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PQ-17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편성된 소련행 랜드리스 수송함대이며 랜드리스와 관련된 대서양 전투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전투의 당사자이다. 이 호송선단을 둘러싼 전투는 연합군으로 하여금 현장과 지휘부의 정보 비대칭이 일어날 경우 벌어질 수 있는 위험성과, 그리고 단 한 척의 전함이라도 항로의 작전에 위협을 가한다면 심대한 피해를 입을 수 있음을 깨닫게 했다. 이 이후로 영국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티르피츠 격침을 위해 온갖2. PQ-17 호송선단
아이슬랜드 크발피외르뒤르(Hvalfjord)에서 출항하는 PQ-17 선단
PQ-17은 아이슬랜드에서 소련으로 향하는 17번째 랜드리스 선단이었다.[1] 해당 선단은 북극항로를 통한 랜드리스 물자 수송임무를 맡은 35척의 상선, 3척의 구조선, 2척의 유조선과 47대의 호위함정으로 이루어진 대선단이었다. 호위함정 중 직접 상선단을 호위하는 것은 21척의 영국 함선들이었고 같은 항로를 따라오는 후발 호위함대에는 전함 워싱턴, 듀크 오브 요크 2척과 영국군 항모 빅토리어스까지 편제된 호화로운 사양이었다. 연합군 수뇌부가 호송선단에 이토록 중무장을 시킨 이유는 U보트 대비뿐만이 아니라 항로 인근에 위치한 비스마르크급 전함 티르피츠가 나오면 역습을 가해 때려잡기 위해서였다.
PQ-17 선단의 출발일은 1942년 6월 27일, 목적지는 소련의 아르항겔스크였고 예상 항행기간은 12일이었다.
한편 독일군은 북극항로로 지나간 첫 호송선단인 PQ-14는 거의 그냥 보내주다시피 하였으나 독소전쟁 초반부를 넘어서며 약간 숨돌릴 틈이 생겼고[2] 이로 인해 노르웨이에 항공기와 잠수함이 충원됨에 따라 북극항로에 대한 타격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3. PQ-17의 항행
처음 며칠간은 북극해의 고약한 날씨 덕분에 덴마크 해협의 빙산과 암초에 의한 충돌로 상선 세 척이 귀환한 것 외에는 피해가 없었으나, 7월 1일부터 독일군 정찰기가 PQ-17을 발견하여 소규모 공습이 며칠간 선단 전체에 가해졌다. 독일 해군 또한 호송선단을 포착하여 U-456이 이들을 추적했고, 7월 4일에는 목적지까지 약 절반거리를 항해하였으며 저녁엔 중간 규모의 공습이 가해져 상선 두 척이 침몰하였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호송선단이 제대로 유지되고 있기도 하였고, 아직 적진이라고 할만한 곳이 아니기도 했다.4. 티르피츠의 행방불명
그때쯤 영국의 해군본부에서는 감시중이던 노르웨이 트론헤임의 티르피츠의 소재를 놓쳐버렸다. 티르피츠가 어디로 향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르비크에 주둔중이던 중순양함 아드미럴 히퍼와 구축함 몇 척이 출항하였으며 마침 근처에는 PQ-17이 항행하고 있었기에 해군본부는 이들이 PQ-17에 대한 공격행동을 시작한 것으로 간주하고 명령을 갱신하였다. 명령은 아래의 세 전문으로 내려왔다.- 지원순양함대(후위에 따라오는 전투함대)는 서쪽으로 변침할 것
- 선단은 흩어져 각자 아르항겔스크로 향할 것
- 선단은 분산할 것
줄이자면 티르피츠가 오고 있으니 호위고 나발이고 다 흩어져서 각자 살아남으라는 명령이 내려온 셈인데...연합군 수뇌부는 노르웨이에서 출항한 히퍼와 티르피츠가 수송 라인 차단을 위한 것으로 판단하여 수송선단의 산개를 명령한 것이다. 새 명령을 받은 현장의 군인들은 생각이 해군본부와는 달랐다. PQ-17에는 상당한 전력이 집중돼있던 만큼 티르피츠 하나때문에 도망치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호위함대장은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만약 티르피츠가 온다면 순양함대가 맞서 싸울 것으로 판단하여 구축함 6척을 후위에 따라오는 순양함대로 보냈다. 이외의 호위함과 잠수함에게는 본부의 명령대로 개별적으로 아르항겔스크를 향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상선들은 본부의 명령을 그대로 받아들여 뿔뿔이 흩어졌다. 지원순양함대는 명령을 무시할수도 없고 그냥 물러나기도 애매해서 티르피츠를 요격하기 위해 그들을 찾아나섰다.
5. PQ-17 와해
전투가 벌어진 위치 및 격침당한 선박 위치.
PQ-17이 와해된 7월 5일부터 치밀한 호위대형에 의한 에스코트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막상 올거라고 생각했던 티르피츠가 아닌 U보트와 Ju 88을 위시한 장거리 공격기들이 개별로 흩어진 상선들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대잠과 대공방어를 담당해야할 호위함대가 분산된 탓에 유보트와 뇌격기의 공격에 취약해졌다. 7월 5일 하루동안 14척이 침몰하는 것을 시작으로 6일에는 2척, 7일에도 2척, 8일에 1척, 10일에 2척이 침몰하였다. 아르항겔스크에 도착한 상선은 11척뿐이었으며 최후의 함선이 도착한 것은 분산 3주 후인 7월 24일이었다.
선원들의 비명과 화염이 치솟는 아수라장이 벌어지는 와중에 무장 트롤리 HMS Ayrshire 선장 레오 그레드웰(Leo Gradwell)은 미국 상선 3척과 함께 탈출에 성공했다. 그레드웰은 오직 육분의만으로 의존하여 북극해 방향으로 나아갔고, 북극해의 유빙(流氷) 속에서 선박이 멈췄지만 침착하게 화염을 진압하고, 선박의 데미지 컨트롤에 성공했다.
그는 함께 탈출한 미국 상선 트루바도르가 화물로 벙커유와 선박 도색 페인트를 운반하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 모든 선박을 흰색으로 도색하도록 하고, 수송중인 M4 셔먼 일부를 갑판에 배치하여 방어선을 형성했다. 이들은 빙산지대를 뚫고 노바야젬랴 마토치킨 해협(Ма́точкин Шар)으로 후퇴하여 루프트바페와 U보트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었다. 3주 후 소련의 코르벳 함대가 이들을 발견하여 그레드웰 일행은 최후로 아르항겔스크로 입항한 선박이 되었다. 그레드웰은 나중에 영국 수훈 십자장을 수여받는다.
정작 선단 와해의 원인인 티르피츠는 여러 위험으로 인해 작전을 취소하였고 결과적으로 그저 정박지를 알타 피오르드(Altafjord)로 바꾸기 위해 이동했을 뿐이었다. 독일 정찰기가 빅토리어스를 발견하기는 하였으나 오래 추적하지는 못하였고 결국 지원순양함대와 티르피츠가 교전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티르피츠가 이들을 포착했었어도 지원순양함대의 전력을 뚫기는 쉽지 않았을테고 슬쩍 모습만 비춘 것으로도 적이 패닉에 빠지는 현존함대전략을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직접 교전하는 일은 피했으리라 생각된다.
6. 피해
인명 : 153명 사망, 부상 1300명, 포로 20여명함선 : 22척 침몰
물자 : 전차 430대, 항공기 210대, 군사물자 약 9만 9천톤 분량
숫자만으로는 감이 잘 안오니 단순히 수량만 비교해보자면, 쿠르스크 전투 도중 프로호로프카 전차전에서 잃은 전차가 독소 합해서 700여대다. 상선도 상선이지만 기갑사단, 비행대 규모로 물자가 날아갔다고 생각하면 굉장한 규모의 손실이다.
반면 독일군의 손실은 항공기 5기가 끝이었다. 즉 교환비로 보자면 독일군 항공기 1기가 격추당할 때 연합군은 상선 4.4척, 전차 86대, 항공기 42기, 군사물자 1만 9천톤, 병력 30.6명을 손실한 것이다.
7. 반응
- 영국: 해군본부의 판단이 별로 좋지 않았음은 당연히 군 내부에서도 이야깃거리가 되었으며, 특히 현장의 군인들에게 그런 분위기가 강했다. 게다가 티르피츠가 나와도 문제, 안나와도 문제기 때문에 영국군으로서는 명분으로나, 실리로나 티르피츠를 때려잡아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또한 피해가 너무 컸던지라 짧지만 위험한 북극항로는 잠시 포기하고 멀지만 안전한 이란 루트라는 대체 경로를 찾아야만 했다.
- 미국: 현장 군인들은 물론이고 수뇌부도 영국 해군본부의 실책에 적잖이 실망했다. 현장에 있던 위치타함의 사관이었던 배우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Jr.은 영국군이 겁쟁이라는 소리까지 나왔다고 회고하였고, 미 해군은 전함 워싱턴을 태평양으로 재배치함으로 북극항로에 대한 지원을 축소시켰다.[3]
- 소련: 당연하지만 랜드리스 혜택을 가장 크게 보는 입장이었던 만큼 그 손실이 더욱 크게 와닿았다. 때문에 얼마 안되는 해군과 항공기를 긁어모아 호송선단을 호위하기 위한 구역을 적으나마 구축하였다.
- 나치 독일: PQ-17 궤멸의 성공으로 독일군은 북극항로에 대한 타격 수단을 확충하기 시작했다. 피해 문단을 보면 알수 있지만 호송선단 갉아먹는게 지상부대의 교전보다 교환비가 우월하다보니...
8. PQ-18
아무튼 연합군도 바보는 아니었고 호위세력이 없으며 대형을 이루지 않은 호송선단은 아주 만만한 먹잇감이라는 사실을 값비싸게 배울 수 있었다. 이후 연합군은 직사각형 대형을 고안해냈다. 해당 대형은 가치가 떨어지는 원자재와 물자를 실은 화물선을 외곽에 배치하고, 유폭 위험이 큰 유조선과 탄약수송선을 가능한 한 대형 내부에 그러나 밀집하지 않도록 하여 유폭의 위험성을 최대한 줄였다. 각 함선은 전후로 약 450미터, 좌우로 약 915미터의 간격으로 항행하며 측면공격을 당할 시 노출되는 함선 수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선단의 길이는 5척으로 제한하였다. 외곽에는 최소 4척의 초계함이, 최외곽에는 최소 2척의 호위구축함이 초계 활동을 실시함을 기본으로 하고있으므로 항공기는 몰라도 U보트 입장에서는 굉장히 접근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호송선단 대형으로 인해 잠수함 단독의 타격은 굉장히 까다로운 일이 되었으며 칼 되니츠 스스로도 전후에 저 호송선단 대형으로 인해 잠수함 작전이 좌절되었다고 회고하였다.일단 북극항로를 폐쇄하긴 했지만 소련이 숨 넘어가기 직전이었으므로 어쨋거나 물자는 실어날라야 했고, 이란 루트는 당장 쓰기엔 너무나 멀었기에 9월 2일에는 당장 급한 물자를 전달하기 위해 PQ-18 호송선단이 구축되었다. PQ-18은 PQ-17에서 배운 경험으로 호위함선을 더욱 많이 붙였을뿐 아니라 후위가 아닌 호위함대 본대에 전함 앤슨과 듀크 오브 요크를 배치하고 순양함의 수를 더욱 늘려 티르피츠가 접근하는대로 없애버리겠다는 포스를 뿜고 있었다. 가벼운 구축함과 순양함들은 본대 전방에서 전투초계 임무를 부여받아 색적 능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정규항모 하나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호위함대에 호위항모를 추가하여 항공전력을 강화하였다.
PQ-17 공격으로 인해 독일군도 약간의 손실을 입은 상태였고, 12척의 잠수함과 210대 가량의 항공기를 투입하여 PQ-18에 공격을 가했다. 단 PQ-18은 오판을 했던 PQ-17과 달리 산개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호위함대의 방어능력이 건재하였으므로 독일군도 U보트 4척을 손실하였다. 주 공격수단은 루프트바페의 공격용 항공기였으며 선단 자체가 워낙 규모가 크다보니 호위항모에서 발진한 시 허리케인이 공격기들과 공중전까지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선단 전체에 산발적으로 가해진 공습으로 인해 13척의 상선을 손실하였다. 그 대가로 루프트바페도 약 40대의 항공기를 손실하였다. 소련의 방어구역에 다다르자 공세가 풀이 꺾였으며 PQ-18은 아르항겔스크에 도착하였다.
9. 이후
1942년 말부터 동부전선의 상황이 시급해짐에 따라 노르웨이로 돌려질 독일군의 자원이 부족해지기 시작하였고, 11월에는 토치 작전으로 인해 북아프리카 전선에도 불이 떨어져 아예 노르웨이에 있던 항공대를 지중해로 옮겨야 할만큼 전황이 급박해졌다. 약간의 항공대와 잠수함은 남아있었지만 리버티선, B-17개조 장거리 초계기, 발전된 소나와 레이더, 호위항공모함과 같은 유보트에 대응할 수 있는 신병기가 등장함에 따라 1943년부터 크릭스마리네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1943년 말에는 티르피츠도 큰 타격을 받아 전력 외가 되었으며 대서양 전투가 연합군의 승리로 종결됨에 따라 북극항로에 투입되는 전력이 강화되어 실질적으로 PQ-18 이후의 북극항로 호송선단은 큰 피해를 받지 않고 소련까지 항행할수 있었다. 1944년부터는 루프트바페의 전력도 크게 약화되어 북극항로는 사실상 안전한 항로가 되었고 다시 페르시아 침공으로 생성된 이란 루트를 제치고 주요 수송 루트가 되었다.소설 여왕폐하의 율리시즈호는 바로 이 PQ-17 호송선단의 비극을 모티프로 했다.
10. 참고 자료
라이프 제 2차 세계대전 '대서양 전투'영문 위키피디아 PQ-17 https://en.wikipedia.org/wiki/Convoy_PQ_17, PQ-18 https://en.wikipedia.org/wiki/Convoy_PQ_18
[1] PQ는 영국, 아이슬랜드에서 소련으로 향하는 호송선단에, QP는 소련에서 영국으로 돌아오는 호송선단에 붙는 이름이었다.[2] 시기상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시작되는 소련의 반격 이전이다.[3] 그리고 이렇게 재배치된 워싱턴은 몇개월 뒤 과달카날 해전에서 기리시마를 격침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