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데리쿠스 II 작전 독일어: Unternehmen Fridericus 영어: Operation Fridericus II |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동부전선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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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움 돌출부를 제거하려는 독일 육군 제1기갑군 | ||
시기 | ||
1942년 6월 22일 ~ 26일 | ||
장소 | ||
쿠퍈스크-이지움 일대의 소련군 돌출부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소련| ]]|
지휘관 | [[틀:깃발| (남서 전선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키릴 모스칼렌코| ]] (제38군 사령관) | ]][[틀:깃발| ]][[세묜 티모셴코| ]][[틀:깃발| (남부 집단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 (제1기갑군 사령관) | ]][[틀:깃발| ]][[페도르 폰 보크| ]]
결과 | ||
소련군의 패배 | ||
영향 | ||
독일 육군 제1기갑군의 하계 공세 준비 완료 | ||
피해 규모 | 포로 22,800명 야포 150문 전차 100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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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리데리쿠스 II 작전은 제6군이 진행한 빌헬름 작전과 함께 하계 공세 이전에 선행한 2개의 공세 중 하나이며 목표는 이지움 돌출부 제거였다. 공세 결과, 9군과 38군을 밀어내고 큰 타격을 입히면서 차후 공세에서 유리한 시작 지점을 차지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소련군이 이전과 달리 무작정 전선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포위되기 전에 미리 퇴각하면서 예상만큼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2. 전투 서열
2.1. 독일군[1]
- 남부 집단군 ( 사령관 : 페도르 폰 보크 원수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1기갑군 ( 사령관 :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상급대장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야전군 예비
- 제1산악사단
- 제454보안사단
- 제3기갑군단[2] ( 사령관 : 레오 슈베펜부르크 기갑대장 )
- SS차량화보병사단 'LSSAH' ( 사령관 : 요제프 디트리히 SS상급대장[3] )
- 제22기갑사단
- 제16기갑사단
- 제14기갑군단[4]
- 제14기갑사단
- 제60차량화보병사단
- 스트레커 그룹[5]
- 제11군단
- 루마니아 제2보병사단
- 루마니아 제6군단
- 루마니아 제1보병사단
- 루마니아 제4보병사단
- 루마니아 제20보병사단
- 제44군단
- 제68보병사단
- 제97경보병사단
- 제101경보병사단
- 제257보병사단
- 제51군단[6]
- 제297보병사단
- 제71보병사단
- 제44보병사단
- 제62보병사단
}}}
}}}
2.2. 소련군[7]
- 남서 전선군 ( 사령관 : 세묜 티모셴코 소연방 원수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9군 ( 사령관 : 안톤 로파틴 중장[8]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5기병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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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40소총사단
- 제255소총사단
- 제296소총사단
- 제318소총사단
- 제333소총사단
- 제18전투항공여단
- 제19전투항공여단
- 제12전차여단
- 제633혼성항공연대
}}} - 제38군 ( 사령관 : 키릴 모스칼렌코 포병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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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56전차여단
- 제159전차여단
- 제168전차여단
- 제22차량화소총여단
- 제282혼성항공연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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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개
빌헬름 작전이 마무리되자마자 히틀러는 프리데리쿠스 II 작전의 시작일을 17일로 정하고 청색 상황의 첫 단계인 블라우 I을 6월 23일에 시작하도록 명령했다. 이는 제2차 하리코프 공방전 이후로 세바스토폴에서 철갑상어 사냥 작전[9]에 집중하고 있는 루프트바페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가장 빠른 날짜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폭우로 공세는 20일로 밀렸다가 다시 22일로 밀렸으며 세바스토폴 공략도 지지부진해지면서 루프트바페의 지원을 기다리는 블라우 I도 계속 일정이 밀렸다.빌헬름 작전이 마무리되고 제3차량화군단[10]이 6월 17일에 6군에서 1기갑군으로 이관됐고 제51군단도 잠시 1기갑군에 임시 배속됐다. 1기갑군은 두 군단 남쪽에 14차량화군단[11], 스트레커 그룹[12], 44군단을 배치했다. 공세의 주요 공격 축선은 북쪽의 3기갑군단과 남쪽의 44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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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데리쿠스 II 작전을 진행하는 제1기갑군 |
22일에 작전이 시작됐고 3기갑군단의 3개 기갑사단은 동쪽의 쿠퍈스크로 진격했다. 44군단은 남쪽의 이지움에서 도네츠 강을 건너 오스콜 강(Oskol)을 향해 공세를 시작했다. 순조롭게 진격한 3기갑군단의 3개 사단은 23일에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그 날 저녁, 16기갑사단은 쿠퍈스크를 점령했다. 24일 밤이 되자 3기갑군단의 선봉인 22기갑사단과 44군단의 선봉인 101경보병사단이 고로호바트카(Gorokhovatka)에서 만나면서 포위망이 완성됐고 26일까지 포위망 내부가 소탕됐다.
4. 결과
빌헬름 작전과 함께 두 번의 공세는 하계 공세 시작 이전에 남서 전선군의 전선을 붕괴시켰으며 6군과 1기갑군은 오스콜 강에 도달해 각각 블라우 II[13] 작전과 블라우 III[14] 작전 개시선에 도달했다. 그러나 야전 사령관들의 만족과 달리 OKH에서는 불안함을 나타냈는데 이는 두 작전 모두 소련군이 전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약하게 저항만 하고 후방으로 퇴각하여 전선을 재구축하려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프리데리쿠스 작전 중에도 소련군은 포위될 위험에 빠지자 티모셴코가 23일에 퇴각을 명하면서 2개 야전군을 포위 한 것 치고는 포로를 별로 잡지 못했다.[1] 7월 4일 기준[2] 6월 21일에 차량화군단에서 기갑군단으로 개칭[3] 정식 명칭은 상급집단지도자로 실제 진급은 1944년 7월이지만 소급해서 기록 상 1942년 5월 진급이다. 당시 계급은 집단지도자로 독일 병과대장, 소련 상장, 서방권 중장과 동급이다.[4] 6월 21일에 차량화군단에서 기갑군단으로 개칭[5] 11군단이 루마니아 6군단을 임시로 지휘[6] 7월 4일 시점에서는 다시 6군으로 돌아왔으며 작전 중에만 임시로 1기갑군에 배속되었다.[7] 7월 1일 기준[8] 6월 24일부터 지휘[9] 스퇴르팡 작전[10] 6월 21일에 기갑군단으로 개칭[11] 6월 21일에 기갑군단으로 개칭[12] 11군단과 루마니아 6군단[13] 클라우제비츠 작전[14] 뎀프시해머 작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