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letter-spacing: -0.9px; word-break: keep-all" {{{#000,#999 | <colbgcolor=#536349> 연표 | 사건 |
1936년 |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 |
1937년 | 7월 중일전쟁 발발(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 |
1938년 |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 |
1939년 |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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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 |
폐허가 된 드레스덴을 내려다보는 동상[1] |
<colbgcolor=#ddd,#191919> 독일어 | Luftangriffe auf Dresden |
영어 | Bombing of Dresden |
러시아어 | Бомбардировка Дрездена |
독일 드레스덴 |
1. 개요
폭격으로 파괴된 드레스덴[2] | 드레스덴 폭격 |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인 1945년 2월 13일부터 2월 15일까지 연합군의 폭격기 편대가 드레스덴에 실행한 대규모 폭격 작전이다. 유럽 전선의 폭격 중 가장 큰 피해를 입힌 작전으로, 사흘간 약 3,400여 톤의 폭탄이 도시로 떨어져 민간인 22,700~25,000여 명이 숨지고 중세 바로크 건축과 예술로 유명하던 드레스덴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 이 폭격 작전은 현재까지도 그 의도와 실효성에 대해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2. 폭격 작전의 배경
연합군 폭격기들의 폭격으로 독일 전역이 쑥대밭이 되고 있었지만 드레스덴은 용케도 폭격을 면하고 있었다. 전쟁 초반에는 다른 도시들과 비교해 공업 시설이 많지는 않았으나 1944년 당시에는 폭격을 당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공업 시설이 가장 많았다.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OKH)에 따르면 물자를 공급하는 중간 규모 이상의 공장만 127개가 되었다고 한다.[3] 한편 1978년에 해금된 미군의 리포트에 따르면 대략 110개의 공장이 가동되고 있었고 여기에는 항공기 부품, 독가스, 대공포, 야포, 광학기기 등등을 생산하는 군수산업 복합체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군 병영과 탄약 저장고가 위치하고 있었다. 또 이 곳은 체코슬로바키아쪽으로 향하는 요충지였으며 이 곳의 철도 또한 베를린-프라하-빈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실제로 드레스덴에 잡혀 있었던 미군 포로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드레스덴은 동부 전선에 투입하는 물자를 생산하고, 병사를 훈련시키는 군사도시였다.[4]폭격 작전이 계획될 당시 폭격 지휘부는 드레스덴을 목표로 지정하면서 그 근거로 "독일군의 저항 능력을 분쇄하고, 이를 통해 소련군의 진격을 돕는 것"임을 내세웠다. 실제로 이 도시가 동부 전선으로 가는 물자를 생산하는 곳이었으므로 정확한 분석이었으며, 소련 또한 동부에 위치한 독일의 도시들을 전략 폭격할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다만 영국군은 사회 혼란을 부추기고, 독일 국민들의 민심을 나치에게서 돌리기 위해 공장들이 위치한 주변부가 아니라 도심을 폭격했다. 그러나 총력전 상황에서 전략 폭격은 공장뿐만 아니라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목표물에 포함했다. 거기다가 기상의 문제로 도심에 폭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계속 서진하고 있는 소련군에게 상대적으로 거리가 먼 서방 연합군이 위력 과시를 위해서 크게 폭격했다는 견해도 있으나 폭격의 규모 자체는 베를린이나 함부르크 같은 대도시에 비해서 훨씬 작은 규모임을 생각하면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얄타 회담에서 소련의 스탈린은 소련군의 진격에 비해 지지부진한 영•미 연합군의 전과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고[5] 이에 영국의 처칠은 전후 회담에서 '우리도 이만큼 했다'는 발언권을 얻고, 소련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서 동부 전선으로 투입되는 병력들의 집결지인 드레스덴을 공습하기로 결정했다.
그 '도시 폭격'은 1942년 3월 옥스퍼드 대학의 물리학 교수인 포웰이 제출한 보고서가 발단이었는데
독일이 투하한 폭탄 1톤에 대하여 100~200명의 시민이 집을 잃었으며, 이것을 비율로 환산할 경우, 영국 폭격기 1대가 연 14회까지 출격하면 4,000~8,000명의 독일 시민이 집을 잃는다.
는 계산이 나왔다. 따라서 독일 인구 중 약 2,200만 명이 58개 주요 도시에 집중해 있으므로 이 도시들이 1년 반 이상에 걸쳐 지역 폭격을 받게 되면 영국 공군은 독일 인구의 1/3을 집이 없는 상태로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독일 국민의 사기를 꺾을 수 있었다. 이내 포웰은 이 보고서가 과장되었음을 알고 추후에 수정했으나 처칠은 이 수정된 보고서가 제출되기 전에 아서 해리스를 비롯한 영국 폭격기대에 '도시 폭격'을 주문했다. 그리고 뤼베크 공습[6]과 쾰른 공습에서 괜찮은 성과를 보이면서 완전히 자리잡았다.이것은 사실상 목표 지역 안의 1, 2개 특정 목표를 폭격하는 것이 아니라 인구 밀집 지역에 전력을 집중하라는 것을 의미했다. 또 목표에 대한 인식도를 높이고, 목표인 거주 지역 파괴를 촉진시키기 위하여 탑재 폭탄의 50%를 방화를 위한 소이탄으로 충당했다.
처칠과 해리스는 도시 폭격에 미 공군도 동참할 것을 요구했으나 썬더클랩 작전에서 미 육군항공대 대장인 스파츠 대장과 미 항공대는 도시와 민간인 폭격에 회의를 나타내며 작전에 반대했고, 실제 도시 폭격이라는 방법론 자체에도 찬성하지 않았다. 스파츠는 도시 폭격의 여파, 즉 전후에 반드시 제기될 것임에 틀림없는 비난을 받기 싫다고 표명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미국 내 일반 여론이 독일 민간인에 대한 공격에 반대했다는 점도 한몫했다.[7]
당시 미 육군 항공대는 독일 도시를 공습할 때 철도 분기점이나 정유소, 군수 공장들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며 루마니아 유전 지대 공습이나 독일 내륙의 공업 지대를 공습할 때도 웬만하면 민간인 거주 지역을 피해서 실시했다. 구름이나 기상 등의 이변이 있을 때는 폭격기에 탑재된 신형 레이더를 이용하여 최대한 공업지대에만 투하했으며 쾰른이나 함부르크 공습 당시 영국 폭격기대대가 독일 민간인 구역에 소이탄을 투하할 때도 미 항공대는 유보트 기지와 철도 분기점만 공습하고 돌아갔다.
미 항공대는 독일 방공포와 전투기의 방해로 수많은 폭격기들이 추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고고도 정밀폭격전략을 고수했으며, 전후 보고서에서도 이러한 미군의 전략적 목표에 대한 정밀폭격은 영국의 도시 공습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다고 서술했다.[8]
따라서 제한된 야간 폭격에 대한 기술적인 해결책이었던 도시 폭격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석유 생산 시설과 항공기 공장, 철도 등의 교통시설에 대하여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고, 자국의 정치가와 지휘부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보복의 압력도 적을 수밖에 없었다. 훗날 처칠은 도시 폭격에 대한 여론의 압박, 미진한 성과[9], 전후의 책임 등을 이유로 중단했고, 종전 후 승전을 기념해 전쟁 부서를 하나 하나 이름을 부르며 감사를 표할 때 폭격기사령부는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승전 기념 훈장 임명식때도 해리스와 폭격기 승무원들을 고의로 불참시켰다.
3. 폭격의 진행 사항
2월 13일 최초의 폭격은 미 육군 항공대가 실시했으며 이때는 이미 도심 근처의 철도 시설을 두 번이나 폭격한 뒤였다. 당시 미군의 폭격 목적은 또 다시 이 철도 시설을 폭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월 14일의 주간 날씨가 좋지 않자 대부분의 폭격 작전이 취소되었고, 영국군에게 턴이 넘어갔다.좋지 않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영국 공군의 폭격은 이루어졌는데 날씨 때문에 적어도 두 번은 때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결국 3시간차를 두고 두 번의 폭격이 행해졌고 이 덕분에 첫 번째 폭격에 놀라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있었을 때, 그리고 도시에서 폭격을 맞은 피해를 복구하고 사람들을 구조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을 때 또다시 맞게 되어 피해가 가중되었다. 이외에도 주변의 공장 지대를 폭격하는 작전이 그 날 야간에 이루어져 독일 공군의 혼란을 일으키는 효과를 기대했다. 첫 번째 폭격시 주로 피격당한 곳은 오스트라게헤게 운동장이었는데 이 곳은 구도심과 근접한 곳이었고, 이 구도심은 런던의 도심이 그랬듯이 나무 판자 건물이 많았던지라 엄청난 화재로 피해를 입었다. 폭탄 탑재량의 60%에 달했던 소이탄이 큰 피해를 준 것이었다. 이들을 '쿠키'나 '블록버스터'[10]로 불렀다. 폭격의 시작은 22:00시 밤중이었다.
도저히 묘사할 수가 없다! 폭발하고 또 폭발. 제일 암울했던 악몽보다 더 나빠서 믿을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끔찍하게 불에 타고 부상을 당했다. 점점 호흡하기가 힘들어졌다. 밖은 어두웠고 우리들은 상상조차 못할 공포감에 이 지하 창고를 빠져나가려 애썼다.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은 짓밟혔고, 짐들은 버려지거나 우리들 손 밖을 빠져나가 구출하는 사람들이 낚아채갔다. 우리 쌍둥이 아기들은 바구니 속에 넣어 젖은 옷들을 그 위에 덮어 엄마가 손으로 움켜쥐었고, 우리는 뒷사람들에게 밀려 위층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거리가 불에 타는 모습과 떨어지는 잔해, 끔찍한 화염폭풍을 지켜보았다. 우리 엄마는 물통에서 찾아낸 젖은 담요와 코트로 우리를 감쌌다. 우리는 끔찍한 것들을 보았다. 조그만 아이 크기만큼 타버린 어른 시체, 팔다리 조각들, 죽은 사람들, 불타서 죽은 일가족들, 불타면서 저편으로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 피난민 시체들로 가득 들어있는 불탄 사륜마차, 죽은 구조원들과 병사들, 자기 자식과 가족을 부르거나 찾는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불이 어디든 났다는 것, 어디든지 불났다는 것, 그리고 화염폭풍의 뜨거운 바람이 불타는 집에서 탈출해 나왔다가 다시 돌아가려는 사람에게 불어닥치는 모든 순간. 나는 이런 끔찍하고 세세한 것들을 잊을 수 없다. 절대로 잊을 수가 없다. — 생존자 중 한 명인 로타르 메츠거의 증언
내 왼쪽에서 갑자기 한 여자가 나타났다. 나는 그 여자를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앞으로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팔에다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그것은 아기였다. 그녀는 달리다가 넘어졌고, 그 아이는 그대로 아치 문 안의 불속으로 날라갔다. 갑자기 나는 내 오른쪽에서 다시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겁에 질렸고 손짓으로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으며, 그 다음 — 나는 공포를 느끼고 경악했다 — 나는 그들이 스스로 순서대로 하나씩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나는 훗날 그 불쌍한 사람들이 산소 부족으로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졸도했고 곧 불에 타서 재로 변해버렸다. 나는 때때로 미치도록 두려울 적마다 다음과 같은 간단한 문장을 반복하고 새뇌긴다: "나는 불에 타서 죽지 않았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모른다. 나는 오직 한 가지만을 안다. 나 스스로 타죽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 생존자 중 한 명인 마거렛 프레예
이후 2월 14일 아침, 미군의 8공군에서 주간 폭격을 위해 출발했다. 이들은 도시 이외에도 주변의 소도시들(주로 공업 지역)을 목표로 출발했다. 일단 도시를 폭격하는 그룹은 도심의 철도 시설을 폭격하기로 했으나 날씨가 흐리면 도시는 놔두고 공업 지역을 폭격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만일 둘 다 여의치 않으면 도심을 폭격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미군의 폭격 또한 영국군과 비슷하게 총 폭격량의 40%가 소이탄이었다.
결과적으로 철도 시설에 대한 폭격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나 공장 지역에 대한 폭격은 기상 악화로 도심에 대충 폭탄을 버리고 오게 되었다. 물론 연합군도 H2X레이더를 사용해 적절한 지상물을 찾기는 했으나 걸음마 단계 기술이었으니만큼 정확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당시 혼란을 가중시키기 위해 호위 전투기들에게 도심 근처의 도로에 무차별 기총소사가 명령되기도 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확인된 바는 없고, 무엇보다도 주장하는 사람이 홀로코스트 부인론자인 데이비드 어빙(David Irving)이라서 신뢰성은 더 떨어진다. 게다가 일단 독일측 목격자부터가 이런 일은 없었다고 밝혔다.
2월 15일에는 비로소 가장 주된 목적이었던 뵐렌(Böhlen) 합성유 공장을 폭격하려고 했으나 이 또한 구름 때문에 막혀 '드레스덴을 공격한다'가 되어버렸다. 다만 이때도 구름이 짙게 끼어 버려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근교에 대충 떨구고 귀환했다. [11]
드레스덴에 떨어진 폭탄 통계
날짜 | 목표물 | 군세 | 항공기 수 | 고폭탄(톤) | 소이탄(톤) | 총 톤수 |
1944년 10월 7일 | 철도 | 미8공군 | 30 | 72.5 | 없음 | 72.5 |
1945년 1월 16일 | 철도 | 미8공군 | 133 | 279.8 | 41.6 | 321.4 |
1945년 2월 14일 | 도심 | 영국 공군 | 772 | 1477.7 | 1181.6 | 2659.3 |
1945년 2월 14일 | 철도 | 미8공군 | 316 | 487.7 | 294.3 | 782.0 |
1945년 2월 15일 | 철도 | 미8공군 | 211 | 465.6 | 없음 | 465.6 |
1945년 3월 2일 | 철도 | 미8공군 | 406 | 940.3 | 140.5 | 1080.8 |
1945년 4월 17일 | 철도 | 미8공군 | 572 | 1526.4 | 164.5 | 1690.9 |
1945년 4월 17일 | 산업지역 | 미8공군 | 8 | 28.0 | 없음 | 28.0 |
즉 폭탄을 떨군 양으로 따지면 미군의 폭격만으로도 가공할 만한 위력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먼저 영국 공군이 떨어뜨린 소이탄의 연기 때문에 기상 상태가 좋지 않아 제대로 맞지 않았고, 드레스덴을 결정적으로 파괴시킨 건 영국 공군의 야간 폭격 때 떨어진 소이탄이었다. 대량의 소이탄 폭격으로 드레스덴 전체에 대규모의 화재가 발생했으며 장소에 따라 고온에 따른 화염 폭풍까지 발생했다. 이로 인해 방공호 등지에 대피했던 민간인들 중 상당수가 희생당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방공호 자체가 단 하나밖에 없었고 관리도 허술했다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제대로 방호가 될 리 없는 지하실에 숨어드는 사례가 보통이었다. 이 지하실들은 건물마다 얇은 벽으로 막혀 있어 한 건물이 무너질 것 같으면 벽을 뚫고 다른 건물로 옮기는 방식이었는데 이 탓에 훗날 희생자들의 시체가 한 곳에 우르르 쌓여 있게 되었다.
또 폭격 당시 미 육군항공대나 영국 공군의 폭격기 손실은 고작 7기(B-17 1기, 랭커스터 6기)가 전부였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일단 폭격 시점이었던 1945년에는 루프트바페가 궤멸 직전이었기 때문에 도시에는 요격기들이 일체 배치되어 있지 않았고, 대공포들과 방공시설도 모조리 동부 전선의 소련군을 막으려 옮긴 관계로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12] 그나마 공습 당시 인근 비행장에서 28기의 Bf 110 야간전투기들이 출격했고, 드레스덴에 배치되었던 소수의 대공포대들이 저항했지만 전술했듯이 공습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4. 폭격의 결과
온 천지가 죽음, 죽음, 죽음이다. 일부는 석탄처럼 완전히 새까맣다. 일부는 마치 잠이라도 든 양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 누워 있다.[13] 앞치마를 입은 여성들, 아이들을 데리고 전차에 앉아 있는 여성들, 그들은 방금 깜빡 잠이 든 것 같다. 일부 파편에 팔과 머리와 다리가 찔리고, 두개골이 박살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노란 반점과 갈색 반점을 몸에 지닌 채 부풀어오른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의 옷은 여전히 빨갛게 불타고 있었고 나는 거울을 달라고 했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얼굴은 물집 덩어리였고 눈은 찢어진 구멍이었다.
― 드레스덴 폭격 생존자 마르그렛 프라이어의 증언[14]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노란 반점과 갈색 반점을 몸에 지닌 채 부풀어오른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의 옷은 여전히 빨갛게 불타고 있었고 나는 거울을 달라고 했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얼굴은 물집 덩어리였고 눈은 찢어진 구멍이었다.
― 드레스덴 폭격 생존자 마르그렛 프라이어의 증언[14]
정말이지 드레스덴은 멋진 도시였다. 내 말을 믿어도 좋다. 아니, 내 말을 꼭 믿어야 한다! 여러분이 아무리 부자 아버지를 두었어도, 내 말이 맞는지 알아보려고 기차를 타고 드레스덴으로 갈 수는 없다. 드레스덴이라는 도시는 이제 없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단 하룻밤 사이에, 단 한 번의 손놀림으로 그 도시를 완전히 없애 버렸다.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아름다움이 만들어지기에는 수백 년이 걸렸지만, 그 도시를 땅 위에서 날려버리기엔 두어 시간으로 족했다. 1945년 2월 13일의 일이었다. 전투기 800대가 수류탄과 폭탄을 퍼부었다. 그리고 허허벌판만 남았다. 뒤집힌 원양 어선처럼 보이는 몇 무더기의 거대한 잿더미와 함께.
― 에리히 캐스트너[15]
― 에리히 캐스트너[15]
엘베 강의 피렌체로 불리던 고도(古都) 드레스덴은 이 폭격으로 인해 초토화되어 버렸다.
시가지 중 6.5제곱킬로미터가 파괴되었고, 150,000채 이상의 집들이 무너졌지만 인명 피해의 경우 꽤 논란이 많다. 드레스덴 경찰의 진술에 의거해 작성된 독일의 공식 보고서인 《Tagesbefehl Nr. 47》("일일지령, TB47")에 따르면 3월 22일에 집계된 사망자 수는 알트마르크트에서 소각된 6,865명을 포함하여 총 20,204명이며 전체 사망자 수는 약 25,000명으로 추정되었다. 다른 보고서에는 4월 3일에 집계된 시체 수가 22,096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시립 공동묘지에는 21,271명의 희생자가 공습으로 인해 시립 묘지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중 17,295구는 헤이데프리에드호프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한다.[16] 1966년에 동독 치하에서 재건을 위한 공사 도중에 1,858구의 희생자가 한꺼번에 발견되기도 했다. 더 이상 시체가 발견되지 않을 것 같았는데도 불구하고, 통일 직전인 1989년에 새로운 빌딩을 건설하기 위하여 기초 공사를 하던 중 또다시 폭격으로 희생된 시체가 발견되기도 했다. 뒤늦게 발견된 10,000구의 시체를 포함해서 당국의 권한에 의해 제외됐던 희생자의 수를 합하면 모두 35,000명 정도 된다.
다만 21세기의 서구 학자들 사이에서는 여러 외적 요인을 합쳐도 사망자는 25,000명을 넘지는 않는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며, 일반적으로 22,700여 명으로 추산한다. 인명 피해의 규모와 관련한 가짜 정보는 독일에서도 상당한 골칫거리인지라 2004년 드레스덴 시 당국에서 역사위원회를 구성해 약 6년간 연구하여 사망자 규모를 18,000~25,000명으로 결론짓기도 했다.
피난민이 몰려들면서 드레스덴으로 서류상의 거주지를 옮기지는 않았는데 드레스덴에 있었던 사람들이 매우 많았고[17] 건물이 붕괴되거나 고온으로 인해 시신 자체가 소멸되면서 사망자를 집계하는 데 어려움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사망자의 수를 100,000명 이상으로 잡기도 한다. 하여튼 수만 명이 넘게 죽었기 때문에 수북히 쌓인 시체를 사람들은 트럭과 수레로 실어 날랐다. 그리고 트랙터를 동원하여 집단 무덤을 팠지만 시체 양이 어마어마했기에 전부 다 묻지 못해 시체 썩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이에 당국에서는 시체들을 한꺼번에 화염방사기로 오래된 시청 앞 광장에서 화장시켰는데 드레스덴 폭격의 생존자들은 평생 그 참혹한 일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 당시 드레스덴에 있었던 유일한 한 개의 방공호의 경우, 구조팀이 몇 시간 후 방공호에 진입하자 폭격으로 인한 뜨거운 공기에 뼈와 살이 녹아내려 생긴 곤죽이 된 시뻘건 액체들이 쏟아졌다고 하며, 자기 집에 있었던 지하실로 숨어들어간 사람들은 고온에 몸이 완전히 익어버린 채로 발견되었다.
한편 괴벨스는 이걸 또 제대로 선전에 이용했다. 보통 폭격을 당하면 아군의 사기저하를 방지하기 위해 피해를 줄여 발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그는 이번에는 폭격의 피해를 축소하지 않고 되려 과장했다. 괴벨스는 드레스덴 폭격의 추측 사망자 수인 25,000명에 0을 하나 더 붙여 무려 200,000명으로 만든 다음 이 거짓 정보를 스웨덴과 스위스의 중립국 언론에 살포했고[18] 이는 후술할 연합국에서도 심한 반발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미국도 똑같이 폭격을 수행하긴 했으나 위 도표에서 볼 수 있듯이 애초부터 미군 항공대는 민간인 거주지역에 대한 폭격을 자제했기 때문에 비난의 포화를 피해갈 수 있었고 영국 공군과 비교했을 때 미군의 정밀 폭격은 독일 군수산업에 더 많은 피해를 끼친 것으로 확인되었다. 드레스덴 공습의 결과를 전해받은 처칠은 이후
"무차별 폭격만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잿더미가 가득한 곳에서 승리를 쟁취할 수밖에 없다."
며 독일 도시에 대한 무차별 공습을 그만두었다. 이후 영국 공군은 3개월 동안 베를린 폭격을 시행했으나 수천 명의 인명과 700여 대의 폭격기를 손실한 것에 비해 가시적인 성과가 없어서[19] 아서 해리스와 영국 공군 주도의 전략 폭격의 유용성을 의심하게 되었다.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연합군에서도 이 폭격에 대한 책임 떠넘기기가 벌어졌다. 괴벨스가 중립국 언론을 통해서 살포한 가짜 뉴스를 전해들은 연합국 시민들은 먼저 미군을 비난했다. 그러자 미군은 전술했던 대로 군수공업 시설만을 폭격했다고 주장했고 이에 시민들은 영국과 처칠을 비난했다. 그러자 처칠은 아서 해리스가 이 폭격을 주도했다고 주장하며 해리스에게 모든 책임을 넘겨 버렸다.
결국 이 폭격과 처칠의 책임 떠넘기기는 이후 아서 해리스의 인생을 완전히 망치고 말았다. 전후 아서 해리스는 영국 의회 청문회에 출두해야 했고 그는 영국 전략 폭격기사령부의 영웅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마 취급을 받게 되었다.[20] 영국 폭격기대대의 잔학성은 함부르크 대공습에서 다시 한 번 그 위용을 떨쳤는데 영국은 미8공군에도 협조를 요청했지만 스파츠 대장을 위시한 8공군은 "좆까"로 무시했고, 미 공군은 철도역과 도시 외곽 공장지대만 정밀 폭격했다. 반면 영국 폭격기대대는 민간인이 몰려 있는 도심에 소이탄을 떨어뜨렸고 민간인 수만 명이 이 폭격에 휩쓸려 사망했다. 이 일로 영국 폭격기대대는 연합군 측에서 인간 말종 수준으로 치부되었고, 처칠은[21] 반발을 고려하여 종전식에서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부대들을 열거할 때 영국 폭격기대대와 아서 해리스를 고의로 불참시켰다. 또한 드레스덴 폭격에 가담한 영국 공군 소속 전략 폭격사령부의 전사자들에 대한 대우는 무시되었다. 이들이 공식 석상에서 언급될 수 있었던 건 작전을 수행하고도 무려 67년이 지난 후인 2012년에서였다.
더불어, 여러 예술품들도 불길로 사라졌다. 귀스타브 쿠르베가 그린 '돌 깨는 사람들'을 비롯한 153점 그림도 폭격으로 사라져서 이젠 사진으로만 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5. 평가
폭격의 목표 지역 및 의도가 명확했던 다른 피해 도시와는 달리 드레스덴에서는 군수시설보다는 민간인 거주지가 더 피해를 많이 보았던지라 때로는 아서 해리스 등 지휘 수뇌부의 감정적인 보복 행위라는 의견이 나올 정도로 매우 논란이 큰 작전이다. AP통신이 2월 19일에'연합군 공군 수뇌부가 독일의 인구 밀집 지역에 의도적으로 테러 폭격을 가하기로 했다.'
고 보도할 정도였다. 한편 독일은 폭격 직후, 드레스덴에는 산업시설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독일 최고 사령부가 대규모 공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공장이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미 공군의 정밀 폭격과는 달리 영국의 보복성 민간인 지대 폭격은 충분히 논란을 일으킬 정도였으므로 이후 영국 폭격기대대는 엄청난 비난을 받아 독일 도심에 대한 공습을 잠정 중단해야만 했다.
영국은 산업시설의 23%, 비 산업시설은 56% 정도가 파괴되었다고 추산했다. 한편 드레스덴 경찰의 보고서에 따르면 200여 개의 공장이 크고 작은 손상을 입었으며, 136개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28개는 중간 정도의 손상을, 35개는 경미한 손상을 입었다고 했다. 손상을 입은 공장 중에는 광학기기를 제작하는 자이스의 공장도 있었다.
6. 여담
발터 모델 원수와 그의 가족들이 폭격으로 폐허가 될 때까지 이곳에서 거주했다. 히틀러의 호출을 받고 베를린에서 열린 작전회의에 참석했던 모델이 2월 13일 드레스덴 폭격에 대한 보고를 받고, 히틀러에게 행방불명된 자신의 가족들을 찾기 위해 잠시 동안 드레스덴에 가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허가를 구했으나 이를 거절당하자 자신의 부관이었던 테오도르 필링 대령을 드레스덴으로 급파시켜 행방불명된 아내와 두 딸을 구출한 후, 뮐하우젠에 위치한 친형 오토 모델의 집으로 피신시켰다.드레스드너 SC의 레전드 선수이자 나중에 감독으로 서독 대표팀의 전성기를 이끄는 헬무트 쇤과 그의 가족들도 폭격에서 생존했다.
패전 직후 | 현재 |
그리고 당연한 소리이긴 하지만 영국에 대한 드레스덴 시민들의 감정은 매우 좋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냉전 종식 및 독일 재통일 직후였던 1992년 드레스덴에 방문했다가 계란 세례를 받는 일까지 있었고, 1992년에 영국에서 아서 해리스의 동상이 세워졌을 때 독일에서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1993년에 영국에서 화해의 움직임으로 드레스덴 트러스트가 설립되어 600만 파운드를 모금하여 드레스덴 재건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이 중에서도 상징적인 것은 독일 공군의 코번트리 폭격으로 파괴된 코번트리 대성당의 잔해에서 가져온 중세의 못으로 만든 십자가가 드레스덴 공습에 참여했던 공군 파일럿의 아들에 의해 전달된 것으로, 양국간의 화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충칭 대공습과 더불어 동시기 태평양 전선에 있었던 미 육군항공대의 커티스 르메이 장군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그리고 그 장군이 기획한 것이 바로 도쿄를 불지옥으로 만들었던 도쿄 대공습이다.
한편으로는 아서 해리스 개인에게도 이 작전은 악재 아닌 악재로 작용했다. 물론 원수 진급에 작위까지 받는 등 커리어는 성공적이었지만 똑같이 대도시에 대한 전략·전술 폭격을 애용했는데도 훗날 비교적 호의적으로 평가받는 커티스 르메이나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22]과 달리 자국 장성들에게도 냉소 어린 비판을 받을 정도로 유독 아서 해리스의 명망이 심하게 추락해 버린 것이다.[23]
7. 창작물에서의 등장
- 《제5도살장》은 저자인 커트 보니것이 드레스덴 폭격에서 살아남은 뒤 이 끔찍한 기억을 바탕으로 집필한 소설이다. 당시 드레스덴에는 미군 포로들도 있었는데, 보네거트는 그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미군뿐만 아니라 소련군 같이 나치 독일이 체포한 다른 적국 포로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 드레스덴 폭격을 배경으로 격추된 영국 파일럿과 드레스덴 출신 독일 간호사의 로맨스를 다룬 2부작 드라마 《드레스덴》이 2006년에 나온 적이 있다. 독일인 피해자들의 입장을 엿볼 수 있는 드라마이다.
- 《K(애니메이션)》 1기 9화에서 아돌프 K 바이스만의 누나 클로디아 바이스만이 드레스덴 지하에서 아돌프가 입수한 석판 임계시험 도중 폭격에 휘말려 프라우엔키르헤 앞에서 사망했다. 폭격 날짜가 1월인 것이 고증오류지만 폭격기의 고증은 잘 살렸다. 이어서 아돌프는 드레스덴의 석판을 이용해 백은의 왕이 된다.
- 프랑스-벨기에 만화 《수리부엉이》에서는 주인공 아돌프 볼프의 유일한 가족인 딸 로미가 숙모와 함께 드레스덴으로 피난을 왔다가 폭격에 휘말려 사망한다. 한 페이지 전체에 걸쳐서 불지옥이 된 드레스덴과 소이탄 폭격을 무자비하게 가하는 영국 왕립공군 아브로 랭커스터 편대의 모습이 묘사된다.
- 에이스 컴뱃 시리즈에서는 두 번 인용된다.
- 《에이스 컴뱃 5 The Unsung War》 - 미션 10 〈BLIND SPOT〉
여기서는 유크토바니아의 지명으로 등장하는 드레스덴에서 유크토바니아 공군 수송기들과 약간의 전자전기, 그리고 호위기들로 구성된 대규모 편대가 철수하는데, 갑자기 제8492 가상적기 비행단이라는 집단이 전파방해를 틈타 난입하고선 민간 지역에 폭격 및 기총 소사를 하여 민간인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고 특히 해당 지역에 있던 한 이공계 대학교가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그리고 이 죄는 같은 공역에 있었을 뿐, 해당 범죄에 동참하지도 않았던 워독 분견대가 회색 남자들의 공작으로 인해 항변 한 마디 제대로 하지도 못 하고 그대로 뒤집어쓴다. - 《에이스 컴뱃 제로 The Belkan War》 - 미션 11 〈The Inferno〉
작중 호프눙(Hoffnung)[24]이라는 도시를 폭격하는 카니발 작전이 드레스덴 폭격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다. 플레이어의 진영인 연합군 공군이 민간인 피해를 신경쓰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도시 전역에 쏟아 붓는다. 실제로 연합군의 지령으로 "정확한 폭격보다 파괴를 우선시하라(Priority is placed on destruction over accuracy.)"라는 대사가 나온다. 연합군이 "무고한 민간인이란 없다"면서 모든 것을 파괴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무차별 폭격을 가하는 와중에 폭격당하는 도시를 지켜야 할 벨카군은 산업시설 및 군수 시설을 연합군에게 고스란히 넘겨주지 않으려고 스스로 방화를 하며 청야 전술을 시도하는 수라도가 펼쳐진다. 이 참상에 국경없는 세계를 표방하며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살상무기들로 전세계 국경들을 없애겠다는 희대의 반란군 세력이 생겨났고, 벨카와 싸웠던 연합군이 이들과 교전하면서부터 벨카 공국의 초기술들이 세상 여기저기에 풀려나게 되며 끝내 각종 전쟁과 내전을 부르니, 에이스 컴뱃 시리즈에 있어 만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다.
제로가 5의 프리퀄이란 걸 감안하여, 앞서 5편 10화에 나온 장면이 단순히 워독 분견대 일행을 묻어버리려는 뒷공작으로서의 의미만 있는 게 아니라, 동시에 이 시기에 당한 것에 대한 복수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오시아와 유크토바니아 모두 벨카 전쟁 당시 연합군 소속이었기 때문.
[1] '천사'가 아니라 '친절'을 의인화한 동상이다.[2] 20초 경에 불이 붙은 채 시가지로 떨어지는 소이탄들이 보인다.[3] 소규모 공장까지 집계하면 더 많아질 것으로 추정된다.[4] 당시 일본 제국으로 치면 요코하마와 히로시마 같은 공장도시이다. 요코하마는 일본 본토 공습 당시 도쿄와 함께 쑥밭이 되었고, 히로시마는...[5] 당시 미군은 아르덴 대공세에서 독일군에게 뜻밖의 큰 타격을 입었다. 곧 밀려난 부분과 와해된 부대는 금방 수습했지만[6] 뤼베크 공습은 독일군 루프트바페의 코번트리 공습에 대한 보복성 공격이기도 했다.[7] 같은 연합국이라고 하더라도 미국과 영국은 상황이 달랐다. 영국은 독일 공군의 무차별 민간인 폭격을 겪었기 때문에 영국 내 여론은 독일에 대한 무차별 폭격에 찬성한 반면 미국은 독일군에 의한 참화를 겪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내 여론은 이에 반대했다. 한편 미국은 독일과 달리 일본에 의해 민간인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미국 내 여론은 일본에 대한 무차별 폭격에는 찬성했다.[8] 보복성 폭격의 단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전략 목표만 폭격하고 성과를 내는 미군과 달리 독일과 영국은 양국의 민간인 지대에 폭격을 했으므로 독일은 독일대로 영국 군수공장과 활주로를 파괴시키지 못했고, 영국은 영국대로 독일 군수공장들이 경미한 피해만 입고 금세 피해 복구를 하는 것(드레스덴 공업지대는 3개월 만에 이전 생산량을 복구하는 데 성공했다.)을 지켜봐야만 했다.[9] 가령 베를린 공습 과정에서 3개월 동안 760대가 넘는 폭격기를 손실했으나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10] 한 블럭을 날려 버릴 만한 위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이 단어는 '블록버스터 영화'의 어원이 되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11]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인 <10대 사건으로 보는 2차 대전>에는 철도나 군수 공장을 폭격해야 독일 군수 산업을 마비시킬 수 있는데 이것들보다 주택 단지를 최우선 공격 목표로 삼은 영국 공군을 비판하는 역사가가 나온다.[12] 그나마 쾰른이나 함부르크, 브레멘 등 산업적 가치가 높은 곳이라면 대공포나 요격기들이 상시 배치되었지만 그 정도 규모가 아니었던 드레스덴은 그렇지도 않았다.[13] 화재로 인한 질식사로 추정된다.[14] 《폭격의 역사》: 스벤 린드크비스트, 한겨레신문사, 222~223쪽[15] 자서전 격인 《내가 어렸을 적에》에 실린 내용. 드레스덴이 제대로 복구된 것은 캐스트너가 죽고 20년이 넘게 지난 독일 재통일 이후였다. 같은 책의 같은 장에는 전쟁이 끝나 고향으로 돌아온 캐스트너가 한때 옛 드레스덴의 번화가 프라하 거리였던 폐허에 홀로 서서 망연자실하는 장면도 나온다.[16] 집계는 알트마르크에서 화장한 재도 포함. 또한 이 집계는 다른 지역에서 매장된 희생자들도 포함해야 하기 때문에 이 수는 분명치 않다.[17]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소련군을 피해 연합군에 항복한 지역으로 가려던 중이었다.[18]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한데 만약 독일이 가짜 뉴스를 독일 주간지에 살포했으면 독일의 프로파간다라고 즉각 검열되거나 설렁 뉴스가 퍼져도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빙성이 비교적 높았던 중립국 언론으로 이런 정보가 살포되자 많은 시민들이 무분별하게 가짜 뉴스를 믿었다.[19] 애초에 베를린은 독일 도시들 중에서 루르 공업지대와 함께 최강의 방공능력을 가진 곳이었다.[20] 그런데 해리스의 별명인 백정 해리스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사람의 행적을 본다면 변명거리가 없긴 하다. 저 별명은 애초에 민간인 폭격이 아니라 폭격기 승무원들의 엄청난 손실에도 알게 뭐냐는 태도로 나와서 폭격기 사령부에서 붙여준 별명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더글러스 헤이그가 도살자 헤이그라고 불린 것과 비슷한 케이스이다.[21] 물론 이 폭격을 승인한 것도 처칠이라는걸 생각하면 그냥 책임 전가. 그런데 처칠이 저런 짓을 한 게 일상이니 새삼스러울 건 없다.[22] 미국 밀리터리나 군사학 서적 등에서는 유능한 공군 지휘관으로의 면모가 부각되는 편이다. 다만 대한민국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인지도가 낮아서 그냥 소이탄을 광적으로 사랑한 공군 장군 또는 붉은 남작의 사촌 정도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독일 공군 장군들보다는 에이스들이 주목받는 경향이 있고 장군들은 괴링, 갈란트, 케셀링 정도를 제외하면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전차 에이스보다 장군들이 주목받는 독일 육군과는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23] 사실 따지고 보자면 좀 더 복잡한 문제다. 셋 중 르메이는 무차별 폭격의 대상이 당시 미국인들이 극도로 혐오하던 일본이었던 관계로(왜 그랬는지는 진주만 공습 항목을 참조하자) 별 문제가 되지 않고 넘어갔으며, 리히트호펜은 무차별 폭격의 주체가 소련이었던 관계로 전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서방 연합군들에 의해 상대적으로 무차별 폭격 행위가 묻혔다. 피카소가 그린 것으로 유명한 스페인 내전 당시의 게르니카 폭격도 있긴 했지만 여기도 당시 피해국이었던 스페인에 프랑코가 이끄는 파시즘 정권이 들어섰던 탓에 미국과 사이가 썩 좋지 않았던 관계로 많이 묻혔다. 런던 폭격을 얻어맞은 영국인 아서 해리스에겐 억울할 따름.[24] 독일어(이 세계관에서는 벨카어)로 희망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