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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04:06:11

마다가스카르 전투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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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체코 국기.svg 체코 저항군
※시기 구분은 전투 및 교전 발생 일자 기준, 전투 기간은 개별 문서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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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다가스카르 전투
Battle of Madagascar
작전명
Operation Ironclad(철갑 작전)
날짜
1942년 5월 5일 ~ 11월 6일
장소
프랑스령 말라가시
교전국
[[영국|]][[틀:국기|]][[틀:국기|]]

[[남아프리카 연방|]][[틀:국기|]][[틀:국기|]]


[[일본 제국|]][[틀:국기|]][[틀:국기|]]
지휘관 로버트 스터지스 아르망 아네
이시자키 노보루
병력 10,000~15,000명 보병 8,000명
전차 6대
항공기 35대
군함 4대
피해 107명 전사, 280명 부상(질병 포함 총 620명 사상) 150명 사망, 약 500명 부상
결과
연합군의 승리
기타
연합군의 안정적인 유럽·중동, 인도-호주를 잇는 보급로 확보

1. 개요2. 전개3. 기타


파일:operation ironclad.jpg
제2도시 타마타브 해안에 상륙하는 연합군 병사들

1. 개요

1897년부터 프랑스의 식민지이던 마다가스카르는 프랑스의 통치 아래 본국과의 교역으로 나름의 인프라를 갖추고 경제를 불려나갔다. 그러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0년대 본국이 나치 독일에 점령된 이후 마다가스카르는 교역량이 줄어 경제가 파탄났는데, 이 상황에서 나치 독일의 괴뢰국 비시 프랑스가 탄생했고 마다가스카르는 비시 정권으로의 복속을 표명했다.

연합국 입장에서 보면 당시의 아프리카 정세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지중해 - 수에즈 운하 - 홍해로 연결하는 해운망은 위험이 커서 연합군은 희망봉을 통해 인도양으로 나가는 우회로를 보급로로 쓰고있었다. 그런데 희망봉에서 인도양으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한 마다가스카르가 갑자기 추축국으로 편입을 발표하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다.

또한 마다가스카르가 추축군의 손에 넘어갈 경우 섬의 항구와 공항을 통해 추축군이 남아프리카까지 손을 넓힐 위험도 있었기 때문에 연합군은 이 섬을 공격하게 된다.

2. 전개

1942년 3월부터 남아프리카 연방 공군이 지속적으로 마다가스카르의 디에고 수아레즈항을 정찰하면서 전운이 돌기 시작했다. 결국 그해 5월, 영연방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디에고 수아레즈항에 상륙하여 비시 프랑스군과 교전한다.[1]

이에 비시 프랑스 주둔군은 마다가스카르 바깥으로 대대적인 지원 요청을 보냈고, 이를 확인한 크릭스마리네가 동맹인 일본 해군에게 마다가스카르에 개입해 줄 것을 요청했다. 왜 굳이 일본 해군인가 싶은데, 1942년 당시엔 추축군 중에서 마다가스카르까지 병력 수송이 가능한 세력은 일본 해군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수락한 일본 해군은 일단 잠수함 3척을 급파한다. 그러나 일본군 소속 잠수함 3척은 마다가스카르에 무사히 도착하긴 했으나, 영국 해군과의 교전으로 상당한 피해를 보고는 후퇴를 결정한다.

일본군을 물리친 연합군은 점령하는데 성공한 디에고 수아레즈 항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마다가스카르 침공을 개시[2], 1942년 9월에 마다가스카르의 수도인 안타나나리보를 점령한다.

결국 1942년 11월 1일에 마다가스카르 총독인 아르망 아네가 항복하면서, 마다가스카르 전투는 막을 내린다.

3. 기타

2차 대전 당시[3], 일본 제국이 유럽 내 동맹국을 직접적으로 지원해 준 거의 유일한 전투였다. 또한 현대 일본 자위대의 남수단 평화유지군 파견을 제외하면, 일본이 아프리카에 군사적 개입을 한 유일한 사례로 꼽힌다.

세계사적으론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전투였으나, 마다가스카르 역사에선 꽤 중요한 위치의 사건이다. 이 당시 전투에 휘말린 마다가스카르인들은 자신들을 전쟁에 휘말리게 했으면서, 제대로 지켜주지도 못하는 프랑스 식민정부에 큰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마다가스카르가 프랑스에게서 적극적으로 독립을 쟁취하려고 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홀로코스트에도 아주 약간 영향을 주긴 했다. 원래 나치 독일은 유럽 내 유대인들을 마다가스카르로 강제 이주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이 전투의 결과로 마다가스카르가 연합군 영역이 되면서 영영 실행 불가능한 계획이 되어버렸다. 물론 마다가스카르 추방 건은 이미 반제 회의에서 천문학적인 예산이 든다는 이유로 반쯤 백지화시킨 상태였기에, 큰 영향은 주지 못했다.[4]


[1] 당시 영연방군이 붙인 작전 이름은 철갑 작전이었다.[2] 작전명 '스트림라인 제인'[3] 일본 제국사 전체로 확장하면, 1차 대전 당시에 동맹이었던 영국의 요청으로 일부 일본 함대가 인도양과 지중해에서 작전한 사례가 있다.[4] 마다가스카르 추방 건 대신 부각된 것이 바로 절멸 수용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