. 결국 프랑스 해군이 어떻게든 알아서 혼자 살아남지 못하는 이상, 다른 답은 없었던 셈이다.[18] 23일, 25일, 28일.[19] 물론 전쟁 후반기에는 결국 독일도 프랑스 함대를 욕심내 툴롱 프랑스 함대 자침사건이 있었지만, 이때에도 해당 프랑스 함선을 제대로 운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분분하다. 오히려 영국 쪽이 먼저 지레 겁을 먹고 프랑스 해군에 선빵을 날렸고그 덕에 비시 프랑스로부터 단교당한다.[20] 물론 후대에나 알려진 사실이지만, 양국간 항공전력비는 1:4와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21] 이탈리아는 약 보름 후인 6월 10일에야 영프에 선전포고하고 정식으로 참전한다.[22] 물론 처칠은 진심으로 강화협상에 찬성한 건 아니고, 협상파의 강력한 압박에 밀려 일시적으로 후퇴한 것이다.[23] 2020년에도 계획되었는데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2021년으로 연기되었다가 취소되었다.[24] 좌상단에 공통적으로 유니언잭이 있고, 바탕이 하얀색, 파란색, 빨간색으로 다르다. Blue Ensign은 영국 왕립 요트 클럽에 소속된 배와 영국 해군 예비군 장교가 지휘하는 배 등에 한해서 달 수 있다.[25] 적군의 기뢰와 항공기를 돌파하며 병력들을 철수시키는 것이 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