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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주라 전투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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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주라 전투
폴란드어: Bitwa pod Bzurą(브주라 전투)[1]
제2차 세계 대전폴란드 침공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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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historywarsweapons.com/GermanSoldiers11.jpg

파일:external/img.audiovis.nac.gov.pl/PIC_2-149.jpg
날짜
1939년 9월 9일 ~ 19일
장소
폴란드 브주라강 쿠트노 인근
교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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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제2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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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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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모제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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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즈난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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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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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집단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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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폰 클루게
]]
-제4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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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명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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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명칭
]][[발터 폰 라이헤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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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폰 라이헤나우
]]
-제10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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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명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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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명칭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
]]
-제8군 사령관
결과
나치 독일의 결정적 승리
폴란드군 주력 부대의 붕괴
영향
폴란드 침공의 주도권이 완전히 나치 독일에게 넘어감
병력
22만 5천여 명[2] 42만 5천여 명[3]
피해규모
전사: 2만여 명
부상: 3만 2천여 명
포로: 17만여 명
전사: 6천여 명
포로: 4천여 명

1. 개요2. 전투 전의 상황3. 전투
3.1. 폴란드군의 초기 공세3.2. 독일군의 반격3.3. 종말

[clearfix]

1. 개요

폴란드 침공 기간 동안 벌어진 전투 중 가장 거대한 전투로, 바르샤바로 향하는 독일 국방군에 대한 폴란드군의 반격으로 시작되었다. 초반에는 폴란드군이 선전했지만, 후반에는 공군력의 열세와 물량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하여 결과적으로 초기 국경 방어 계획과 함께 폴란드가 둔 최대의 자충수가 되어 버린 전투였다. 이 전투로 인해서 폴란드군의 정예 병력과 주력 부대의 대다수가 붕괴되거나 섬멸당했다.

단순히 전투 결과만을 놓고 보면, 차라리 그 병력을 가져다가 비스와(Wisła)강과 산(San)강에 걸쳐 형성된 폴란드 방어선을 보강하거나 루마니아-헝가리-폴란드 국경 지대의 루마니아 교두보[4]를 강화시키는 게 더 나았던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2. 전투 전의 상황

1939년 9월 1일, 베스테르플라테(Westerplatte)에 대한 독일군의 일제 포격과 잔인했던 비엘룬(Wieluń) 공습으로 폴란드 침공이 개시되었다. 당초 독일군은 중부에서의 공세를 자제하고 북쪽과 남쪽의 국경선에서 파고들어 폴란드군의 주력을 양익포위하여 붕괴시키는 전략을 짰다. 이 공세에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의 남부집단군에서 기갑 전력이 집중된 발터 폰 라이헤나우의 제 10군이 주공을 맡았으며, 이들은 폴란드군의 후방으로 깊숙히 진격하여 폴란드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역할을 맡았다. 페도어 폰 보크의 북부집단군은 독일군의 조공을 맡아 폴란드의 북쪽에서 공격하였다. 독일군의 초기 공세는 폴란드군의 분전으로 일부 전선에서 늦춰졌지만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폴란드군은 국경 전투에서 연패했다.

이처럼 폴란드군이 초반에 순식간에 밀려난 데에는 폴란드 사령부의 오판이 컸다. 폴란드 사령부는 포모제 군과 포즈난 군을 각각 폴란드-독일 국경과 지척인 폴란드 회랑과 대폴란드(Wielkopolska)에 주둔시켰는데, 이 때문에 이들은 큰 피해를 입으면서 후방으로 후퇴해야 했다. 폴란드 사령부의 의도는 독일과의 주 분쟁 지역인 폴란드 회랑 지역을 방어하는 것이었겠지만 폴란드 회랑은 개전 3일 만에 분단되었으며 포모제 군은 1/3에 이르는 엄청난 손실을 입고 퇴각해야 했다.

차라리 폴란드 회랑과 대폴란드에는 소수의 병력만 남겨두고 포즈난 군과 포모제 군을 북부 전선의 나레프(Narew)강이나, 아니면 독일의 주공이 가해진 남부 전선의 폴란드 공업 지대의 방어를 보강하는 게 훨씬 나은 판단이었다. 독일의 공격 계획은 전형적인 양익포위였기에 북부 전선이든 남부 전선이든 해당 병력이 양익의 방어를 강화할 수 있도록 배치되었다면 폴란드에 훨씬 큰 이득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폴란드에 다행이었던 것은 서부 전선의 폴란드군 상당수가 독일군의 포위망을 벗어나 폴란드 중앙으로 퇴각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후 브주라 전투를 비롯하여 독일군과의 다른 전투에서 소모되었다.

8일에 독일군은 바르샤바 외곽 지역에 다다랐으며 곧바로 바르샤바에 공격을 가했지만 바르샤바 방위군의 맹렬한 저항에 막혀 참패했다. 이후 바르샤바는 시민 자원병과 패잔병을 계속 받아들여 방위 태세를 강화했다. 바르샤바의 폴란드 정부와 군부는 바르샤바를 떠나 후방으로 이동하여 지휘를 맡았다. 비록 바르샤바에서의 소수 폴란드군의 분전으로 독일군의 바르샤바 점령이 늦춰지긴 했지만, 바르샤바는 여전히 위급했다.

이런 상황에서 폴란드 사령부는 바르샤바 외곽에 다다른 독일 남부집단군을 공격하여 패배시키는 것을 목표로 폴란드 중서부의 브주라(Bzura)강 근방에서의 야심찬 반격 작전을 계획했다. 독일군은 포모제 군에게 폴란드 회랑에서 이미 큰 피해를 입혔고, 전력을 대부분 보존한 포즈난 군은 바르샤바 방어를 위해 철도로 바르샤바로 이동했다고 생각했기에 폴란드 서부에서의 폴란드군의 저항은 8일 즈음에 완전히 종료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는 어느 정도 독일의 허를 찌른 작전이었다(문제는 그게 독일군 입장에서 '예기치 않은 기회'이기도 했다는 거지만). 6일에 포즈난 군과 포모제 군은 서로 연결되었고, 포모제 군 사령관 브와디스와프 보르트노프스키(Władysław Bortnowski) 소장은 포즈난 군 사령관인 타데우시 쿠트셰바(Tadeusz Kutrzeba) 소장의 지휘를 받기로 했다.

파일:external/i1.trekearth.com/bzura4_kopia_kopia.jpg
폴란드군의 기병과 TKS

전투에 참가한 폴란드군 병력은 대폴란드 지역의 방어를 담당하던 포즈난 군이 주축을 이루었고 여기에 폴란드 회랑 방면에서 퇴각한 포모제 군 잔존 병력이 합세한 상태였다. 쿠트셰바 소장이 총지휘한 폴란드군 주력 22만 5천여 명, 보병 8개 사단 및 기병 3개 여단(제4보병사단, 제14보병사단, 제15보병사단, 제16보병사단, 제17보병사단, 제25보병사단, 제26보병사단, 제27보병사단, 포모제 기병여단,[5] 비엘코폴스카 기병여단, 포돌레 기병여단)은 바르샤바 외곽에 다다른 독일 남부집단군의 제8군과 10군의 좌익을 쳐서 패배, 후퇴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3. 전투

3.1. 폴란드군의 초기 공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itwa_bzura_13-09-39.png
▲ 9일부터 13일까지의 전투 진행 상황. 푸른색 계열이 폴란드군, 붉은색 계열이 독일군이다. 스트리쿠프(Stryków) 방면에서 전개된 폴란드군의 공격으로 인하여 독일군이 브주라강 남쪽으로 밀려났다.

브주라강 일대에서 폴란드군의 반격은 9월 9일 저녁부터 시작되었다. 폴란드 반격군의 중앙을 맡은 에드문트 크놀코브나츠키(Edmund Stanisław Knoll-Kownacki) 소장은 폴란드 제14, 17, 25, 26보병사단을 이끌었다. 폴란드군의 우익은 스타니스와프 그즈모트스코트니츠키(Stanisław Grzmot-Skotnicki) 소장이 지휘했으며, 좌익은 로만 아브라함 준장이 맡았다. 이 폴란드군 작전 집단들은 독일 제8군 소속 24보병사단과 30보병사단을 그럭저럭 몰아내면서 초기의 작전을 성공시켰다. 기병 여단은 독일군의 취약한 측면을 들이쳤고, 혼란에 휩싸인 독일군은 곧 후방이 붕괴했다. 폴란드군은 TKS도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폴란드군에게 기습을 허용한 독일 제24보병사단과 제30보병사단은 1천 5백여 명의 사상자와 3천여 명의 포로를 냈고 이와중에 제30보병사단장 쿠르트 폰 브리젠(Kurt von Briesen)이 부상을 입으며 패주하기도 했다.[6] 이 반격으로 독일군은 20km 정도 남쪽으로 밀려났고 폴란드군은 웽치차(Łęczyca), 피옹테크(Piątek), 우니에유프(Uniejów), 발레비체(Walewice)를 점령했다. 9월 10일에는 마와호비체(Małachowicze)에서 폴란드 제 17보병사단과 독일 제 17보병사단간의 전투가 벌어졌고, 다음날 폴란드군은 다시 진격을 개시, 오조르쿠프(Ozorków)-스트리쿠프(Stryków) 선까지 도달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BK_-battle_of_Bzura_1939.jpg
▲ 비엘코폴스카 기병여단.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itwa_bzura_14-09-39.png
▲ 9월 14일의 상황. 워비츠(Łowicz) 방면으로의 폴란드군의 공세.

하지만 이후 독일군이 바르샤바에 투입된 기갑 병력을 브주라 방면으로 돌리고 루프트바페까지 맹폭을 개시하면서 폴란드군이 역으로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초기에 폴란드군을 과소평가했다가 큰 피해를 입은 독일군은 9월 11일 총력을 기울여 이들을 막기로 결심했다. 독일군 사령부는 이날 독일 제8군과 10군, 남부집단군의 예비 병력을 브주라 전선에 투입하기로 결정했으며, 여기에 독일 제4항공전대도 추가로 투입되었다. 제 4 항공전대의 광범위한 폭격으로 폴란드군의 전진은 큰 방해를 받았다. 쿠트셰바의 군대는 12일까지 공격을 계속했지만 이후 독일의 우세가 확고해지고, 여기에 우치(Łódź) 군 소속 빅토르 톰메(Wiktor Thommée)의 피오트르쿠프 작전집단(제 30 보병사단, 보윈 기병여단)과 제 28 보병사단, 크레시(Kresy) 기병여단이 모들린 요새로 퇴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7] 그날 밤 쿠트셰바는 공세를 중단하고[8] 소하체프와 캄피노스(Kampinos) 숲을 거쳐 바르샤바 방면으로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14일 아침, 보르트노프스키 소장의 폴란드 제16보병사단과 제26보병사단이 워비츠 근방의 브주라강을 도하했다. 폴란드 제4보병사단은 워비츠와 그워브노(Głowno) 사이의 도로에 도착했다. 독일 제4기갑사단이 바르샤바 교외를 떠났다는 사실을 안 보르트노프스키는 제 26 보병사단을 철수시켰다. 15일부터 16일까지 포모제 군은 브주라강 북쪽에 머물면서 방어적 형세를 취했다. 이들은 모두 바르샤바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3.2. 독일군의 반격

하지만 루프트바페의 맹폭으로 폴란드군의 진격이 늦춰진 사이, 16일부터 남부집단군의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 휘하 제8군과 북부집단군의 귄터 폰 클루게의 제4군이 폴란드군을 포위했다. 독일군은 폴란드군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보다는 우회하여 포위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폴란드군은 며칠 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전투에 임해야 했으므로 매우 지쳐 있었고, 이 때문에 중요한 공격이 취소되는 일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폴란드군은 독일군의 공중 우세와 이로 인한 기반 시설의 파괴, 그 전에 입은 피해로 인해 병력 보충이 거의 불가능한 반면에, 이미 우세했던 독일은 아껴두었던 예비 병력을 마음껏 투입할 수 있었다는 것도 승리의 여신이 독일의 손을 들어 주게 된 요인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itwa_bzura_16-09-39.png
▲ 9월 16일의 상황. 보면 알겠지만 독일군이 소하체프(Sohaczew)에서 폴란드군을 격파하고 남쪽의 폴란드군을 에워싼 후 포모제 군 참모부(Sztab Armii "Pomorze")까지 진격했다. 본진이 털리고 있어

폴란드군은 포위망을 뚫고 바르샤바 방면으로 후퇴하기 위해 총력을 다했으나 이 포위망에 투입된 독일군은 질적 차이를 빼더라도 숫적으로 42만 5천여 명으로 이미 2배에 달하는 상태였다. 9월 16일, 브주라 전투의 막바지에 이르러 독일군 제1기갑사단이 소하체프와 브로후프(Brochów) 사이의 브주라강을 건너 폴란드 제25보병사단을 공격하여 루시키(Ruszki)를 점령했지만 이후 폴란드군의 방어로 진격이 중단되었으며, 키에르노지아(Kiernozia)에서는 폴란드군의 방어에 제1기갑사단이 큰 피해를 입고 패배했다.[9] 하지만 이러한 분전에도 불구하고 폴란드군은 중장비를 모두 버리고 비스와강을 맨몸으로 헤엄치며 건너는 절망적인 퇴각을 해야 했다. 독일 공군은 후퇴하는 폴란드군을 상대로 맹렬한 폭격을 퍼부었다.

17일 밤에는 포즈난 군의 주력이 비트코비체(Witkowice)와 소하체프의 독일군 포위망을 공격했으며, 제15보병사단과 포돌레 기병여단은 비트코비체 근방의 브주라강을 다시 도하했다. 제17보병사단과 25보병사단은 브로후프 근방의 브주라강을 도하했다. 한편 포모제 군은 오스몰린(Osmolin), 오시에크(Osiek) 등을 전전했다. 이 과정에서 9월 18일 폴란드 제 14 보병사단을 지휘하던 프란치셰크 브와트(Franciszek Sewerin Wład) 소장이 전사했으며, 다음날에는 체르스크(Czersk) 작전 집단을 지휘하던 그즈모트스코트니츠키 소장이 부상악화로 사망했다. 9월 21일에는 포모제 군 사령관 보르트노프스키 소장이 중상을 입고 독일군에 포로로 잡혔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itwa_bzura_18-09-39.png
▲ 9월 17일부터 18일까지의 전투 진행 상황. 독일군의 포위망에 폴란드군이 갇혔다.

18일, 독일군은 포위된 폴란드군을 향해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이날 아침부터 독일군은 300여 기 이상의 항공기의 공중 지원과 포병의 화력 지원을 받으면서 폴란드군을 공격했다. 브주라강의 좌안과 우안에서 일제히 독일군이 비스와강과 브주라강 좌안, 독일군 사이의 삼각 지대에 갇힌 폴란드군에 공세를 가했다. 동시에 비스와강 우안의 고지대에 위치한 독일군의 곡사포대가 하루 종일 폴란드군의 진지를 두들겼다. 이후 2일간 포위망을 뚫으려는 폴란드군과 이를 막아서는 독일군 사이에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3.3. 종말

결국 9월 22일이 되면서 모든 보급품이 고갈되고 포위망 탈출에 실패한 폴란드군이 모조리 항복, 폴란드군은 더 이상의 반격 여력을 상실했다. 이 전투에서만 폴란드군 2만여 명이 전사, 17만여 명이 포로로 사로잡혔으며, 독일군도 6천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22만 5천의 폴란드군 가운데 반격을 이끌었던 쿠트셰바 소장을 포함하여 제15보병사단과 제25보병사단, 비엘코폴스카 기병여단, 포돌레 기병여단만이 간신히 포위망을 돌파했다. 이들 대부분은 19일과 20일 사이 캄피노스 숲을 경유하여 독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면서 포위망을 벗어났다. 19일의 불카 벵글로바(Wólka Węglowa)에서는 폴란드 2개 기병연대 1천여 명이 전차 37대를 장비한 독일군 2천3백여 명과 전투를 벌여 포위를 탈출하는 일도 있었다. 비록 포위를 뿌리치고 바르샤바로 이동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이 용감한 기병대는 이날 하루 동안에만 무려 20%의 병력 손실을 기록했다.[10][11][12]

제4, 14, 17, 26, 27보병사단은 18일부터 22일 사이에 투항했다. 22일의 폴란드군 전사자 중에는 제4보병사단을 지휘하던 미코와이 보우투치(Mikołaj Bołtuć) 소장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워미안키(Łomianki)에서 독일군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바르샤바를 향한 혈로를 뚫으려던 도중 총에 맞아 전사했다. 24일에는 캄피노스(Kampinos) 숲에서 폴란드군의 잔여 병력이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상황이었다.

브주라 전투는 폴란드 침공 당시 벌어진 최대의 전투였으며,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폴란드군이 치른 모든 전투 중에서도 투입한 병력의 규모와 피해가 가장 큰 전투였다. 또한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독일은 폴란드 침공에서 완전히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브주라 전투는 초기의 반격으로 바르샤바를 향한 독일군의 공세를 잠시 늦추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독일군에 역공을 당하면서 오히려 폴란드군 전체 전력의 약 1/4과 폴란드 서부 지역 대부분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브주라 전투에서 입은 손실과 17일에 있었던 소련의 동부 국경에서의 파상 공세로 인해 폴란드 정부는 본국에서의 저항을 단념하게 되었고[13] 루마니아 왕국으로 이동하였으며, 이후 10월 6일에는 본토의 폴란드군이 모두 항복하며 폴란드 침공이 종결되었다.


[1] 또는 Bitwa pod Kutnem(쿠트노 전투). 쿠트노(Kutno)는 브주라강 근처의 도시이다.[2] 8개 보병사단 + 3개 기병여단[3] 12개 보병사단 + 5개 기갑 및 차량화보병사단[4]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여 폴란드 군부가 전쟁 전에 세워놓았던 최후의 방어 계획으로, 폴란드 동남부의 험준한 방어 지형을 이용하여 항전을 계속하는 동시에 후방에서 전달되는 영국프랑스의 지원을 받으며 영국과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대한 공세를 개시하기 전까지 버티는 것.[5] 단 포모제 기병여단은 국경 전투에서 병력이 거의 괴멸되어 잔존 병력만이 합세했다.[6] 후일 히틀러는 브리젠을 직접 만나 그를 위로하였다. 실제로 브리젠은 이 당시 폴란드군을 막기 위해 총력을 다해 싸웠다. 나중에 브리젠은 프랑스 침공에도 참전했으며 훗날 독소전쟁에서 전사했다.[7] 결국 이들은 29일까지 모들린에서 독일군에 대한 항전을 지속했다.[8] 참고 자료[9] 참고 자료[10] 돌파를 이끈 에드바르트 고들레프스키(Edward Godlewski) 대령은 이후 폴란드 국내군(Armia Krajowa)에도 참여했다가 이후 독일에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했다.[11] 참고로 이탈리아 왕국 기자인 마리오 아펠리우스(Mario Appelius)가 이 돌격을 목격했다. 아펠리우스는 이 돌격에 대한 기록을 남겼고, 이 기록은 폴란드 기병의 대전차 돌격이라는 독일의 선전에 그대로 이용되었다(...). 정작 아펠리우스는 기록에서 폴란드 기병들의 용기에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제 딴에는 칭찬한다고 기록을 남겨 놨겠지만...[12]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9월 1일 크로얀티(Krojanty)에서 포모제 기병여단이 감행한 기병돌격이 있다. 포모제 기병여단 소속 제 18 울란연대 일부가 후퇴하는 아군을 엄호하기 위해 추격해 오는 독일군을 상대로 기습 돌격을 가한 것인데, 돌격 자체는 성공했으나 도중에 갑자기 나타난 독일군 장갑차의 포화에 노출되어 기병대는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나중에 독일의 전쟁 특파원들과 이탈리아의 기자 2명이 현장을 찾았는데, 이탈리아 기자들 중 한 명이던 인드로 몬타넬리(Indro Alessandro Raffaello Schizogene Montanelli)는 폴란드 기병대의 용맹을 칭찬하는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독일 측에서는 '폴란드 기병대가 독일군의 전차를 골판지로 만든 것이라 착각하고 무모하게 달려들었다가 전멸했다'는 식의 거짓 선전을 해 댔다.[13] 보통 소련을 전쟁에서 다 이기던 독일로부터 아무 역할도 하지 않으면서 폴란드 동부 영토를 무혈로 먹튀한 걸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당장 폴란드 정부가 18일 루마니아 왕국으로 이동한 이유도 소련의 침공 소식을 접한 다음날 본국을 포기한다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또한 폴란드군의 병력의 상당수가 아직 남아 있었고, 또 장기전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던 독일군의 탄약 및 공군 보유 폭탄 재고가 고갈 직전이었음을 생각하면 소련은 폴란드 침공에서 굉장히 큰 역할을 한 것이다. 당장 루마니아 국경 지대에서 대독 항전을 준비하던 35만 폴란드군의 대부분은 소련에게 먹혔으며, 7천여 명의 전사자와 2만여 명의 부상자, 24만여 명의 포로가 소련과의 전투에서 발생했다. 폴란드 침공 기간 동안 폴란드 측에서 전체적으로 전사자 6만 6,300여 명, 부상자 13만 3천여 명, 포로 66만여 명이 발생한 것을 생각하면 소련도 폴란드의 패배에 큰 역할을 한 것. 다만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한 시점에는 이미 폴란드군이 독일군과의 전투로 큰 타격을 입고 패주한 상황이었고, 독일과 소련의 양면공격으로 패배가 확실해졌으므로 폴란드군의 사기도 낮았다. 따라서 단순히 전사자와 포로 숫자만으로 비교하기는 어렵다.